104화 변화 그리고 완성(3)
통로는 어둡고 조용했다.
도르네프가 비상시를 대비해 주변을 모두 물린 것 같았다.
“그림자?”
“네. 마스터 앞에 엘프석을 꺼낸 순간 그림자가 엘프석을 낚아채곤 사라졌어요. 그리고 마스터의 신명에 변화가 생겼죠.”
그림자 왕과 관련된 신명이 분명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샤르바딘에겐 전달받지 못했는데?
내 의문 섞인 표정에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샤르바딘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신명과 관련된 내용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요. 신명 얘기도 이곳에 혈맹의 핵심들만 있기에 꺼낸 거예요.”
“…….”
“…….”
신명이 언급되자 침묵이 흘렀다.
나도 넬라도.
그 신명이 ‘그림자 왕의 가호’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블랙마켓이나 다른 이가 액받이로 신명을 발설하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 발설된 신명이 입을 통해 전해지지 않은 이상 신명의 저주라는 제약에 걸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앞으로 이 제약으로 답답한 상황이 자주 벌어질 것 같았다.
개안(開眼) 능력으로 타 주인의 신명을 확인해도 나 혼자 끙끙대며 숨겨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진짜 답답해 뒈질지도 모르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입 밖으로 신명을 내뱉어도 회피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세상이 정한 규칙대로라면 저주를 피할 순 없다. 신을 받드는 자들이라면 이 규칙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신녀인 넬라도 마찬가지.
하지만 난 예외를 알고 있다.
운명의 아케인.
그는 신명의 저주를 회피하는 ‘신을 받드는 자’다.
그래서 특별했다.
그런데 특별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있을까?
레토는 세상 어디에나 예외가 존재한다고 했다. 나중에 저주에 관해 레토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불사자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만큼 세계의 비밀에 근접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아! 이걸 깜박했네요. 가방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받을 줄은 몰랐네요.”
예상보다 성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검은 장미에 놓고 온 가방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이 보통 물건들이어야지.
샤르바딘에게 부탁했는데, 넬라가 이번에 가져온 모양이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
마녀의 목걸이.
마르샤 가(家)의 직인.
특히 이 직인이 필요했다.
내 가짜 신분을 증명해줄 중요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리고, 보랏빛 마석 더미가 가방 밑에서 뒹굴고 있었다.
제단에서 굴러다니는 걸 주워왔는데, 아직 그 쓰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으니, 넬라가 새침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누가 훔쳐 갔을까 봐요?”
“네.”
“…….”
아,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통로는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넬라의 눈치를 보며 걷고 있는데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서둘러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변수가 발생하게 되면 절 보호해주세요.”
“맡겨주시죠. 몸을 날려서라도 막아줄 테니까.”
“말 안 해도 믿어요. 누구처럼 남을 불신하는 마음이 없거든요.”
“하하하….”
네가 나한테 한 짓을 떠올려보라고, 불신 안 하게 생겼나.
어색하게 웃으며 도르네프를 바라봤는데, 고개를 스윽 돌려버린다.
난쟁이 녀석이 안 도와주네.
아, 민망해라.
그녀의 손에는 엘프석이 쥐어져 있었다. 무려 두 개나 됐다.
저 수량을 단시간에 채우려고 검은 장미 전체가 뭐 빠지게 굴렀을 것이다.
부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끼이이익―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늘 편히 들렸던 방인데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큼지막한 통창을 통해 선명한 달빛이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를 비췄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주변 커튼들이 을씨년스럽게 하늘거렸다.
이 공간이 이렇게 무서웠어?
무슨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준비해요!”
넬라가 긴장한 표정으로 엘프석 두 개를 펜리 근처로 던진 순간이었다.
허공 위로 엘프석이 반짝이며 떠오르자, 펜리의 그림자가 반응을 보였다.
꿀렁―
끈적한 액체처럼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엘프석을 집어삼키곤 사라졌다.
마치 간식을 낚아채는 돌고래의 점프샷을 보는 것 같았다.
엘프석을 흡수하는 것인지, 검은 먹물처럼 그림자에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르르륵―
그림자가 밀물처럼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펜리를 뒤덮더니, 이내 침대, 잠시 후엔 방 내부의 절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일행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상황을 지켜봤다.
커지는 그림자의 존재감이 강력하다.
설마 그림자 왕이 직접 움직인 건가?
세상에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은 곳은 없다.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고, 반대로 어디에도 없을 수 있다.
그림자 왕도 마찬가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에게 가호를 내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한다.
변덕이 심한 절대자로 유명했다.
펜리는 그중 가호를 받은 한 명인 것이고.
“무슨 상황인지 아시는 분?”
내 물음에 넬라도 도르네프도 입을 다물었다. 펜리 당사자도 아니고, 그들이 그림자 주술에 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반응만 살필 뿐이었다.
내 질문은 저 둘에게 한 게 아니었다.
[그림자 왕은 아니다. 저 엘프와 계약한 그림자 정령의 진화 과정이다.]
바로 레토.
그는 한눈에 그림자가 방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을 알아챘다.
정령의 진화 과정?
암고양이의 미니 버전인 그 우비 쓴 귀요미를 말하는 건가?
[그림자 왕의 가호를 받는다는 건 그림자 정령들에겐 기연과 같다. 급성장을 이루게 되지. 다만, 저 정령의 경우에는 불안해 보인다.]
“불안해 보여? 뭐가 말입니까?”
툭 내뱉은 내 물음에 두 사람이 날 바라봤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레토와 속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
아니,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내 진짜 정체부터, 현대의 지식까지 읽어냈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밑바닥까지 털리는 건 사양이라고.
