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전투 AI가 있거든요
“사, 살려주십시오!”
핏빛 마법진에 묶인 용병들은 주술사를 발견하고는 살려달라 빌었다.
주술사는 말없이 품에서 주먹 크기의 수정을 꺼내더니 용병들 앞으로 내밀었다.
번쩍―!
“……!”
수정에서 터진 빛을 본 순간 용병들의 눈이 뒤집히더니 시체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수정을 갈무리한 주술사는 익숙한 듯 로브의 존재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제물들을 정리해.”
“…….”
존재는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며 기절한 용병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다른 존재까지 합쳐서 로브의 존재는 모두 셋.
주술사 한 명당 하나의 존재를 조종하는 듯 보였다.
“사, 살려…….”
주먹을 맞고 기절했던 용병 하나가 흐릿한 의식을 붙잡고 손을 뻗었다.
로브 자락을 잡아당겼는데, 벗겨진 로브 사이로 인간인 줄 알았던 존재가 핏빛 눈동자로 용병을 내려다봤다.
전신을 두른 새하얀 천.
온몸 여기저기 새겨진 붉은 인주 자국.
주술 인형 반다이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퍼억―!
용병의 얼굴을 함몰시킨 반다이크는 용병의 발목 한쪽을 움켜잡고 한 곳으로 질질 끌고 갔다.
주술 인형들이 제물들을 쌓아 올리는 장면.
“쳇.”
기사는 그런 반다이크들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저 잡스러운 것들이 최근에 머릿수를 늘리면서 주술사들이 친위대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하는 짓도 음침하고 잔인해서 눈도 마주치기 싫은 족속들인데, 최근에는 주술사들의 호위 임무까지 맡게 됐다.
짜증이 났지만, 방패를 보며 기사는 불만을 가라앉혔다.
‘뭐, 덕분에 좋은 장비를 얻었으니까.’
아티팩트라 불리는 마법 무구.
리옹 단장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가 아니었다면 이리 군말 없이 호위를 맡진 않았을 것이다.
친위대에게 골고루 아티팩트가 분배될 정도로 개수가 많았는데, 주술사들의 공으로 가능했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정리는 빠르게 이뤄졌다.
용병들을 한곳에 쌓아놓고 주술사들이 그 주변에 주술 도구를 설치하자, 기사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저렇게 해두면 뒤에 수거조가 찾아와 용병들을 거둬 갈 것이다.
저 주술사들은 사냥조였다.
마석이 귀해지면서 라웁 숲으로 마석을 구하려는 용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는데, 주술사들의 둥지에서는 등급 높은 제물을 얻기 위해 용병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마석 수거는 덤이었다.
기사는 혹시 모를 위협에서 주술사들을 지키는 호위였다.
주술사들이 신호를 보내자, 기사는 그들 곁에 섰다.
다음 제물을 찾기 위해 움직이려는 것인데, 발을 뗀 순간 기사는 멈칫했다.
눈가를 가늘게 뜨곤 숲 한곳을 바라봤다.
저 멀리 붉은 빛이 번뜩이고 있다.
“왜 그러지?”
“저 너머에 뭔가가 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기다려봐라.”
의문이 든 것도 잠시, 핏빛이 푸르게 변하더니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빠르다. 그리고 날카롭다.
화살?
두 눈을 부릅뜬 기사가 방패를 올리며 외쳤다.
“기습이다!”
“……!”
주술사들은 전투 자세를 잡았고, 기사는 앞을 보호하며 자세를 낮췄다.
순간, 찌릿찌릿한 감각이 소용돌이쳤다.
지쳐오는 살기.
대기의 거친 기운이 이곳으로 빨려오며 쏟아지고 있었다.
뭐지?
코앞까지 짓쳐온 화살의 크기가 유독 크다고 느껴졌다. 아니, 화살이 아니다.
투창?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자, 기사는 다급히 방패의 능력을 발동했다. 투명한 보호막이 방패를 감싸고 아티팩트의 가호가 일행들을 보호한 순간,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기사를 휩쓸었다.
“끄아아아악!”
