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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6화 (126/130)

#126화 복수는 이뤘나

칼은 빠르게 록터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숲 곳곳을 물들인 붉은 핏자국.

그것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중 록터의 흔적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상처가 위중한 듯 보였다.

문제는 그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칼은 신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비가 멈췄어.”

“사냥꾼들도 록터님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남은 사냥꾼들이 아직 추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

붐(Boom)을 삼켰던 암살자들이 크룩스의 죽음과 함께 폭발하면서 사냥꾼들이 반절 이상 죽어 나갔다.

그 충격에 주춤할 만도 한데, 살아남은 사냥꾼들은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도주 중인 록터를 뒤쫓고 있었다.

“100만 골드의 힘이 대단하긴 하네요.”

“당연하지. 나도 록터와 엮이지 않았으면 현상금 사냥을 생각해봤을 거라고.”

“어쩌실 겁니까?”

“폭발 때문에 더 몰려올 거야. 서둘러야 해.”

엘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이 울릴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으니, 흔적을 쫓아서 더 많은 이가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이거.”

“뭡니까?”

“시선을 분산시켜야지. 고생 좀 해라.”

칼이 엘튼에게 건넨 건 호각이었다.

크룩스가 이 호각으로 사냥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시선을 돌리기엔 충분할 것이다.

호각을 받아든 엘튼은 고개를 끄덕이곤 반대쪽 숲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삐이이이이이이―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엘튼이 새로 몰려들 사냥꾼들의 시선을 끄는 사이, 칼은 서둘러 록터의 흔적을 쫓았다.

속도에 박차를 가했는데, 몸이 가볍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붙은 가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4성이 되고 나서 느끼는 강한 고양감.

‘다행이야.’

그리고 짙은 안도감이 올라왔다.

지옥 같았던 실험체 감옥의 경험이 일행들을 빠른 각성으로 이끌었다.

반년 사이에 엘튼은 4성, 일행들은 3성에 올랐는데, 자신만 수년째 제자리인 상황이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한쪽 팔의 부재를 성장의 방해 요인으로 꼽았었는데, 육체의 미흡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마음을 다잡자, 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포기했던 기술도 다시 익힐 수 있겠어.’

칼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기존 단검보다 작고 가벼운, 비수에 가까웠다.

팔을 잃는 순간 그는 성장에 한계를 깨닫고 기술 개발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근접 전투는 불리했기에 원거리 기술을 선택했다.

팔 하나로 쓸 수 있는 기술.

칼이 선택한 건 단검 투척이었다.

일시적으로 팔에 기운을 담아 던지는 투척 기술을 전문적으로 익혔는데, 4성에 오르면서 부족했던 힘을 채울 수 있게 됐다.

허리춤에 차곡차곡 쌓인 단검들을 확인하며 기술을 하나하나 떠올리는데, 한 방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터다!”

“뭐, 뭐야? 저것들은?! 어서 정리해”

“밀어붙여! 우리가 훨씬 많다고!”

사냥꾼들의 외침이었다.

느껴지는 감각에 이상 신호가 없자, 그는 주저 없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우거진 숲을 뚫고 나온 순간, 에워싸듯 뭉쳐 있는 사냥꾼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릿수는 오십을 조금 넘는 정도.

자신이 보낸 일행 중 셋이 사냥꾼들의 공세를 막으면서 록터를 보호하고 있었다.

칼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투척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궤적대로 움직이는 비도술.

“…커억!”

“무, 뭐야!? 어디서…끄룩!”

한 호흡에 다섯 자루를 던졌고, 다섯 명이 차례로 목을 잡고 쓰러졌다.

날카롭고 빠르고 은밀했다.

또 다른 단검을 뽑으며 칼은 크게 외쳤다.

“헌트(Hunt)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기습.

그리고 ‘지원군’이란 외침에 사냥꾼들의 진형에 혼란이 생겼다.

그 혼란을 틈타 록터를 보호하던 일행도 사냥꾼들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모두 3성급의 실력자들.

사냥꾼 일부가 힘을 합쳐 그들을 저지했지만, 곧 뒤쪽에서 날아오는 단검에 목숨을 잃었다.

진형은 삽시간이 무너졌고, 사냥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행이 그 뒤를 쫓으려고 하자 칼이 만류했다.

“쫓지 말고 다른 이들을 호출해. 최대한 빨리!”

현재 칼 일행은 총 열 명이었다.

셋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동료들을 호출하러 간 사이, 칼은 록터에게 다가갔다.

나무 기둥에 기댄 채 버티고 있는 그가 보인다. 예상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오랜 도주로 지친 상태에서 자살 부대나 다름없는 사냥개 부대와 사냥꾼 수백을 홀로 감당했다. 아무리 5성이라도 물량 공세엔 답이 없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는데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대단할 정도였다.

“…왔나?”

“입 열 시간 있으면 이리 누워.”

“치료는 서서 받겠다.”

록터가 다가와 등을 보이자 칼은 신음을 흘렸다.

등에 볼트가 여럿 박혀 있었다.

볼트를 잡아뺀 순간 음습한 기운에 볼트를 놓았다. 평범한 볼트가 아닌 것 같았다. 포션을 써도 출혈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썩을…… 주술사들의 저주야.”

“어쩐지 피가 멈추질 않더군.”

“어지러울 텐데, 괜찮나?”

“괜찮다.”

등 쪽 상처 외에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붐(Boom)에 당한 상처부터 사냥꾼들에게 당한 상처까지.

치명상은 없지만, 상처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고통이 엄청났을 텐데, 움직이는 록터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혹시 고통을 못 느끼나?”

“그저 익숙할 뿐이다.”

독한 성격인 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느끼니 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은 지닌 포션을 모조리 쏟아부으며 록터의 치료에 전념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짧은 침묵.

