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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5화 (125/130)

#125화 영웅 조력자

‘왜 도망가지 않지?’

크룩스는 록터의 대응에 의구심이 들었다.

호각 소리에 노예 사냥꾼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 명이 몰려들 정도로 코룬 강 주변엔 사냥꾼이 많았다.

이 순간에도 나무숲 사이사이에서 계속 모습을 드러내며 포위망을 두텁게 만들고 있는데, 록터는 숲 안쪽으로 물러날 뿐 대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깥 상황을 모르는 건가?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저쪽일 텐데.

‘지금 상황에선 노리는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언제라도 포위망을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지켜보면 알겠지.”

주어진 임무는 표적을 사냥하는 것이 아닌 잡아두는 것이었다.

크룩스는 암살자들을 물리곤 일부만 일정 범위 내에 세워두었다.

10미터.

혹시 모를 록터의 기습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역시나 암살자들의 눈빛에는 짙은 원망이 깃들었다.

그 원망에 답하듯 크룩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원망스럽나? 이건 그저 순서의 차이일 뿐이야. 먼저 가느냐 늦게 가느냐. 죽기 위해 온 것 아닌가?”

둥지의 낙인을 보자, 암살자들은 허탈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봤다.

저자의 말처럼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죽음보다 두려운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난 너희와 달라.’

물론, 크룩스는 희생할 생각도 죽을 생각도 없었다. 이번 기회를 살려 가치를 증명하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잭과 하우엘 형제를 우대하는 블라이어 성주를 봤기 때문이다.

충분히 자신 있었고, 그 기반을 다지려면 록터란 희생양이 필요했다.

크룩스는 눈앞의 대치를 지켜봤다.

대치가 오래 유지되길 바랐는데, 사냥꾼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느새 백을 넘어 이백에 다다른 사냥꾼의 숫자.

사냥꾼들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며 록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록터가 강해도 그는 인간이었다.

오랜 도주 생활로 지쳐 보이는 물골에 상처도 꽤나 심각해 보였다.

100만 골드.

록터에게 걸린 엄청낸 금액에 사냥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섣불리 덤비지 않았다.

록터는 늑대가 아니다.

사자다.

사전에 합의가 된 듯, 사냥꾼들은 눈치를 살피며 협공을 준비했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사냥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보들은 아니군.”

100만 골드에 미쳐서 왔다지만, 표적에 대해 알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어중이떠중이도 있겠지만 사냥 가능성을 점치고 온 사냥꾼 무리도 제법 많았다.

그 이유는 록터가 ‘무특성’이라는 데 있었다.

“놈은 무특성이다. 검술만 조심해.”

“몰골을 봐, 많이 지쳤어. 몰아치면 놈도 더는 버티지 못할 거야.”

“마법 스크롤을 꺼내. 움직임을 봉쇄한다.”

광역기도, 필살기도 없었다.

게다가 록터는 실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순수 육체파, 오직 검술 하나만 익힌 기사였다.

크룩스도 그 약점에 동의했기에 줄곧 록터의 접근만 조심하며 대응했다.

‘사냥꾼들이 록터를 잡을 수 있을까?’

머릿수는 많지만, 쉽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상대는 순수 검술뿐인 무특성 5성이지만, 꼴통 기사로 불리는 자였다.

독하고 집요한 인간이란 뜻이었다.

“스크롤을 찢어!”

“으아아아아!”

“둔해졌다! 죽여!”

사냥꾼이 더 몰려오자 일부 사냥꾼이 참지 못하고 록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00만 골드를 나누기로 한 이상, 모인 수가 많아지면 떨어지는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스크롤에서 마법이 터지고, 검과 검들이 부딪친다.

카카캉―! 캉!

“뒤를 노려!”

쾅!

쇳소리와 불꽃이 튀는 전장으로 사냥꾼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주 마법으로 움직임을 묶고, 포위한 채 사방에서 무기를 휘둘렀다. 빈틈을 노려 사이사이로 투척 무기와 화살을 날리는 것까지.

인간을 사냥해온 자들답게 사냥이 무척이나 체계적이었다.