방패를 움켜쥔 손과 함께 방패가 휘리릭 허공으로 날아갔다.
공성 무기인 바리스타를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기사는 허공을 뱅그르르 돌았다.
바닥 위를 구르고 굴러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을 때, 기사는 자신의 한쪽 팔이 뜯겨 나갔음을 느꼈다.
“끄…쿨럭!”
정예 기사인 만큼 그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전 방패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한쪽 팔이 아니라 전신이 찢겨서 사라졌을 것이다.
일어나야 한다!
기사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고 했다.
투웅―
“…!”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파열음.
설마, 그 끔찍한 화살이 또 날아온다고?
그 무서움을 피부로 느낀 기사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을 때,
“위다!”
하늘에서 검은 무언가가 떨어졌다.
네 발의 화살.
그런데 전과 달리 크기도 작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술사들이 하늘을 가리키자, 반다이크들이 허공에 몸을 띄운 채 화살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에에에에에엑―!
그에에엑!
처음 들어보는 주술 인형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화살을 몸으로 받아낸 순간, 주술 인형들의 몸이 황금빛으로 번지더니 펑―! 터져나갔다.
기사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떠졌다.
“마, 말도 안 돼!”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겉으로 잡스러운 존재라 표현했지만, 기사는 반다이크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무기로도 죽일 수 없었던 불사의 인형들이 거짓말처럼 소멸했다.
그것도 동시에 셋이 전부!
“화, 황금빛! 놈이다!”
“…마법진, 마법진을 발동시켜!”
놈?
주술사들을 뭔가 아는 눈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사냥하는 포지션에서 언제나 여유로웠던 주술사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해 보였다.
잿가루가 허공에 내려앉고, 그 뿌연 공간을 뚫고 누군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기사는 현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누군가를 올려다봤다.
눈앞이 검게 물든다.
콰직―!
“…….”
기사의 머리를 짓밟아 터트린 존재.
고고히 빛을 발하는 순백의 활을 해체하고,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반다이크들과 기사를 제거한 순간 게임은 끝났다.
완벽한 기습 성공.
난 잿가루 사이를 뚫고 주술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내가 막을 테니, 너희들을 이 사실을 알려!”
주술사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붉은 마법진이 내 몸을 휘감았는데, 마비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주술 트랩이다.
용병들이야 당황하며 허우적거렸지만, 난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흑주술사는 내게 쥐약이라는 사실이었다.
번쩍―
“크아아아악!”
고대 문양을 터트린 순간 날 막아서던 주술사가 휘청이며 쓰러졌다.
피를 게워냈는데, 주술의 반발력이 주술사의 온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녀석의 뒤통수를 검 자루로 찍고, 난 도망치는 주술사들을 쫓았다.
단검을 투척해 한 녀석을 넘어트린 후, 그대로 턱을 향해 싸커킥을 날렸다.
레토에게 주술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물어봤는데,
[혀를 뽑아라.]
“그러면 듣고 싶은 걸 못 듣지 않습니까?”
[턱을 부수고, 두 팔을 뽑아라.]
뭐만 하면 일단 뽑으라는 레토의 살벌한 조언을 살짝 수정해서 두 팔을 부러트리는 선에서 주술사를 무력화했다.
손을 털고 뒤를 돌아보니 남은 한 녀석이 숲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주술사가 사라진 숲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넬라가 그 방향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그림자가 기절한 주술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모르고 보면 공포 호러물인데, 알고 보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림자 정령, 반리.
‘펜리년처럼 까탈스럽지 않아서 다행이네.’
전투 전에 혹시나 하고 정령에게 부탁했는데, 의외로 그림자 정령은 내게 우호적이었다.
넬라의 마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확실한 전력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펜리년이 이 사실을 알면 분명 정령 사용료를 지불 하라고 할 텐데 무시하기로 했다.
넬라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잘 싸웠죠?”
“제가요?”
“이렇게 쉽게 제압할지 몰랐거든요.”
주술사 셋, 그리고 기사 하나.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마치 짜인 연기처럼 완벽하게 제압에 성공했다.
