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12화 (112/130)

#112화 위하여

“잠깐, 소문을 퍼트린다고 쳐. 근데, 록터는 꼴통 기사잖아.”

펜리가 말한 꼴통이란 꽉 막힌 사람을 뜻했다.

카멜조차 기사 단장임에도 영입을 포기하고, 버리는 패로 사용할 만큼 록터는 정통 꼴통 기사였다.

그 우직하고 단단한 성정 때문에 그는 주변에 인망과 신임을 얻었지만, 반대로 그 덕에 일찍 죽게 됐다.

배신자의 존재.

믿음을 중요시하는 록터의 성격을 파악하고 카멜이 미리 그 곁에 배신자들을 심어뒀기 때문이다.

첫 배신에 한쪽 팔을 잃고 두 번째 배신에 독살로 명을 달리한 인물.

“그 꼴통은 분명 소문을 듣고 헛소리라 외치고 다닐 거야.”

“상관없습니다.”

“당사자의 말인데?”

“카멜의 귀에만 소문이 들어가면 됩니다. 소문으로 노리는 건 카멜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지, 록터가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현상범 신분이라 믿지도 않을 거다.

“나중에 문제가 될걸? 그 꼴통이 널 뭐로 보겠어. 설득할 자신 있어? 헌트로 영입한다며?”

“네. 설득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을 텐데.”

“의외로 쉬울 겁니다. 설득 상대가 저라면.”

펜리는 미덥지 못한 표정인데, 난 자신 있었다.

‘바라보는 적이 같다면 없던 동지애도 생기는 법이거든.’

라웁 숲에서 마주쳤던 칼도 같은 이유로 내게 큰 호감을 보였다. 크룩스 조직과 악연으로 동지애가 생긴 탓이다.

그런 면에서 록터도 조만간 나와 같은 적이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학살자 카멜.

록터에게 ‘배덕의 기사’란 신명을 각성시킨 주적 말이다.

“아, 그리고 베네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 광물 수급 말인가?”

“네. 정확히 철광석이죠?”

“맞아.”

도르네프가 큰 관심을 드러내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창가를 응시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많은 이가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마차를 구경했는데, 내 눈에 인간 상인들이 딱 들어왔다.

옹기종기 모여 마차로 접근하려는 것을 병사들에게 막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우리 아니, 나와 접촉하기 위해 안달이 난 표정인데, 손만 내밀면 냉큼 다가와 꼬리를 흔들 것 같았다.

“난 인간이 싫어. 특히 상인은 더더욱.”

펜리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홱 돌리자 난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하네?

요즘 날 아주 귀찮게 구는 녀석들.

저들을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별장에 도착한 뒤 작은 파티를 열었다.

내 원래 계획은 혈맹 의식을 마무리한 뒤 오늘 밤 은밀히 영지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르네프의 고민을 들은 뒤 계획을 잠시 미뤘다.

새로운 일정이 생겼기 때문인데 그 일정이 뭐냐면,

“굉장한 연설이었습니다! 알렉스님!”

“토바른에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하하!”

“게다가 이 빼어나신 외모까지! 베네타의 여인들이 알렉스님을 보고 밤잠을 설칠 듯 보입니다. 큰일이군요.”

접대실을 가득 채운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아부 오브 아부.

난 인간 상단주들을 별장에 초대해서 아부의 킹을 가리는 중이었다.

아부인 걸 알면서도 입가가 실룩이는 것을 보니, 역시 상인들의 세 치 혀는 무서웠다.

내 신분은 몰락 귀족이지만 내 등 뒤엔 혈맹으로 맺어진 베네타가 있었다. 저들이 내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는 이유였다.

넬라에게 부탁해서 굵직굵직한 상단만 초대해 달라고 했는데, 그 머릿수만 열에 이르렀다.

토바른 내에 방귀 좀 뀐다는 상단주들이 대부분 모인 셈인데, 이번 베네타의 광산이 주는 파급력이 상인들에게 상상 이상으로 굉장했던 모양이었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는데, 이왕에 플렉스(Flex)한 기분을 맛보려고 선물 보따리를 풀었더니 하나 같이 팬케이크뿐이었다.

“……이게 뭡니까?”

“팬케이크를 무척 좋아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종류별 최고급으로 전부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시발, 너 같으면 마음에 들겠냐?

