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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06화 (106/130)

106화 혈맹이란 이름으로

가진 잠력을 일순간 터트려 한계를 뒤집는 폭발성 육체 강화술, 격발(擊發).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누운 채로 어디론가 실려 와 사흘 동안 병자처럼 누워서 지냈는데, 염원의 반지라도 바닥난 잠력을 회복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일 자체가 경이로운 능력이니 불만을 가지면 욕심이겠지?

누워서 시간을 보냈지만, 멍하니 시간을 낭비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특히, 주둥이.

사흘 내내 내 주둥이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주둥이로 두 가지 임무를 피땀 흘려 진행했는데, 그중 하나는 쉴 새 없이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폭풍 질문이었다.

상대는 이심동체(?)인 레토였다.

“레토, 잠력의 크기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레토, 신명의 저주를 피할 방법이 있을까요?”

“레토, 마석은 한때 당신의 숙주였던 미믹의 신체에서 나온 것인데, 혹시 저도 나중에 마석을 뱉어내는 겁니까? 예를 들어 똥을 쌀 때라던가.”

“레토. 레토?”

떠오르는 의문이 생기면 레토에게 즉각 묻고 답을 구했다.

레토는 꼰대답게 모든 질문에 진지하게 답을 해줬다. 싫거나 귀찮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잘 프로그램된 AI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는데, 거짓 없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레토의 답은 때론 무척 지루하기도 했고, 무척 흥미로웠으며, 대단히 충격적인 것도 있었다.

흥미롭다.

그리고 대화의 행위 속에서 난 레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백과사전이나 간이 공략집을 얻는 기분이랄까.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군.]

물론, 절대자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

드디어 침대를 털고 일어나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사지(四肢)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것인지 오늘에서야 알았다.

특히 식사하거나 볼일을 볼 때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기분이 아주 고약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힘들겠지?

홀가분했던 그 기쁨도 잠시,

손목을 고정하던 붕대를 풀자 기쁨 대신 놀라움이 자리 잡았다.

“……와. 진짜 쩔긴 쩌네.”

새로 생긴 손가락을 조심스레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살짝 뻑뻑한 느낌 빼곤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인첸트 부여 실패 여파로 날아간 손목이 자리 잡았다.

이례적인 회복 속도.

[‘격발’ 상태에선 모든 육체 능력이 한계의 벽을 넘게 된다. 회복력 또한 마찬가지지.]

손목이 회복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바라봤다. 붐(Boom)을 터트렸을 때 이미 경험했지만, 직접 보고 감각으로 느끼는 건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점점 인간과 멀어지는 것 같았는데,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순정 인간으로 버티기엔 이 세상은 터무니없이 살벌했으니까.

훼손된 육체, 그 복구 과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니,

[네 육체 구성에 필요한 생체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떤 부위든 회복시킬 수 있다. 다만, 숨이 붙어 있어야겠지.]

머리나 심장이 터지거나, 목이 잘리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을 때.

이것이 내 죽음의 조건이었다.

다른 것은 한 번에 이해됐는데, 마지막 조건이 아리송했다.

“회복 불가능한 상처…?”

[속성 중엔 회복을 방해하는 것들도 존재한다. 그 힘이 네 회복력보다 월등히 강력하다면 넌 죽는다.]

“어떤 것들입니까?”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특정하기 어렵다. 굳이 답을 원한다면 ‘독’이 대표적이다.]

소설에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됐다.

한 달 정도 늘어지게 쉬면서 레토에게 배움을 청하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찌뿌둥한 몸을 풀고 나갈 준비를 마치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창가 너머 어두워지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곤 방을 나왔다.

영주성 일부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숙소로 옮겼는데, 위치는 내성 외곽 쪽에 붙어 있는 개인 별장이었다.

펜리는 의식을 차린 뒤 푸른 장미로 가버려서 별장에선 혼자 지냈다.

펜리의 소식은 이따금 샤르바딘이 찾아와 알려줬는데, 진화한 그림자 정령에 적응하고 그동안 밀린 업무를 몰아서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알렉스님,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말씀 낮추십시오. 전 별관 지배인일 뿐입니다.”

“전 이게 편해서요. 편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건물을 나오자 바닥을 쓸던 거구의 지배인이 날 반겼다.

나이 지긋한 할아범인데, 그냥 할아범은 아니고 늑대 수인이었다.

늑대가 늙으면 딱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비주얼.

베네타에는 드워프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엘프나 수인들도 자리 잡은 영토였다.

특히, 수인 중에는 늑대의 피를 가진 이들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그러고 보니, 푸른 장미의 집사도 늑대 수인이었지?

눈앞의 할아범도 샤르바딘이 고용한 별장 지배인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 식사를 훈련장으로 가져다주세요.”

“오늘 저녁부터 준비해 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별장 뒤편에는 작은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배인이 한 번 쓸고 갔는지 훈련장이 무척이나 깔끔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새로운 감회를 느꼈다.

“…나 출세 한 건가?”

훈련장이 붙어 있는 개인 별장에 지배인과 시종도 셋이나 머무는 공간이었다.

비용은 당연히 공짜.

현실에선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다.

평범한 삶도 지키기 힘들었던 인생.

대출 끼고 아파트 한 채를 사면 일평생 일했을 경우 노후에 남은 건 대출이 끝난 집 한 채가 아닐까 싶다.

내가 살던 곳에선 그것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으니까.

[출세? 뭐가 출세라는 거지?]

“그런 게 있습니다.”

레토에게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다.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순백의 활이 반가움을 표하며 내 피를 쭉쭉 빨아먹는다.

