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변화 그리고 완성(4)
거대한 벽이 쇄도하는 듯한 지독한 위압감.
머리가 새하얘졌다.
피하기엔 주먹이 너무 컸다.
흡혈의 고리 최대 출력이라면 방향을 틀 수 있을 것 같은데, 15분은커녕 1초도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순간 폐광산에서 저 주먹을 맞고 날파리처럼 날아가던 좀비 떼가 떠올랐다.
한 방이 죽진 않겠지?
두 손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콰아아앙―!!!!!
“……!”
머리카락이 매섭게 흔들렸다.
내 머리 위로 터진 거대한 폭음.
충격은 없었다.
눈을 살며시 뜨니 푸른 빛의 망치가 그림자를 막고 있었다.
혹한의 망치.
도르네프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니, 도르네프와 넬라가 함께 서 있었다.
둘에게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는데, 그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넬라가 소중히 품에 안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의 효과 같았다.
대치도 잠시,
그그그그극―!
거대한 주먹에 푸른 망치가 서서히 밀린다. 지독한 냉기가 그림자를 밀어내지만 폭주한 그림자를 막기에는 힘겨워 보였다. 도르네프가 이를 악문 채 날 바라봤다.
“뭐, 뭐하나!? 암고양이를 챙겨!”
“아!”
바로 침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펜리의 손목을 움켜잡고 거칠게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가벼웠나?
상태를 살폈는데 혈색이 안 좋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마력 중독 초기에 빠졌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왜 이래?
[그림자의 주인이 누군지 잊었나? 정령이 엘프의 마력을 뽑아 쓰고 있다. 벨트를 채워.]
마력의 루비 벨트를 낚아챈 후 펜리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녀를 안고 벨트를 꽉 잡아당긴 순간 루비에서 붉은빛이 퍼지면서 얕은 숨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전투 네비게이션이 따로 없네.’
레토를 떠올리며 그림자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주변 상황을 삽시간에 파악한 후 필요한 지시를 내려주는 불사자 레토.
그 조언은 하나 같이 찰떡처럼 맞아떨어져서 어느새 신뢰까지 하게 됐다.
훗날 누군가와 찰나의 승부를 가를 때 그의 조언이 승리의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황금빛 머릿결.
시원한 밤바람이 나와 펜리의 머리를 휩쓸었다.
여긴 꼭대기 층이다.
부서진 잔해 너머에 추락 포인트가 있었지만, 난 주저 없이 그 위로 몸을 날렸다.
줄 없는 번지 점프를 고민 없이 하는 나도 참 미친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작 추락사 따위로 뒈질 내가 아니었다.
“아, 안돼!”
“까아악!”
달빛 아래로 추락하는 남녀를 보며 밑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쓸데없는 비명 따윈 무시하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빛 한 점 없는 장소.
추락한 뒤 그곳을 찾아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아아아아아악!”
“도, 도르네프님!”
위쪽에서 도르네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응?”
시선을 돌리기 전에 내 머리 위로 검은 물체가 휙―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드니, 두 눈을 부릅뜬 도르네프가 날 보며 입을 뻐금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허공 위에 난쟁이 녀석이…….
생각도 잠시, 도르네프는 밤하늘 저 멀리 어딘가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
뭐지 이 황당한 상황은?
난쟁이가 하늘을 나는 마법을 익힐 리 없으니, 범인은 그림자였다.
위를 살피자 상황 파악이 바로 됐다.
거대한 손이 도르네프를 잡고 야구공처럼 집어던졌다.
날 맞추려다가 실패한 모양.
넬라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나뭇가지를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림자는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왜냐면 저 그림자의 뿌리를 내가 안고 도망치고 있거든.
순간,
“……!”
위에 머물던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없어진 정령의 존재에 당황하고 있는데 넬라가 위쪽에서 다급히 외쳤다.
“미, 밑이에요! 밑!”
…밑?
순간 풍경이 사라지고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고통이 찾아왔다.
“…컥!”
그림자 정령이 성의 그림자를 타고 내려와 내가 추락하기 전에 밑에서 나와 펜리를 움켜잡았다.
이래서 그림자 주술과는 싸우기 싫었다.
까다롭거든.
주인을 훔쳐 간 대가일까.
날 잡아챈 그림자 손의 기세가 무척이나 매섭다.
날 완벽히 포위한 손이 압박을 시작했다.
끄드득―!
“…크윽!”
이 노빠구 정령 새끼가!
주인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도 난 압살할 생각인듯싶었다.
이를 빠드득 물곤 팔을 뻗어 그림자를 밀어냈다. 한 손으로 펜리를 안고 보호하는 터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하체가 먼저 비틀렸고 압출기에 눌리듯 공간에 비좁아졌다.
서서히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잠시,
우득! 우드득!
“끄아아아악!”
결국, 하체가 부서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내 몸이 쿠션 역할을 하면서 펜리에게는 충격이 가지 않았지만, 내가 마른 육포처럼 압착 돼버리면 그녀도 위험했다.
폭주한 정령은 지금 주인도 눈에 안 뵈는 듯 보였으니까.
[그녀를 죽여라.]
“…뭐?”
[지금 네 능력으로는 빠져나올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를 죽이면 동력을 잃은 정령도 소멸한다. 죽여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넌 불사자가 아니고, 난 너를 잃고 싶지 않다.]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전투 네비게이션이 그녀를 죽이라고 종용했다.
펜리를 죽이라고?
[시야가 다 가려진 상태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
“지랄하지마!”
대가로 이뤄진 거래라지만 그녀에게 받은 것이 많다. 목숨도, 능력도, 그리고 이 심장도.
나 살자고 그녀를 죽인다면 내가 학살자와 뭐가 다르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며 그녀를 안고 아이처럼 웅크렸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이젠 숨까지 턱 막힌다.
