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크룩스
통신구에서 비웃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벌레. 폐기(廢棄)되고 싶지 않으면 잘해. 지켜볼 거야.]
“…….”
[말이 없네? 벌레 새끼라 인간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밟아야 꿈틀댈래?]
“…아, 알겠습니다.”
[비가 멈출 때까지야. 그 전에 사냥감이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알지? 네 꼬봉처럼 녹지 않으려면 열심히 뛰라고. 그러라고 살려준 거잖아.]
“네.”
[이제 중요한 볼일이 있으니까. 연락하지 마.]
수정구가 뚝 끊기며 빛을 잃자, 중년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짧은 머리, 40년의 풍파를 겪은 노회한 인상의 사내.
얼마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암살 조직을 운영했던 마스터 신분이었지만, 이젠 일개 암살자로 목숨을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크룩스 마스터.
중년인, 크룩스는 자신의 옛 신분을 떠올리곤 울분을 조용히 삼켰다. 쌍욕이라도 처박고 싶지만, 쌍둥이 형제에게 매수당한 놈들이 지켜보고 있을 수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수정구를 주술사에게 건넸다.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당장…….”
“닥치고 애들이나 불러. 다 들었으니까.”
무시가 잔뜩 들어간 어조.
주술사에게 암살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쓰다 버릴 패 아니면 제물.
주술사가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크룩스 뒤로 거대한 존재가 우뚝 섰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
기척도 없이 다가온 주술 인형과 마주한 크룩스는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을 이 꼴로 추락시킨 괴물 병기. 저 괴물들의 손에 수십 년 일궈온 조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뭘 봐? 내 말 안 들려? 애들 불러오라고.”
“아, 알겠습니다.”
당장에라도 복수심에 분노가 차올라야 하는데, 머릿속엔 공포심만 자리했다.
간부들이 주술 인형의 제조과정 안에서 찢겨 사라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 지옥을 보고도 복수?
그런 건 상대가 인간이었을 때나 하는 것이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절대 넘봐선 알 될 악마 같은 자들.
그는 복수를 포기했고, 공포에 굴복한 이에게 남은 건 생존에 대한 미련뿐이었다.
그는 더는 크룩스 마스터가 아니었다.
“전부 모였습니다.”
주술 인형 어깨에 올라탄 주술사는 집결한 암살자들을 훑어봤다.
머릿수는 대략 백(百) 정도로 제법 많았다.
주술사들에게 몰락한 암살자들로 구성된 사냥개 부대인데, 주술 인형의 제물로 적합하지 않아 폐기를 모면한 생존자들이었다.
“낙인을 보여라.”
주술사의 지시에 암살자들은 왼쪽 손등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그건 크룩스도 마찬가지.
“둥지의 낙인은 죽어야 없어지는 천형이다.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를 위해 죽어라.”
둥지에 끌려온 모든 이에게 새겨지는 둥지의 낙인. 한 번 찍히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저주이기도 했다.
“임무를 시작한다.”
주술사는 크룩스를 한 번 바라본 뒤 주술 인형을 돌렸다.
자신은 안내자 역할만 할 뿐, 실질적인 임무는 저 암살자 놈의 몫이었다. 통신구에 집중하며 대기하길 잠시,
[표적의 위치를 전달하겠다.]
주술 인형이 숲길을 헤치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주술사가 이끄는 데로 크룩스는 암살자들을 데리고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크룩스는 자신에게 내려온 임무를 떠올렸다.
임무는 간단했다.
표적인 록터가 모습을 보이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목숨을 노리는 사냥이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묶기 위한 시간 끌기 작전.
최상부에서 내려온 임무인데, 쌍둥이 형제는 비가 멈추기 전까진 움직일 생각이 없다며 자신을 앞서 보냈다.
‘날 보내놓고 놈들은 어젯밤 납치해온 여인들을 유린하고 있겠지.’
안 봐도 뭔 짓을 할지 뻔했다.
임무 중에도 이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귀족의 여식이든, 기사의 여식이든, 심지어 여기사까지 물불을 안 가리고 납치해왔다.
그들의 뒷배로 블라이어 성주가 서 있지 않았다면 암살자들의 칼끝은 록터가 아니라 두 형제에게 향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두 형제의 중독적인 여성 편력은 악명이 높았고, 두 형제의 주인인 성주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블라이어 성주는 묵인으로 두 형제를 비호했다.