[가호 효과로 인한 정령의 서투른 진화다. 주인의 그릇이 정령의 진화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눈앞의 현상은 그 부족한 그릇을 대신 채울 무언가를 찾는 일종의 탐색이다.]
엘프석으로는 부족한 그릇을 채우기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6성의 그릇이 고작 엘프석으로 채워질까?
원래대로라면 6성에 이뤄져야 할 정령 진화가 ‘그림자 왕의 가호’로 5성에 이뤄지고 있으니 그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탐색?
이 근처에 뭐가 있다고 탐색을 하는 거지?
“넬라, 처음에도 이랬습니까?”
“아뇨. 처음 보는 현상이에요!”
“엘프석으로는 안 됩니다. 그릇을 채울 다른 것이 필요…….”
둘을 설득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순간 내 머릿속에 보랏빛 마석이 떠올랐다.
날 3성으로 올려준 생명의 결정체.
그런 마석이 내 가방 안에는 무더기로 있었다.
설마 저 탐색의 움직임이….
스밧!
“…이런, 제길!”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림자가 그물처럼 퍼지며 날 집어삼키려고 했다.
딱 봐도 가방을 노리는 움직임.
허리를 다급히 틀었지만 늦었다.
퍼진 그림자 위로 그림자 손들이 튀어나와 가방을 낚아챘다.
넬라에게도 다가가는 듯 보이자, 그녀는 다급히 품을 가렸다.
귀중한 물건을 품고 있는 모습.
그 앞을 푸른 망치가 막아섰다.
스스스스―
푸른 안개가 일행 앞으로 퍼지자, 그림자 손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 물러났다.
도르네프의 냉기 특성인 서리 안개다.
갑자기 온도가 확 내려갔다.
새하얀 입김이 후― 하고 나온다.
“물러나!”
도르네프의 외침에 우리는 뒤로 물러났다. 내 시선은 가방에 머물러 있었다.
“아씨.”
허공에서 탈탈 털리고 있는 가방이 보였다.
정령 새끼가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강탈에 익숙했다.
가방 문이 결국 열리고 소중한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중 보랏빛 마석들이 바닥을 구르더니 그림자 속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
……!
뒤덮인 그림자 전체가 움찔움찔하며 거친 기운을 토해내더니 발광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손들이 무질서하게 튀어나와 잡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창문이 부서지고, 바닥에 금이 가고, 천장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범위가 눈에 띄게 커진다.
이러다 성이 무너질 판이었다.
마석들을 모조리 삼키더니 정령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콰자자장―!
“까아아악!”
바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너진 창가를 내려다보니 성안에 머물던 이들이 우르르 탈출하고 있었다.
거리를 둔 채 우리를 올려다봤는데,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환한 달빛 아래 첨탑 위로 피어오르는 거대한 그림자.
그들의 눈에는 괴물같이 보였을 것이다.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를 제외하곤 주변이 모조리 그림자로 채워졌다.
저게 그 귀여운 정령의 실체야?
귀엽다는 말 취소다.
[혼돈이 담긴 마석을 대량으로 삼켰다. 폭주한다. 막아라.]
“방, 방법은요!?”
[두 가지다. 주인의 의식을 깨우는 것. 정령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오오오오오―!
펜리를 중심으로 방 전체가 검은 물감을 칠한 듯 끈적이더니, 오싹한 소리와 함께 전에 봤던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거대한 손을 보자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림자 왕의 신체 일부를 불러오는 그림자 소환술.
저게 튀어나오면 성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두 사람을 돌아보며 외쳤다.
레토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고, 난 그중 가능성이 큰 한 가지를 선택했다.
“성이 무너지기 전에 정령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저것을? 어떻게……!”
“달빛이 없는 장소로 펜리를 데려가야 합니다! 더 커지기 전에 그림자를 공격해요!”
무력화.
간단했다.
그림자를 지우면 된다.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앞으로 내달렸다.
정령의 뿌리는 펜리다.
펜리를 빛이 없는 어두운 장소로 옮겨야 했다.
정령이 난동을 부리면서 창가부터 천장, 외벽이 전부 뚫렸다.
사방이 달빛으로 뿌려지는 이곳에서 정령을 무력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펜리를 업고 다른 장소로 튀어야 한다.
안쪽으로 발을 디디니, 마치 검은 공간 안에 들어온 느낌이다.
검은 손들이 사방에서 뻗어 나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짓쳐오는 검은 손들을 응시했다.
몽둥이들의 궤적과 겹쳐 보인다.
검은 손들은 변칙적이고 그 수도 많지만, 3성 여섯이 에워싼 다구리보단 덜 위협적이었다.
궤적을 읽으며 스텝을 밟고 허리를 틀고 고개를 젖혔다.
잡힐 것 같으면 주먹으로 그림자들을 흘리며 쳐냈다.
훈련은 실전에서도 바로 통했다.
검은 손들이 내 사이로 휙휙 지나갔다.
순식간에 펜리 근처로 접근했다.
당연히 그림자들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진짜 더럽게 공격하네.”
쇄도해오는 그림자 떼에 이를 악물었다. 수가 너무 많다. 피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성질을 넘었다.
다급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콰과과광―!
다섯 발의 화살이 동시에 터지자, 쇄도해오던 그림자들이 주춤 물러났다.
틈을 찾아 바닥을 구르고 침대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뭐지?
의문도 잠시 고개를 쳐든 순간 욕설을 내뱉었다.
“씨……!”
시야를 꽉 채운 거대한 그림자 주먹이 짓쳐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