저주 마법에 움찔하던 록터가 보인다. 그것도 잠시,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가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

붉은빛을 띠던 저주가 먼지처럼 흩어지고, 쏟아지는 무기 사이로 록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큭!”

“미친…!”

검, 도끼, 해머가 튀어 오르고, 투척 단검과 화살이 튕겨 나왔다.

그 뒤로 튀어 오르는 수많은 핏방울.

록터 앞을 막아선 사냥꾼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후―

거친 호흡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낮은 자세로 내달리는 록터는 한 손에는 검, 다른 손에는 검집을 잡고 있었다.

공격이 쏟아지면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렀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

완벽한 양손잡이를 구축하기 위해 그가 들인 피땀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검과 검집이 교차하며 완벽한 방어가 펼쳐지고, 그 뒤로 검이 번뜩이면 우수수 사냥꾼들이 쓰러졌다.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쉴 새 없이 공격이 퍼부어졌고, 록터의 상처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괴물 같은 새끼…….”

크룩스는 질린 표정으로 록터의 전투를 지켜봤다.

상처가 늘면서 온몸이 피로 물들었지만, 치명상은 없고, 지친 듯 보이지만 움직임에는 틈이 없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은 거대한 벽을 만난 것 같았다.

죽일 수가 없다.

상부에서 왜 사냥하지 말고 발목만 붙잡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완벽한 공방을 갖춘 기사.

놈을 잡으려면 물리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압도적인 주술과 마법이 필요했다.

“쏘, 쏴! 쏘라고!”

“막아!… 빌어…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포위망이 뚫렸다.

핏물을 둘러쓴 록터가 앞으로 돌진해왔다.

목표는…… 자신이었다.

“…빌어먹을!”

크룩스는 붐(Boom)을 준비했다.

록터가 다가오길 기다렸는데, 갑자기 그가 달리는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사냥꾼들.

록터와 눈빛을 마주친 순간, 크룩스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접근하지 마!”

다급히 외쳤지만, 록터가 사냥꾼들과 함께 크룩스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것이 더 빨랐다.

고작 10미터.

벌써부터 록터의 섬뜩한 검날이 피부로 느껴졌다. 누구를 생각하며 판단할 거리가 아니었다.

크룩스는 주변에 있는 붐(Boom)을 모조리 터뜨리며 뒤로 몸을 굴렀다.

콰콰콰쾅!!!!

“끄아아아아악!”

붐들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사냥꾼들도 폭발에 휩쓸렸다.

푹 꺼진 바닥 사이로 사냥꾼들이 피를 토한 채 죽어 있었다.

잠시 소강상태.

크룩스는 뒤따라온 암살자들의 머릿수를 세어보곤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반수 이상이 죽었다.

더 잃었다간 임무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사냥꾼 무리가 뭉친 곳으로 이동했다.

삐익! 삑―!!!!

자리를 잡고 호각을 두세 차례 더 불었다.

사냥꾼들을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에 반발을 보일 사냥꾼들이 있을 법한데, 그들의 정신은 온통 구덩이 한곳에 쏠려 있었다.

분노를 표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얼굴에 환의가 깃든다.

“놈이다! 어서!”

“다 잡았어!”

폭발로 생긴 구덩이 속에서 록터가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검도 부러지고, 검집만 움켜쥔 채였다.

피를 토하는 모습까지.

딱 봐도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었다.

사냥꾼들 역시 열광하며 그를 잡기 위해 앞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빠르게 스쳐 가는 사냥꾼들을 크룩스는 바라보기만 했다.

저들로는 못 잡는다.

하지만 추가로 사냥꾼 무리가 더 온다면 그들을 미끼로 록터의 발목을 더 오래 붙잡을 순 있을 것 같았다.

크룩스가 신호를 보내자, 암살자들도 석궁을 들고 록터에게 향했다.

상황이 유리해 보이니, 견제만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암살자 부대가 앞서 사라지고, 사냥꾼 무리가 크룩스를 빠르게 스쳐 지나갈 때였다.

가장 방심할 그 순간,

푹―

“……컥!”

기습이 이뤄졌다.