정보 길드에 쫙 퍼진 확실한 정보라는데, 어떤 쌍놈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었다.

정색하며 식탁을 엎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이를 꽉 깨물고 웃었다.

내 목적은 이런 떡고물조차 안되는 팬케이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대신 늑인 할아범과 시종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는데, 상인들이 나 몰래 주는 팁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내 정보를 묻는 값이겠지만, 별 걱정하지 않았다.

도르네프가 고르고 고른 사람들인데 괜한 말이 나올까 싶었다.

“자, 한잔들 하십시오.”

내가 술잔을 들어 올리자, 상단주들이 미소를 띠며 잔을 들어 올렸다.

내 말 한마디에 빠릿빠릿 잔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니 옛 직장 생각이 났다.

회식 때 회장님이 뜨면 딱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

시발, 오늘 나도 해보자.

“위하여.”

“위하여!!!”

나도, 상단주들도 뭘 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분위기나 띄울 겸 술자리를 즐겼다.

언제 본론으로 들어갈지에 대한 일종의 눈치 싸움이었다.

“오! 이건 뭡니까? 처음 보는 음식이군요.”

“맛이 다채롭습니다. 식감도 좋고요.”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군요.”

상단주들은 시종들이 가져온 샌드위치를 발견하곤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빛냈다.

하여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니까.

조만간 토바른 전역에 샌드위치 바람이 불 것 같았다.

써브웨이 하나 차리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것 같은데 말이지. 레시피를 팔아볼까 했지만, 내용물이 단순한데다 카피가 쉬워서 입맛만 다시곤 넘어갔다.

“저, 알렉스님.”

“아, 이름이?”

“그레노스라고 불러주십시오.”

“네. 그레노스님 물어보고 싶은 게 뭡니까?”

“먼저 이름을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알렉스님.”

그레노스.

우아한 이름과 달리, 턱살이 두둑한 뚱뚱보 녀석이었다. 첫 만남부터 내 곁에 착 붙어서 아부를 시작했는데 그 실력이 우리 회사 아부로 탑티어를 찍은 팀장 새끼를 능가할 만큼 놀라웠다. 아니, 이 녀석이 오늘의 아부킹이다.

다만, 다른 이들이 이 뚱뚱보의 눈치를 보는 걸 봐선, 상인으로 끗발 좀 날리는 녀석 같았다.

역시나 뚱뚱보가 입을 열려고 하자,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살짝 긴장감이 도는 흐름.

분위기를 보니 이 뚱뚱보가 총대를 멘 것 같았다.

이제야 본론으로 넘어가나.

상인 녀석들은 왜 이리 탐색전이 긴지 모르겠다. 귀족들은 더 하다는데 큰일이었다. 주먹이 먼저 날아갈까 봐.

“초대를 거부하시다가 생각을 바꾸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제가 생각을 바꿨다고요?”

“그게… 초대장을 여러 차례 보냈는데 답장이 없으셔서.”

“아, 답장.”

러브레터도 아니고 쉰내 나는 사내새끼들이 보낸 초대장에 답장을 왜 줘?

물론, 생각과 달리 내 표정엔 예의가 가득 담겼다.

“의도치 않게 오해를 불러왔군요. 폐광산에서 돌아온 후 밖과 단절한 채 지냈습니다. 운신을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죠.”

“다, 다치셨습니까?”

표정을 보니, 내가 아니라 뚱뚱보가 더 다친 것 같았다.

무서운 새끼.

“저주를 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지라….”

“이런!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환청이 가끔 들리는데 심한 편은 아닙니다. 저주의 후유증이죠.”

[날 말하는 건가?]

꼰대 새끼야 그 얘기가 아니잖아. 진지하게 듣지 말라고.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같은 ‘인간’끼리 너무 소원한 것 아닌가 싶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부 오해였군요. 알렉스님이 그럴 리 없지요.”

영혼까지 팔아 동족에게 사기 치는 건 인간밖에 없을 텐데 ‘인간’을 운운하다니 진짜 뻔뻔한 새끼였다.

“답장이 없었다면 섭섭해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리 늦게라도 자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역시 영웅다운 면모이십니다. 저 그레노스, 가는 곳마다 알렉스님에 대한 찬양을 입에 담고 살겠습니다.”

