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혈맹이란 이름으로(2)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
기사단의 훈련장을 지나치는데 근처에서 기초 훈련을 받던 드워프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와 예를 표했다.
형색을 보아하니 수습 기사들로 보였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드워프들이 그것도 기사 출신들이 내게 먼저 다가와 예를 표하다니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기사 하나가 붉게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심판자분들을 탄생시킨 분이라 들었습니다!”
“…심판자?”
“악인 척결! 그분들은 베네타의 희망입니다!”
설마 날 패는 것을 낙으로 여겼을 것이 확실한 몽둥이 녀석들을 말하는 건가.
“부디 제게도 심판자가 될 기회를 주십시오!”
뭐 이 새끼야?
한 녀석이 용기 있게 외치자, 여기저기서 드워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설마…… 이거였냐?
몽둥이를 든 드워프 녀석들이 바깥에서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닌 지 모르겠지만 훈련 과정이 고된 건 나 자신이지 녀석들이 아니다.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상황이 아주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자, 잠깐!”
“알렉스님!”
“으아아악!”
인기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기분이 이런 건가?
뜨거운 눈빛, 호감 어린 태도, 날 향해 흔드는 손짓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내겐 아주 ㅈ같은 일이었다.
일단 내 눈앞에 여자는커녕 전부 땀내 나는 수염쟁이 드워프 새끼들이었다.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저리 꺼져!”
욕설로 응대하니 환호를 내지르며 더 격하게 달려온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배움을 청하다니 좋은 태도다.]
“닥쳐!”
이른 아침 영주성 입구에서 때아닌 난리가 벌어졌다.
적도 아니니 쥐어팰 수도 없고, 드워프들에게 완벽히 둘러싸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진이 다 빠지네.
“모두 멈춰요!”
다행히 샤르바딘이 제때 등장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인파를 뚫고 입구로 후다닥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마차를 보내려고 했는데 일찍 나오셨네요?”
“잠이 없어서요.”
“이젠 회복이 끝나신 건가요?”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한 건데요. 도네프는 5층 집무실에 있어요. 마침 마스터도 와 계시니까 안내해드릴게요.”
“펜리님이요?”
“네.”
고개를 끄덕인 샤르바딘이 드레스 자락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뿐사뿐 잘도 오른다.
그 뒷모습을 보며 따라간 것도 잠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그 상황 어떻게 된 겁니까?”
“드워프들이요?”
“드워프뿐만 아니라 성 주민들이 절 보는 눈초리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음, 상황이 조금 복잡해요. 여러 가지 소문이 겹치고 상상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환상이랄까?”
“환상?”
샤르바딘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들러봤다.
우리밖에 없으니까. 그냥 얘기해!
내 속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샤르바딘은 어색하고 웃고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지금 베네타에 아서님의 소문이 불같이 퍼지고 있어요.”
“…그 웃기지도 않는 심판자 때문에 말입니까?”
“그것도 있고, 최근에 벌어진 영주성 괴물을 처리한 일로 유명세를 타고 있죠.”
“괴물? 그림자 정령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요. 곧 알게 되실 텐데, 괴물의 짓으로 결론을 지었어요.”
샤르바딘이 눈에 힘을 주며 괴물을 강조하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야 어떻든 도르네프가 그리 결정했다면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나와는 큰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근데, 아서님이 괴물을 쓰러트리기 전에 도네프가 크게 당했잖아요.”
“…운이 없었죠.”
당했다기보단 잡혀서 날아갔다. 그것도 아주 멀리.
그 장면이 성 주민들에겐 당한 것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성주도 당했던 괴물을 쓰러트린 인간.
“그 때문에 과거 라웁 숲에서 활약했던 소문이 베네타에서 재조명되고 있어요. 구원의 성자란 칭호 말이에요. 사실 헛소문이란 말이 지배적이었거든요. 그리고 또 있어요.”
“…또 말입니까?”
“폐광산의 저주.”