형태나 분위기는 여신인데, 하는 짓은 악녀나 다름없었다.

피식 웃으며 활대를 잡은 손에서 붉은 반지를 응시했다.

염원의 반지.

격발(擊發)도 그렇고 흡혈의 고리도 그렇고 ‘생존’의 염원이 담긴 이 반지가 아니었다면 내 능력은 전부 반쪽짜리였을 것이다.

힘의 완성에 마침표를 찍어준 물건.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기도 했다.

잠시 후, 핏빛으로 물든 활을 바라봤다.

1단계 훈련이 완료되면 레토는 최대 출력 시간이 단축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 부족하네.”

그 말처럼 최대 출력에 이르는 시간이 눈에 띄게 짧아지긴 했다.

5분 정도?

15분에서 5분으로 줄어든 것이니 확연한 변화는 맞는데, 5분도 실전에선 사용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더 줄일 순 없습니까?”

[언젠간 가능하겠지. 네 피의 가치가 올라간다면.]

“피의 가치? 피에도 등급 같은 게 있습니까?”

[단순히 피의 양으로 활의 능력이 발현된다고 보나? 질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이번 깨달음으로 네 그릇이 커졌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럼 격발 시에는 어떻습니까?”

잠재력을 태우면 육체를 구성하는 그릇의 한계가 사라진다. 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훨씬 더 단축되겠지. 하지만 지금 네 육체 그릇으로 격발을 사용한다면 활을 잡을 정신이나 있을지 모르겠군.]

“…….”

레토가 쥐꼬리만 한 잠력을 비꼬아 말했다.

펜리가 만약 내 격발의 유지 시간을 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루보다 못한 새끼라고.

결국, 더욱 성장해서 잠력을 담을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이고, 또 높이고, 계속 높였다.

깔끔했던 훈련장 바닥이 내 발자국으로 잔뜩 더럽혀지고서야 난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후욱― 후욱―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했다.

전력을 다해 정신없이 몸을 풀었더니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레토에 지시하에 시작됐던 1단계 육체 훈련법.

이 정신 나간 훈련은 욕이 절로 나오고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효과는 하나는 기가 막혔다.

[싸움꾼의 눈이다. 그 토대는 맞는 것부터 시작하지.]

공격 궤적을 읽어내는 눈이 생겼고,

[목을 물어뜯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의 이빨 바로 밑까지 치고 가야 하니까.]

어떤 공격이든 담담히 받아내는 강심장이 됐다.

육체도 질기고 단단해졌다.

흡혈의 고리와 인첸트 숙련도도 실전에서 충분히 펼칠 정도로 성장했다.

이젠 어디 가서 한 사람 몫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한가지.

‘육체에 인첸트를 부여하는 건 미친 짓이다.’

인첸트에 훨씬 익숙해질 때까지 육체에 인첸트를 부여하는 개또라이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 또 결심했다.

천운이 따라서 손목 하나로 끝났지, 재수가 없었더라면 몸 전체가 박살 났을 것이다.

참고로 난 그리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모든 운을 다 써버렸을지도.

다사다난했던 베네타에서의 훈련.

최후 미션인 ‘격발(擊發)’까지 각성하면서 성공리에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레토, 이제 좀 쉬엄쉬엄해도 되겠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기가 걷는 것에 만족한다면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짐승과 다를 바 없지.]

“…무슨 소립니까?”

[인간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꼰대 새끼, 융통성은 밥 말아 먹었나.

길게 한숨을 내쉬곤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팔목이 없었을 때가 편했으려나?

오늘도 밤샘 훈련이 될 것 같았다.

* * *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렇죠? 바로 나가봐야겠습니다.”

“성으로 곧장 가실 겁니까?”

“네. 성주님의 호출이 있었거든요.”

“다녀오십시오.”

터덜터덜 힘없이 별장을 나서자 늑대 할아범이 빗자루를 흔들며 날 배웅했다.

새벽부터 바닥 쓸기라니, 늑대 수인은 다 저렇게 부지런한 건가?

“정말로 훈련장에서 아침을 맞이할 줄은 몰랐네.”

유도리라곤 개미 똥구멍만큼도 없는 레토 새끼.

피곤해서 바닥에 누워 휴식 좀 취하려고 하면 [일어나라.] 이딴 소리를 내뱉으며 쉬지 못하게 했다.

무시하려고 해도, 심장을 옥죄거나 찌르는 자극을 주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인간 해부학에 정점을 찍던 현대에서도 이딴 고문은 없었다고!

벌써부터 ‘일어나라’라는 말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저 멀리 영주성이 보이자, 잘 닦인 돌길을 타고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고즈넉한 성의 풍경이 눈에 담겼다.

어젯밤 도르네프가 시종을 보내 영주성에 들려달라는 말을 남겼다.

펜리도 의식을 차렸으니, 슬슬 혈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됐다.

지금쯤 폐광산에 관련된 일도 준비가 끝났을 것이다.

드워프, 엘프, 인간.

세 종족을 중심으로 한 혈맹이 맺어지면 토바른 내에 큰바람이 불 것이다.

이종족이 인간과 혈맹을 맺은 사건은 거짓 백 년 만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나름대로 예측해 보려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일단 도르네프를 만나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성 중심부에 진입하자 큰 길이 드러나며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응?”

잡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성 사람들이 날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인간이니 이곳에선 눈에 띄는 것은 맞지만, 바라보는 서신이 노골적으로 뜨거웠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뭐야? 갑자기….”

일단 내가 나타나면 하던 일을 멈추곤 날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수군했다.

대놓고 돌려 까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악의나 적대보단 호감이 잔뜩 보여서 내가 더 당황스러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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