역시 이 새끼는 아부킹이 맞았다. 무슨 조기 아부 교육이라도 받았나?

살짝 아쉽지만, 이제 이 달콤했던 아부 타임도 슬슬 끝낼 때가 온 것 같았다.

“찬양은 무슨, 저도 대가를 받고 움직였을 뿐입니다.”

“…대가? 대가라면?”

“광산 지분입니다. 성주께서 감사하게도 제게 지분을 주셨지요.”

순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뚝 가라앉았다.

지분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네타의 광산에 죽을 때까지 빨대를 꽂을 수 있는 권리. 그게 바로 지분이다.

상인들은 머리를 팽팽 돌렸다.

눈앞의 이 어린놈.

어떻게 구슬릴 수 있을까.

그건 뚱뚱이 그레노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지분의 뜻을 아십니까?”

“전 상업 쪽은 문외한이라.”

“영웅에게 광산 지분 같은 건 귀찮은 번뇌 같은 거지요. 혹시 그 귀찮음을 누군가에게 팔 의향도 있으신지…….”

“명예 지분인지라 팔 수 없습니다. 그저 광산에 나오는 광물 일부를 양도받는 수준이지요.”

내 말에 곳곳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척 아쉬운 표정인데, 어떤 꿍꿍인지 안 봐도 훤히 보였다.

지분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싶었겠지.

상인들의 열기가 확 식는 것이 느껴졌다.

광물이야 블라이어 영지에서도 수급이 가능했다. 굳이 베네타가 아니더라도 대체 가능한 사업.

양도권을 받아도 큰 이득은 되겠지만, 기대한 것만큼의 대박은 아니었다.

차라리 드워프의 연결고리로 저 어린 녀석을 써먹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했다. 상인들이 그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마나석입니다.”

“……네?”

“아, 양도 받은 광석 말입니다. 미미한 양이지만 해마다 지분 만큼 양도 받을 권리를 얻었죠.”

“…마나!, 쿨럭! 쿨럭!”

“마나석!”

“진짜 마나석입니까!?”

갑자기 상인들의 반응이 격렬해졌다.

마나석은 매우 희귀한 광석이기 때문이다.

샤르바딘을 통해 베네타의 광산에는 다양한 광물과 함께 마나석이 채굴된다고 들었다.

대장장이 정원에 채워진 다수의 아티팩트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마나석 때문이었다.

물론, 소량만 나왔는데 그 작은 양만 해도 인간들에겐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마탑 연합.

마나석은 마법사들과 거래를 틀 수 있는 재원이었다.

상인들에겐 마탑과 연줄을 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제, 제게 파십시오!”

“그 무슨 무례인가……!”

“아, 알렉스님! 제 얘기를 일단 들어보십시오!”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파티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끝이 없을 테니, 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저들을 모은 이유는 하나다.

대규모의 철광석 수급.

“보름 후까지 영주성으로 가장 많은 계약금을 들고 오신 분에게 1년 치 마나석에 관한 양도권을 드리겠습니다.”

“……1년 치라면? 그 양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겁니까?”

“저 상자 안을 채울 정도는 되겠군요.”

내가 팬케이크 포장 상자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상인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이다. 하지만 마법사 앞에 가져가도 교섭 우위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이건 절대 놓쳐선 안 될 대박 거래였다.

“다만, 계약금은 철광석으로 받을 겁니다.”

“…철광석? 굳이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부피가 상당할 텐데, 무게도 많이 나갈 테고.”

“드워프 종족과 거래에 진심인 상인분을 찾으려면 광물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분께 기회를 드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성으로 가장 많은 철광석을 가져오신 한 분께 도르네프님이 직접 마나석 양도권을 드릴 겁니다.”

마나석에 이어 드워프 성주와 안면을 틀 기회.

이 정도 미끼를 안 물면 상인 때려치워야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상단주들.

순식간에 계산이 끝났고 확신이 서자, 그때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며 몸을 배배 꼬았다.

당장 자리를 파하고 나가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지금부터 눈앞의 모든 이들이 경쟁자다. 철광석을 독점하려면 이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내가 못 나가게 눈치를 주자, 서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나가면 섭섭하지.

난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회사에서도 이랬어.

시발, 집에 가고 싶은데 안 보내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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