“아….”
“아서님이 폐광산의 저주를 풀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미 베네타 내에서 큰 화자가 됐어요. 대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죠. 지금은 비밀로 숨기고 있지만, 현재 베네타 내에 야금야금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나토네 경이 며칠 전 드워프들을 데리고 광산 내부에 설치된 트랩들을 제거하러 방문했거든요.”
“…만약 그 소문이 진짜라고 판명이 난다면? 전 어떻게 될까요?”
“뭘 어떻게 돼요. 베네타를 넘어 토바른 지역으로 알렉스란 이름이 혈맹의 이름 아래 퍼져나가겠죠.”
샤르바딘은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곤 날 바라봤다. 당사자인 나와 달리, 그녀는 앞날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운 듯 보였다.
“이종족과 인간, 이들이 혈맹을 맺고 이어가던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아나요?”
“…….”
“백 년이에요.”
물론 알고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혈맹이 주는 파급력이 더 클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조용히 크긴 그른 것 같았다.
끼이이익―
5층 집무실에 도착한 샤르바딘이 문을 열자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암코양이가!”
“시끄러! 난쟁이 새끼야!”
익숙한 목소리들이다.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고.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도르네프와 펜리가 보였다.
내 인기척에 동시에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는데 둘 다 사나운 얼굴들이다. 내가 오기 전에 한바탕 한 것이 분명했다.
저것들은 왜 마주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지.
“마침 잘 왔어.”
“좋다. 저 녀석에게 의견을 물어보지.”
뭘 물어봐.
물어볼 건 내가 훨씬 더 많은데.
하지만 표정들이 워낙 살벌해서 테이블 사이에 조용히 앉아 저들이 다툰 이유를 들어봤다.
무엇 때문에 싸울지 예상은 됐다.
역시나,
“광산에 대한 지분 협상이 안 돼. 저 탐욕스런 난쟁이 때문에.”
“타, 탐욕이라니! 이 욕심쟁이 엘프년이!”
엘프년이라 욕을 했다가 그는 샤르바딘의 헛기침 소리에 움찔하곤 어색하게 허허거렸다.
“그대는 예외요! 나의 피앙새.”
아주 지랄을 해라.
혹한의 군주가 어쩌다 이리됐는지. 공처가가 따로 없었다.
베네타, 검은 장미 그리고 나.
도르네프가 제안한 광산 지분 비율을 7 : 1.5 : 1.5였다.
염원의 반지를 얻기 위해 내가 펜리에게 광산 지분을 줬으니, 베네타와 검은 장미가 7:3으로 지분을 나눈 것인데, 펜리는 6:4를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10프로를 올려달라는 주장이었다.
펜리가 탁자를 탁! 치며 외쳤다.
“내가 아니었으면 폐광산의 저주 따윈 풀지도 못했어! 난쟁이 놈들은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내가 다 했다고! 내가!”
마치 자기 혼자 다 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진짜 뻔뻔한 년이었다. 역시 아플 때가 그나마 엘프 같았어.
“그러니 파격적으로 지분을 챙겨준 거다. 수십 년이 넘도록 폐쇄된 광산을 채굴까지 손보려면 천문학적인 금액과 노동력이 요구돼. 그 이후 지속적인 채굴을 하려면 유지 비용이 필요한데, 60%로는 원로들을 설득할 수 없어. 70%가 마지노선이다.”
“혹한의 망치가 들이밀면 돼. 협박 몰라?”
“여기가 무슨 시정잡배들의 놀이턴 줄 아나!”
또다시 티격태격하며 둘끼리 말싸움을 시작했다.
이러다 날밤 새우겠는데?
아, 난 상관없으려나?
중재 역할로 제격인 샤르바딘을 바라봤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이 알아서 하란 신호를 보내왔다.
이미 중재를 포기한 듯 보였다.