크룩스의 척추를 부수며 단검이 박혔다. 동시에 등 뒤로 지독한 열기가 온몸을 태우듯 감각을 망가트렸다.

지독한 고통.

다급히 몸을 틀자, 또 다른 단검이 그의 목울대를 베었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

붐을 떠올렸다.

주변에 암살자를 남겨놨기에 손가락을 튕기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단검이 더 빨랐다.

스각―

“크, 크룩!”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지독한 고통도 잠시,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크룩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손가락을 벤 인물.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너, 너……크럭!”

“인사드리겠습니다. 칼 바스타인입니다.”

인사와 함께 스쳐 가던 사냥꾼 일부가 몸을 틀더니 크룩스에게 안기듯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푹. 푹. 푹. 푹. 푹. 푹.

“……!”

가슴, 배, 허벅지, 어깨, 그리고 옆구리까지. 단검들이 온몸을 헤집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독을 섞었는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고통도 없었다.

그래서 온몸의 피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붐(Boom)이라… 여전하군요. 수하들을 희생시켜 목숨을 부지하는 것 말입니다.”

“…살려.”

“그게 당신의 유언입니까?”

칼은 단검을 들어 올렸다.

복수를 앞에 둔 상태에서도 그의 눈빛은 덤덤했다.

뭐랄까.

허무했다.

이젠 복수보단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움직였던 인물이 떠올랐다.

록터 펠리스.

칼은 단검을 쳐들며 록터에게 외쳤다.

“도망쳐!”

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록터가 몸을 빼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사냥꾼들이 쫓으려고 했고, 앞서 있던 암살자들은 칼의 존재를 눈치채고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금!

“붐과 함께 사라지십시오.”

칼은 크룩스의 이마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단검을 박고 강하게 비튼 순간 크룩스의 목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칼 등 뒤로 엄청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쾅!!!!!!

“무……!”

“끄아아악!”

폭발과 비명.

붐을 지닌 암살자들이 모조리 터져나가며 숲 주변이 초토화됐다.

사냥꾼 절반 이상이 폭발에 휩쓸려 명을 다했다. 칼은 크룩스의 이마에서 단검을 뽑고는 바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록터 아니…… 주군을 구해라.”

엘튼을 제외한 수하들이 록터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망가진 숲에 칼과 엘튼이 섰다.

칼은 말없이 크룩스의 시체를 바라봤다.

“설마 여기서 이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복수 따윈 잊고 다른 뜻을 품고 살라는 뜻이겠지.”

무너진 크룩스 마스터는 너무나도 하찮았다. 고작 이런 사내를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자신마저 같이 하찮게 보일 정도였다.

그냥 복수를 이루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룩스 앞에서 등을 돌린 칼은 줄곧 담아왔던 복수의 감정을 내려놨다.

감정이 사라지니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

“……?”

칼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한쪽 팔을 잃고 오랜 세월 동안 4성에 오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런데, 온몸에 기운이 넘치며 새로운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추,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닫힌 마음이 줄곧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4성에 올랐다.

칼과 엘튼은 록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록터 펠리스.

복수를 돕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내던진 어리석은 인간.

“설마 했는데, 진짜로 버틸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잠재력을 지녔다는 뜻이겠지.”

“정말 그를 주인으로 모실 생각입니까?”

“이미 약속한 일이다. 지금부터 록터를 주인으로 모신다.”

“그렇군요.”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해.”

“불만 없습니다.”

원래 암살자보다 기사가 더 어울린다고 칼에게 놀림을 받았던 엘튼이었다.

록터를 주인으로 모신다.

음지가 아닌 양지로 올라가는 새로운 운명이 펼쳐졌다.

엘튼은 기분이 좋은 듯 자신의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록터 펠리스를 도와 블라이어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 전에 주군의 목숨이 붙어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자. 어서!”

칼과 엘튼은 록터가 사라진 숲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폭발로 엉망진창이 된 나무숲.

부러진 나무들로 가려졌던 하늘이 드러나자,

쿠쿠쿵!

그들은 보지 못한 하늘의 부름이 터져 나왔다.

[칼 바스타인 – 영웅 조력자(감각)]

푸른 불꽃 아래 새로운 신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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