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1화 (121/130)

#121화 각성 신호탄(6)

릴리는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블라이어 영토 안에서 심각한 사건이 터진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마치, 불난 집을 구경하는 재미랄까.

흑주술사 무리를 학살하고 도주한 범인을 찾고 있는데, 블라이어 성주가 그 정체를 언급한 이후로 통신구에서 알렉스 마르샤란 이름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렉스? 알렉스가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물론, 누구의 이름을 듣던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블라이어 성주의 이름은 알았다.

카멜.

몇 달 전 숲에서 처음 마주했던 노예 사냥꾼들이 지나가듯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그 뒤로는,

“응? 없네?”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블라이어 성주를 입에 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붉은 망토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려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주술사를 품에 안으려면 제물은 필수다.

공포를 통한 지배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혹여 제물로 끌려갈까 봐 그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저 악질들조차도 목소리에 긴장감이 맴도는 것을 보니 아주아주 무서운 인간일 것 같았다.

우지끈-!

주술사 무리가 빽빽한 나무숲을 뚫고 너른 들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매섭게 달리니 거센 빗방울이 온몸을 따갑게 때렸다.

인상을 구기며 로브를 꽉 조이고 있는데, 젖은 인형으로 펄떡대던 케로스가 불만을 표했다.

“꾸릉… 꾸륵!”

“참아. 걸리면 이 날씨에 한바탕 굴러야 한다고. 알았니… 아얏!”

쓰다듬으려고 했더니 손가락을 꽉 깨문다.

볼때기를 쭉쭉 잡아당겨 케로스를 진압(?)한 후, 손에 쥐어진 통신 보조 수정구에 관심을 보였다.

빗속에서도 통신구에선 주술사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말하는 지역을 들어보니 블라이어 영토 이곳저곳에 주술사들이 배치된 것 같았다.

각 지역의 정보를 빠르게 공유하며 주어진 정답으로 나아갔는데, 그 집단 지성을 지켜보며 릴리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범위한 통신 범위가 이를 가능케 한 것 같았다.

‘통신망을 어떻게 구축한 거지?’

오르도르 숲에도 이를 구축하면 편할 것 같았다.

밥을 먹을 때나 간식이 필요할 때, 통신구로 부탁하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모든 능력을 자신의 편안함과 직결시키는 그녀가 잡생각을 하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통곡의 언덕에서 수상한 흔적 발견. 지시에 없던 주술사들이 다녀갔다. 머릿수는 두 명이고 떠난 흔적은 남쪽. 빠르게 추적하겠다.]

잠시 후,

[남쪽 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간 흔적 발견했다. 흔적은 계속 남쪽으로 이어져 있다. 코룬 강과 마주한 방향이다.]

코룬 강을 언급한 순간,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블라이어 성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신을 듣는 모든 이는 임무를 중단하고 코룬 강에 대기 중인 사냥개 부대와 합류하라. 긴급이다. 서둘러라.]

“충!”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이동하던 주술사 무리의 방향이 남쪽으로 변경됐다.

“모두 반다이크 위로 올라타라.”

끝 모를 평지가 펼쳐지자 주술사들은 반다이크를 이동 수단으로 이용했다.

열 개체의 반다이크 양어깨 위로 주술사들이 올라탔고, 릴리는 가장 뒤편에 있는 반다이크의 어깨에 홀로 걸터앉았다.

쿵. 쿵. 쿵. 쿵.

진동이 상당했다.

철갑으로 무장된 주술 인형들이지만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말보단 느리지만, 일반 마차보다는 빠른 것 같았다.

게다가,

콰앙! 쾅! 쾅!!

바위든, 나무든, 막아서는 방해물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며 나아갔다.

그녀의 눈에는 무식한 멧돼지들처럼 보였다.

이동이 고착화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앞을 살피던 릴리는 고민을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일단 무리의 뒤를 잡았다. 이대로 기척을 죽이고 사라지면 한동안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떠날까? 아니면 따라갈까?’

조금 전까진 블라이어 영지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선택지가 생겼다.

‘화끈한 싸움이 될 것 같은데.’

릴리는 먹는 것만큼 싸움 구경도 좋아했다.

특히 승패를 정하는 것을 즐겼다.

만월의 눈을 지닌 이후 생긴 버릇 같은 것인데, 상대가 흑주술사 무리라 더욱 관심이 갔다.

게다가 통신을 들어보니 엄청 많은 인원이 알렉스란 인간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것 같았다.

그는 강할까?