뛰어난 실력을 우대했기 때문이다.
‘두 형제가…… 무섭기는 하지.’
잭과 하우엘 형제가 나타나기 전까지 임시로 이곳을 맡던 이는 크룩스였다. 두 형제가 나타나면서 모든 지휘권을 박탈당했는데, 쌍둥이 형제의 실력이 보잘것없어 보였기에 부마스터를 움직여봤다.
그때 동생인 하우엘의 실력을 처음 보게 됐다.
‘핏물이 되어 사라졌지.’
자신과 엇비슷한 역량을 지닌 부마스터의 허무한 죽음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무서운 점은 지금도 하우엘의 정확한 능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부마스터는 4성이라는 것이고, 부마스터를 가볍게 죽인 하우엘보다 형인 잭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숲을 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낮이지만 먹구름이 끼어 날씨가 무척 흐렸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두 형제의 말처럼 비가 곧 그칠 것 같았다.
잠시만 잡아두면 된다.
잠시만.
“시체다.”
앞서 달리던 주술 인형이 멈춰 섰다. 주술사가 풀밭에 뒹구는 시체를 가리키자, 크룩스는 신호를 내렸다.
암살자들이 시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눈앞의 주술사는 표적의 대략적인 위치만 전달받을 뿐, 정확한 위치는 주변의 흔적을 쫓아 움직여야 했다.
주술사는 구경할 뿐이고, 암살자들은 크룩스의 지휘 아래 흔적을 추적했다.
크룩스에게 지휘권이 있는 건, 그의 특성과 관련 있었다.
특수 벌레 생성.
자폭 벌레 붐(Boom).
암살자들의 심장엔 폭탄 벌레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크룩스의 짓이 아닌 록터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두 형제가 벌인 짓이었다.
붐(Boom)은 원격으로 폭발할 수 없다고 알려졌지만, 크룩스의 경우엔 달랐다.
그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그 범위 안에 붐이 있다면 신호를 통해 벌레를 터뜨릴 수 있었다.
원거리에 해당하는 전투 거리였지만 실력자에겐 코앞으로 치부되는 위험천만한 반경이라, 그동안 배신자를 처단할 용도로만 썼던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젠 살아남기 위해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능력으로 쓸모를 증명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에.
“시체 열다섯 구, 전부 노예 사냥꾼 같습니다.”
“돈독 오른 놈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군. 상흔은?”
“한 명에게 모두 당했습니다.”
“록터다. 흔적을 쫓아.”
암살자들은 록터가 남긴 흔적을 쫓아 움직였고, 주술사가 그 뒤를 따랐다.
숲길을 가로지를 때마다 널브러진 시체가 보였다. 일격에 당한 노예 사냥꾼들이 수두룩했다.
“멍청한 놈들, 상대가 록터 펠리스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무려 블라이어의 전(前)대 기사 단장이었던 인물이다.
지금 블라이어에서도 그를 이길 기사가 과연 존재할까?
현상금 100만 골드에 눈이 뒤집힌 결과였다. 알면서도 경쟁자들 때문에 서두르다 당한 것이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꼬리?”
자신들을 움직임을 발견하고 뒤쫓는 이들이 감지됐다.
거리를 둔 채 적게는 열 명, 많게는 수십 명이 뭉쳐서 따라왔는데, 무장을 보니 노예 사냥꾼들로 보였다.
그 수가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졌다.
“어떡할까요?”
“무시해.”
현재 코룬 강 주변엔 토바른 내에서 활동하는 노예 사냥꾼이 모두 몰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머릿수가 늘면 그에게 유리한 일이니 따라오도록 놔두는 게 나았다.
잠시 후, 흔적을 쫓아 빛이 미약한 컴컴한 숲길로 들어섰을 때 암살자들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흔적이 끊겼습니다.”
“뭐?”
크룩스가 직접 나와 살폈다.
록터의 흔적이 숲길 한가운데에서 푹 꺼진 것처럼 끊겼다.
위쪽을 살피니 하늘 전체를 가린 무성한 나무숲이었다. 설마 나무를 타고 이동한 건가?
암살자들을 풀어 나무 위를 샅샅이 살폈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흔적을 놓쳤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방법이 있었다.