그때,
우웅―!
위기를 느낀 것인지 염원의 반지가 붉은빛을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고통이 잠시나마 사라지며 숨이 트인다.
그리고,
들썩―
펜리의 고개가 힘겹게 움직였다.
후―
짧게 토해지는 숨.
뭐라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그녀의 입으로 귀를 가져가자, 힘없는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고작 그게 다냐?”
“뭐?”
“날 개고생 시키면서 얻는 힘이 고작 이거냐고.”
지금 상황을 알고 있다?
기절해 있는 상태에서도 의식이 있었던 건가.
대체 언제부터?
하지만 의문도 펜리년의 도발에 잊혔다.
[악착같이 심장을 얻으려고 하길래.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별거 없네. 고작 그것 따위에 목숨을 건 거냐? 날 개고생 시키면서?]
지난날 녀석이 날 조롱하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도 이 빌어먹을 그림자에 잡아먹혀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나에겐 뚫린 입이 있었다.
염원의 반지를 얻고, 심장에 적응했으며, 육체를 훈련하고 강해지면서 기회가 온다면 녀석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니, 이제 너 따윈 씹어먹을 수 있어.”
두 번 쪽팔림 당했으면 됐다.
세 번은 없다.
온몸이 부서지는 감각.
지독한 고통.
근육이 짓눌리며 비명을 질러댄다.
난 두 눈을 감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이딴 고통은 오히려 시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토.”
[미친놈이군.]
내가 뭘 하려는 지 그는 바로 알아챘다. 그래서 날 미친놈이라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생존한다면 고통은 성장에 도움이 되니까.]
레토의 기꺼워하는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은 순간,
번쩍!
내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두 주먹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인첸트 부여.
속성은, 관통이다.
“끄아아아아아아!”
지독한 고통에 모든 근육이 몸부림친다. 인첸트 부여를 버티기 위해 전 근육들이 수축하며 힘을 모았다.
주르륵―
실핏줄이 터지며 축축한 액체가 두 눈에서 흘러나왔다.
코피도 흘러나왔다.
“쿨럭!”
피를 토하면서 두 주먹을 양쪽으로 사납게 내질렀다.
퍼석―!
“……!”
한 손이 부여 실패로 먼지처럼 부서져 나가고, 다른 손이 압박하던 그림자를 꿰뚫었다.
그림자를 뚫고 나온 손이 그림자를 움켜잡곤 찢었다.
틈이 생긴 공간, 그 틈 바깥으로 펜리의 뒷덜미를 입으로 물어 틈 사이로 내던졌다.
허공에 뜬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한쪽 손이 날아간 끔찍한 고통 때문인지 내 미소는 이를 드러낸 사나운 야수 같았다.
“너 나한테 목숨 빚 하나 진 거다.”
“…….”
그녀가 사라진 사이, 틈은 삽시간에 그림자로 아물었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고통에 분노한 정령이 재차 날 압살하기 위해 짓쳐 들어왔다.
난 멀쩡한 주먹을 허리춤에 고정하곤 주먹 지르기 자세를 잡았다.
인첸트 부여에 내 근육들이 난리를 친다.
새로운 힘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그 저항이 만들어낸 한 가지 깨달음이 있다.
“그 변화가 이겁니까?”
[변화를 깨우쳤군. 나쁘지 않아.]
“…뭡니까? 이게.”
물음을 던지며 전 근육을 돌처럼 수축시켰다.
그리고 이완.
수축 다시 이완.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근육들이 숨을 쉰다.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마치 폭주 기관차가 된 느낌이었다.
주먹에 담긴 인첸트가 눈 부신 빛을 발하고, 난 그저 주먹을 찌르겠다는 생각만 했다.
[레토니칼스의 전투, 잠력 폭발 기본식, ‘격발(擊發)’이다.]
격발을 펼친 순간,
으직―
세상이 찢어졌다.
* * *
의식을 차리니 어두컴컴했다.
암흑 공간.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이나 감각은 잡히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그림자 안에 갇혀 있는 건가.
두 눈을 끔벅인 순간 익숙한 녀석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녀석만 보였다.
암고양이의 미니 버전, 그림자 정령인 우비 녀석이었다.
진화를 통해 성장했는지 꼬마보단 어엿한 소녀처럼 보였다.
여전히 귀여웠는데, 실체를 봐서인지 이젠 귀엽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두근―
심장이 뛴다.
그녀의 것이 아니다.
내가 가슴을 매만지자, 그림자 정령은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정령은 곧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동시에 세상이 열렸다.
끔뻑―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선명한 달빛이 눈에 담겼다.
윙윙거리던 귓가가 잡히더니 어지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아직 현장인 것 같았다.
난 지금 누워있는 건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격발은 잠력을 터트리는 기술이다. 생명을 태우는 기술이지.]
“…생명? 그러면 죽는 거 아닙니까?”
[예외가 있다고 말했을 텐데.]
시야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염원의 반지가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써버린 잠력을 염원의 반지가 채워주는 것 같았다.
“……크.”
반대쪽 손목이 날아간 것을 잊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손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붕대를 묶고 있는 건가?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없어서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잠시 후 시야가 어두워지고, 누군가 달을 가리고 날 내려다봤다.
축 늘어진 금발.
펜리다.
그녀는 말없이 날 내려다봤다.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다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
그녀는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이내 꾹 다물었다. 눈썹을 찡그린 그녀가 등을 돌리곤 휙 가버렸다.
뭐야? 저 녀석?
[고맙다.]
“네…?”
[저 다크엘프가 조금 전 네게 했던 말이다.]
‘고맙다.’라.
저 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목숨 빚을 탕감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동감이다.]
그 말로 빚을 퉁치려고?
어림도 없다.
다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