“알려준 데로 싸웠죠. 전투 AI가 있거든요.”
“네? AI?”
[내 이름은 레토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난 내 머릿속의 정보를 레토에게 집어넣고 움직임을 수정했다.
반다이크, 흑주술사.
모두 한 번 이상 전투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변수였는데, 설마 흡혈의 활 최대 출력을 버텨낼 줄은 몰랐다.
기사가 제 실력을 발휘했다면 힘든 싸움이 됐을 것이다.
[아티팩트의 힘이 느껴졌다.]
아티팩트라….
조각난 방패 쪽으로 가보니, 뜯긴 팔과 함께 뒹굴고 있다.
기습 공격으로 무력화시킨 것이라 기사의 실력을 볼 기회가 없었지만, 아티팩트가 남아돌 리 없을 테니 정예 기사였을 것이다.
“제 신명 정보를 팔아서 기사들에게 투자한 모양이네요.”
“얼마나 무장됐는지 파악할 필요성은 있어 보여요. 그리고 주술사들은 알렉스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빛을 보자, 싸우기보단 후퇴를 선택했다.
연구실 숲에서 만난 반다이크의 기억이 정보로 풀린 모양인데 카멜이 그 정보를 봤을지 모르겠다.
“물어보죠.”
난 제압한 주술사들을 한곳에 던져 놓은 뒤 손목 발목을 풀었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블라이어의 귀를 담당하는 정보 조직도 겸하고 있다.
반다이크를 다룰 정도라면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쓸만한 정보 몇 개는 알고 있을 것이다.
물어볼 게 많으니, 입부터 바로 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앞서 걸으며 나직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토.”
[하찮은 주술사 따위의 입을 열게 할 고문법은 158가지가 있다. 그중 네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건 20가지다.]
“…뭘 그렇게 많이 알고 있습니까?”
[죽음과 가까운 행위니까.]
“…….”
이 미친 변태 새끼를 봤나.
설마 죽으려고 고문법을 자신한테 다 적용해본 것은 아니겠지?
[네가 하는 그 생각 아마 맞을 것이다. 난 고대 시절부터 행해온 모든 고문법을 꿰고 있다.]
시발.
기록에 없어서 그렇지. 불사자 레토니칼스란 존재, 알고 보니 고대 시절 엄청난 악당이 아니었을까?
지금 난 이 녀석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닐까?
“…가장 빠르고 쉬운 거요.”
[성력 주입을 추천한다.]
그건 일단 눈앞의 궁금증부터 해결하고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끄아아악! 제, 제발!”
“다, 다 말해겠습니다!”
고문은 성공 리에 끝났다.
성력을 몸속에 주입하자 흑주술의 반발력으로 주술사들은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게다가 내 성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보니 주술사들의 영력이 녹아내렸는데 힘을 잃는다는 공포가 주술사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술술 물어보면 술술 분다.
거짓말?
내겐 심장박동으로 진실 유무를 파악할 수 있는 판타지판 거짓말 탐지기가 있었다.
너무 쉽게 가니 넬라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신녀가 그래도 되나?
“더 짜면 다른 정보도 나올 것 같은데….”
“…….”
이곳 엘프들을 확실히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순한 맛은 없고, 매운맛투성이란 말이지.
우드득―
더는 뱉어낼 게 없자 고통 없이 보내줬다. 내 위치가 카멜에게 알려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사람 목을 돌리는 내 모습에 순간적인 괴리감을 느꼈는데 잠깐이었다.
확실히 이곳 세상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았다.
“얻는 정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이따 한꺼번에 하죠.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요.”
주술사들이 알려준 정보에는 사냥조라 불리는 이들이 세 팀이나 더 있다고 했다.
전력도 똑같았다.
주술사 셋, 기사 하나.
시계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사냥감을 찾아다녔는데, 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그들을 사냥할 계획이었다.
전부 사냥하고 정보를 취합한다.
뒤치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엔 사냥개 부대도, 렌구아도,
‘학살자도 없었으니까.’
대략적으로 위치 파악이 다 끝났다는 의미였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