근데 나한테 묻는다고 하지 않았니? 저들 눈에는 이미 내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 펜리년은 왜 이리 기를 쓰고 지분을 늘리려는 거지? 내 몫까지 가져갔으면 차고 넘칠 텐데.
그 이유를 샤르바딘이 말해줬다.
“광산 채굴이 시작된 이후를 생각하시는 거예요. 광산을 노리는 자들이 생길 테니 보호비 명목이죠. 큰 출혈이 예상되거든요.”
“출혈? 베네타의 광산에 누가 손을 댄단 말입니까?”
“베네타의 광산은 조금 특별하거든요. 드워프들이 이유 없이 저 광산 근처에 뿌리를 뒀을까요? 분명 노리는 자들이 나타날 거예요.”
소설에선 폐광산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아서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
어쨌든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 했다.
귀가 아파지기 시작했거든.
“논쟁이 되는 광산 지분 10프로를 혈맹 비자금으로 쓰는 건 어떻습니까?”
불쑥 꺼낸 내 제안 카드에 두 사람의 말싸움이 뚝 멈췄다.
날 바라보는 눈빛에는 더 해보라는 신호가 담겨 있었다.
“혈맹을 맺으면 어차피 혈맹 유지 비용이 필요할 거 아닙니까? 광산 지분으로 따로 빼놨다가 혈맹에 필요한 작업에 쓰면 될듯싶은데…….”
“괜찮군.”
“그 정도라면… 좋아.”
내 의견에 잠시 고민하던 둘은 의외로 쉽게 내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혈맹에 쓰는 비용은 베네타와 검은 장미, 두 곳 모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일 테니, 둘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결국, 넌 한 푼도 안 내겠다는 거잖아? 너도 혈맹의 주체 아니야?”
예리한 년.
내 숨은 의도가 단박에 들켰다. 하여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달랑 혼자인 저한테 무슨 돈입니까? 그리고 저 개털인가 잘 아시면서.”
“그래서 말인데, 이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있네.”
“네? 무엇을 말입니까?”
설마 돈을 토해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긴장한 눈으로 도르네프를 바라봤는데, 다행히 돈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신,
“자네를 중심으로 길드를 만들 생각 없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길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길드요? 제가요?”
내 물음에 도르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필요한 일이네. 자네가 혈맹으로 들어오면 베네타는 몰라도 다른 지역에선 이상하게 볼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입니까?”
도르네프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나와 암고양이의 혈맹은 정확히 드워프와 엘프의 종족 연합과 다름없어. 베네타 외에 토바른 지역의 동족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지.”
도르네프가 펜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받았다.
“알다시피, 검은 장미는 아직 세상에 드러난 조직이 아니야. 나 또한 검은 장미 마스터라기보단 엘프들의 대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
“인간 대표가 되라는 말입니까?”
“맞아. 영토를 가진 성주는 아니더라도 인간을 대표하는 조직의 수장 정도는 되어야 해. 그래야 동족들도 인정할 거야.”
세력을 만들라니.
무척 어려운 과제가 내게 주어졌다.
내가 길드를 만들고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까?
“다행히 자격은 충분해.”
“제가요?”
“소문 못 들었어? 네 녀석의 이름은 베네타에서 무척 유명한 편이야. 그리고 나와 난쟁이가 네 이름값을 더 높여줄 거야. 혈맹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니까.”
“인지도를 높인다는 말입니까?”
“큰 세력의 수장이라고 믿게 하려면 그래야지. 조금만 손보면 다들 믿을 분위기거든.”
“거짓말을 하라는 겁니까?”
“거짓말은 무슨, 선 길드 후 모집이라고 생각해. 세력을 이룰 네 사람은 길드를 만든 후 천천히 채우라는 얘기야.”
“…….”
자리에 앉은 채 난 고민에 들어갔다.
제법 길게 고심하며 자리를 지켰는데, 도르네프와 펜리는 조용히 나를 기다려줬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내가 입을 열었다.
“세력을 공표하되 비밀 조직으로 가시죠.”
방금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