강하다면 얼마나 강할까?

또한, 부딪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두 손을 모은 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릴리의 모습에 케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망상이 시작된 모양. 한동안 선택이 미뤄질 것 같았다.

그때,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잠시 대기.]

블라이어 성주의 목소리에 주술사들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무슨 정보이기에 모든 이의 움직임을 멈춘 것일까.

들어보니 무슨 편지를 받았다고 한 것 같은데 정확히 잘 모르겠다.

퍼붓는 소나기 한가운데에 주술사들은 침묵한 채 대기했다.

잠시 후, 성주의 지시가 떨어졌다.

[지시를 변경한다. 사냥개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코룬 강을 수색하라. 수색 대상은 록터 펠리스. 알렉스의 수색은 전면 중단한다.]

주술사 부대는 다시 움직였다.

지시는 변경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주술사들은 지시에 대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야.”

“소문?”

“헌트의 행동 대장 록터 팰리스.”

“아, 헌트. 그럼 알렉스가 헌트 일원인 록터를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 록터 수색을 명하셨겠지. 알렉스가 록터와 합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거야.”

릴리는 깜짝 놀랐다.

흑주술사들의 머리가 이렇게 좋았나? 대화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록터 펠리스를 중얼거리던 그녀는 손뼉을 치곤 바로 결정을 내렸다.

‘100만 골드! 가자!’

록터 펠리스는 그녀도 알고 있는 유명한 이름이었다. 아니, 이름보단 100만 골드 현상금에 더 꽂혔다고 해야 하나?

어딜 가든 록터의 이야기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100만 골드는 마을 수십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100골드 현상범까지 엮인 사건이다. 이 구경을 놓치면 억울해서 고기도 못 먹을 것 같았다.

기회를 봐서 100만 골드도 챙길 수 있는 기회.

가만히 있으면 저들이 100만 골드 앞으로 자신을 데려다줄 것이다.

“그런데 코룬 강은 블라이어 남쪽 지역을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인데, 그 광범위한 지역에서 언제 록터를 찾지?”

“받은 것이 있으니 구르라면 굴러야지. 당분간 비에 홀딱 젖은 채 고생하겠어.”

“오래 안 걸릴 거야. 다수가 동원된 것 같으니까.”

주술사들의 대화에 쉽지 않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그녀는 찌릿한 느낌과 함께 등골에 소름이 돋아나는 감각을 느꼈다.

두 눈에 불꽃이 튀는 듯한 현상.

그녀는 다급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거.”

먹구름 사이로 푸른 스파크가 번쩍이며 튄다.

릴리는 주술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중요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반응들이 없다.

저들 사이에서 저 현상을 보는 이는 없는 건가?

마법사들처럼 추악한 탐욕을 마음에 담고 있으니, 세계의 눈도 저들을 외면한 모양이었다.

신을 받드는 자 중에 뛰어난 일부는 지금쯤 저 현상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댕댕아, 새로운 신명의 주인이 곧 탄생하려나 봐. 이번엔 어느 지역일까? 댕댕아, 댕댕아? 자니?”

신명 각성의 전조 현상.

‘하늘의 부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록터!”

칼의 다급한 외침에 록터는 등을 천천히 돌렸다.

그를 향해 매섭게 쇄도하는 암살자들이 보였다. 다양한 무기를 움켜쥔 채 록터를 향해 휘둘렀다.

록터는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핏물로 녹슨 검날이 뽑혀 나오고, 록터는 상자를 지키려는 듯 움직이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돌처럼 단단한 자세다.

그리고 가볍게 휘둘렀다.

베기로 이뤄진 단순한 움직임.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카카카카캉-!

“……!”

쏟아지던 무기들이 허공 위로 튕겨 올라갔다. 당혹스러운 암살자들의 부릅뜬 눈동자.

하지만 그 눈동자는 잠시 후 감지 못한 채 두둥실 떠올랐다.

접근했던 암살자들의 머리가 동시에 굴러떨어졌다.

“…….”

록터는 검을 착검하곤 상자를 부드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다시 강 쪽으로 등을 돌렸다.

칼은 헛웃음을 흘리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척후조 따위의 암살자들에게 당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암살자를 제거하는 모습을 보니 같은 암살자로서 섬뜩할 정도다.

칼은 고개를 돌려 엘튼을 바라봤다.

엘튼은 라웁 숲의 경험을 통해 현재 4성에 오른 상태다. 게다가 불꽃을 사용하는 특성 암살자였다. 그런 그가 신음을 흘리고 있다.