크룩스는 주술사를 바라봤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쓸모없는 새끼들.”
주술사는 짧게 혀를 차곤 수정구에 집중했다. 표적의 위치는 일정한 텀을 두고 전달됐다.
잠시 후,
[표적의 위치를 전달한다.]
“……응?”
위치를 주술로 해석한 주술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향이 안 보인다.
정보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수정구에선 록터의 위치를 두고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동쪽이다. 표적이 위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지도를 보니 나무숲 쪽을 통과할 것 같다. 우린 건너편에서 대기하겠다.]
자신이 실수한 것일까.
다시 한번 주술을 써봤지만, 방향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의문을 표하며 일단 숲을 거닐었다.
방향이 나올 때까지 움직이려는 생각이었는데,
팍―!
“……!”
땅이 아래로 푹 꺼지더니 반다이크 발아래서 검은 인영이 솟구쳤다.
흙더미가 흩날리고, 그 사이로 매서운 눈빛을 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술사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익숙한 실루엣과 얼굴이다.
“로, 록……터!”
스각!
반다이크가 사타구니부터 반으로 잘리더니, 번뜩이는 칼날은 주술사마저 반으로 찢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 아래서 록터는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우우웅―
검날을 타고 흐르는 푸른 마나의 향연.
5성의 상징, 오라 소드였다.
앞서 걷는 그때,
덥썩―
“…….”
발목을 움켜쥔 거대한 손아귀가 보였다.
반으로 잘린 반다이크가 록터를 붙잡고 늘어졌다. 주술사가 있었다면 위협적인 인형이지만, 주인이 죽은 이상 그저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다.
손아귀를 베어낸 록터는 앞으로 매섭게 질주했다. 그리고 눈앞에 걸리는 모든 존재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로, 록터다!”
“막아…!”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예 사냥꾼 열 명이 삽시간에 검에 쓸려나갔고, 흔적을 쫓던 암살자들의 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섯 중 셋을 순식간에 베어내고, 남은 둘을 처리하려고 할 때였다.
주춤 물러나던 암살자들이 돌연 딱딱하게 굳더니 비명을 지르며 기운을 터뜨렸다.
기운.
섬뜩한 신호를 감지한 록터는 다급히 검과 검집을 교차했다.
콰아아아앙―!
“……!”
폭발이 터졌다.
록터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튕겨 나왔다.
예상보다 충격이 컸다.
팔뚝과 어깨, 허벅지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뼛조각이 스치고 간 상처였다.
자폭이라니, 다급히 거리를 벌리는 크룩스를 보며 록터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삐이이이이익―!
록터 펠리스.
표적을 찾았다.
크룩스는 호각부터 불었다.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사냥꾼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다.
“멍청한 주술사 새끼!”
앞에서 견제해줘야 할 반다이크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력화돼버렸다.
노린 것일까.
노린 거라면 제대로 약점을 찔렸다.
암살자들을 앞쪽에 배치해 안전망을 둔 크룩스는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소수는 록터를 에워싸고, 다수는 거리를 벌린 채 석궁을 꺼내 들었다.
대치는 눈꺼풀 몇 번 끔벅일 정도로 짧았다.
“온다!”
“이익―!”
빠르다.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크룩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자신 주변에 벽으로 세웠던 일부 암살자들.
그중 일부는 정확히 10미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록터가 오는 방향에 서 있던 암살자의 몸이 터졌다.
붐(Boom)이 터진 순간, 크룩스가 신호를 보내자 암살자들이 석궁을 미친 듯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볼트는 핏빛이 흐르고 있었다. 주술사의 저주가 담긴 것으로 스치기만 해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매서운 반격에 록터가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났다.
자잘한 상처가 순식간에 늘었다.
중앙에 있는 놈을 잡아야 하는데, 잡으려면 자폭 부대와 석궁 세례를 뚫고 가야 했다.
홀로는 힘들다.
물러나는 게 맞지만, 록터는 물러나지 않고 앞에서 계속 대치하며 시선을 끌었다.
콰콰쾅! 쾅!
암살자들의 자폭이 몇 차례 더 이어졌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록터 펠리스! 100만 골드다!”
“자, 잡아!!!!!!”
“으아아아아아!”
무장한 노예 사냥꾼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사냥꾼 무리를 보며 록터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