“어때?”

“…절대 못 죽입니다.”

“5성이라서?”

“아뇨. 4성이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치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틈?”

“검을 휘둘러도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본기가… 미쳤습니다.”

엘튼의 입에서 기본기가 ‘미쳤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소문대로 꼴통 기사가 맞는 모양이었다.

‘몇 번을 봐도 믿기 힘들단 말이지.’

칼은 고개를 흔들며 빗줄기 중심에 우뚝 선 록터의 거대한 등을 바라봤다.

저 등을 만들기 위해 저 기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기초 체력 5년.

기초 검술 10년.

베기를 위한 기초 훈련만 합이 15년.

모두가 그런 록터를 비웃었을 때 그는 단 하나의 검술로 5성을 각성한 ‘무(無)특성’ 실력자였다.

그리고, 그런 무특성을 두고 특성 개화자들이 대놓고 비웃음을 날렸을 때, 록터는 검을 들었다.

‘무특성 개화자들의 희망.’

록터는 5성 특성 개화자와 여러 차례 부딪쳐 모두 승리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무특성 각성자였다.

꼴통 기사.

사람들이 록터를 보며 말하는 꼴통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자면 무식한 노력을 뜻했다.

피우지 못한 재능을 노력으로 채운 미련함.

록터는 무식할 정도로 ‘노력에 미친 자’였다.

“마스터, 모두 처리했습니다.”

보고가 들리자 칼은 시선을 돌렸다.

매복해 있던 수하들이 도착해 있었다.

코룬 강에 접근하자, 척후조에 발각당한 것인데 다행히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록터를 노린 암살자들은 퇴로가 막혀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이들이었다.

신호탄을 가장 우려를 했는데 날씨가 도왔다.

“머릿수는?”

“서른이 조금 넘습니다.”

“빌어먹을 많이도 보냈네. 사냥개 새끼들이 냄새를 맡겠어.”

“가짜 흔적을 만들어놓을까요?”

“아니. 지금은 굳이 만들 필요 없겠어.”

칼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

흔적은 순식간에 지워질 것이다.

날씨가 우리를 돕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록터다.

똥고집도 저런 똥고집이 없었다.

“저 꼴통 녀석이 당최 말을 안 들어 처먹어서 우리만 개고생 중이잖아.”

“가족 일이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까. 도와준 거라고.”

본보기로 세워놓은 시체들을 훔쳐 록터에게 건넸다.

그때 처음으로 우직한 기사의 눈물을 봤다.

칼 일행은 가만히 록터를 지켜봤다.

나무 상자에서 새하얀 뼛가루를 강물로 흘려보내는 그가 보인다.

이 시간만큼은 방해해선 안 된다.

록터는 지금 죽은 가족들을 가슴 속에서 보내는 중이었으니까.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코룬 강 하류로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장소.

그가 서 있는 장소는 기사가 되기 전의 록터 펠리스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처음 자리 잡았던 고향이었다.

“…….”

아내와 딸을 태운 잿가루를 강 아래 흘려보냈다.

이곳에서 만나 결혼했고, 딸을 낳았다. 전(前)대 블라이어 가주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이고 20년 동안 블라이어를 위해 살았다.

남은 건 전대 가주의 혈육이 본보기로 내건 썩은 시체뿐이었다.

아내와 딸을 보내고, 친우들을 보냈다.

보통 무덤을 만들지만, 록터는 사랑하는 이들이 이 혼탁한 세상에 남길 바라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태어나 행복하게 살거라.”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도 따라가고 싶지만, 그에겐 뒷일이 남았다.

모두를 강물에 떠나보내고, 록터는 품에서 깃발을 꺼냈다.

깃발을 보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기사 단장이 됐을 때, 전대 가주가 수여한 블라이어의 명예 깃발이다.

록터는 깃발을 펼쳤다.

비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나직이 블라이어의 충성 구절을 읊조렸다.

“일평생을 지켰던 가문이여, 동고동락했던 내 사랑스러운 영지여. 그 찬란했던 나의 고향, 블라이어여.”

록터는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젠 감정이 메말라서 그에겐 단 하나의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 죽인다.”

록터는 덤덤한 시선으로 펄럭이는 깃발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카멜 블레이저의 대항마인 배덕의 기사.

먹구름이 푸른 스파크를 띠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신을 받드는 자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

누군가는 신명을 느끼고, 누군가는 보고, 누군가는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하늘의 부름, 신명이 터졌다.

모두가 아는 각성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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