그 침묵을 깬 건 록터였다.

“복수는… 이뤘나?”

“덕분에.”

“어떤 기분이지?”

“글쎄…….”

칼은 굳이 자신의 허무했던 감정을 록터에게 말하지 않았다.

복수를 직접 해보기 전까진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야. 다만, 존재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존재했던 것들? 여유?”

“최근에 하늘을 본 적 있나? 그런 것과 비슷해. 곁에 항상 존재했지만 잊고 사는 것들. 그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록터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흩어진 하늘은 이제 푸르렀다.

포션 효과 때문인지 록터의 표정은 전보다 가벼워 보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복수를 이룬다면 알게 될지도.”

“그런가? 그럼 이젠 그대 차례다.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룬 강 하류부터 시작된 힘겨운 도주 생활.

흔적을 아무리 지우고 조작해도 일행의 위치가 계속 발각당했고, 수상함을 감지한 칼은 사냥꾼으로 위장한 채 주변 조사에 들어갔다.

그때 록터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파악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칼 일행은 그때부터 작전을 바꿔 록터와 따로 움직이며 그의 도주를 간접적으로 보조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호각 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 소리 끝에서 복수의 대상인 크룩스를 발견하게 됐다.

[시선을 끌어주지. 복수를 이룬다면 날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라.]

록터가 칼에게 제안했던 약속이었다. 미련하게도 그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다.

“복수를 도와준 이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일행들도 모두 동의한 내용이야. 널 주인으로…….”

“아니. 필요 없다.”

록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말했을 텐데. 주인이나 충성 같은 건 필요 없어. 충성에 묶여 피눈물을 흘리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거든.”

“…….”

“조력이면 충분하다.”

록터의 단단한 눈빛에 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꼴통 같은 고집을 누가 꺾을까 싶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록터는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 중 쓸만한 무기들을 찾기 시작했다.

오라 소드를 사용하면 평범한 검은 오래 버티질 못했다.

그 반복되는 행동에 칼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그 좋은 검을 왜 부러뜨린 거야?”

“복수하려는 가문의 검을 쓸 수 없지 않나?”

“그 덕에 지금처럼 개고생하고 있잖아.”

“상관없다. 그리고 헌트란 이름을 왜 사용한 거지? 난 헌트와 전혀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지원군 소식을 들으면 적들의 움직임이 신중해지거든. 도주에 유리하다. 소문이든 뭐든 지금 상황에선 이용할 건 다 이용해야 해.”

“그것도 싫다.”

“록터.”

“……?”

“주인이 되는 걸 거부해줘서 정말 고맙다. 안 그랬으면 내가 답답해서 먼저 죽었을 거야.”

“무슨 뜻이지?”

“그냥 닥치고 따라오라는 소리야.”

실질적인 이득보다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내.

아마, 가장 빨리 죽는 타입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록터 같은 스타일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큰 영향력을 끼칠 인물이 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칼은 그것에 배팅하는 것이었다.

‘그 녀석은 다르겠지.’

자신을 블라이어로 움직이게 한 인물.

아서 클레이튼.

능글능글한 녀석인데, 그 녀석은 록터와 달리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서 뭔가 크게 될 녀석 같았다. 무조건 잡아야 하는 녀석인데, 소식이 궁금했다.

약속한 대로 방문하는 장소마다 특정 표식을 남겨두고 있으니 언제고 연락이 닿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 가서 뒈질 녀석으로는 안 보였으니까.

“바로 움직일 수 있지?”

“언제든지.”

“따라와.”

칼은 우거진 숲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엘튼이 호각으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그것도 곧 한계다.

서서히 가슴을 옥죄는 감각.

4성에 오르고 나서, 위기 감별사의 감각이 더욱 또렷해졌다.

좀 더 세분화된 느낌이랄까.

압박감이 더 심해지기 전에 일행과 약속해둔 장소로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니 록터가 잘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전보다 훨씬 둔해진 느낌이었다.

피로도가 한계치 이상으로 쌓였다는 뜻인데, 고민이었다.

포위망도, 위협적인 감각도 여전했으니까.

큰 바위 쪽에 도착하니, 일행이 모여 있었다.

아직 엘튼이 오지 않았는데, 곧 도착할 것이란 소식을 받았다.

그 사이, 칼은 고민에 들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지?’

감각에 따라, 생존 본능에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다.

하지만 이젠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록터의 위치가 계속 노출되는 상황이라면, 블라이어 영토 안에서 버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저들이 섣불리 들어올 수 없는 장소로 가야 했다.

‘베테나 혹은 에토르.’

블라이어를 견제할 세력은 토바른 내에 이 두 곳뿐이다.

다만, 아직 선택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딜 가든 자신들보단 블라이어에 호의를 베풀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문의 헌트를 듣고 베네타를 염두에 두었다.

[록터 펠리스, 헌트의 행동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검이다.]

하지만, 록터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며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베네타를 불신하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에토르로 가자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칼의 감각으로 가장 꺼려지는 장소였다.

결국 록터를 도와줄 조력자가 있을 만한 곳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응? 잠깐.”

불현듯 록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그자와 연락이 되나? 아니면 머무는 장소라던가.”

“그자? 누구를 말하는 거지?”

“광산에서 널 죽이려고 했던 배신자를 알려준 존재 말이야.”

“전(前)대 성주가 키운 손가락 중 하나로 알고 있다.”

“손가락?”

“블라이어의 그림자로 불리던 이들이다. 카멜에게 모조리 숙청당했지.”

“그 녀석은 살아있잖아?”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모르는 인물이었거든.”

기사 에펠로아.

록터의 최측근으로 심어둔 카멜의 세작인데, 모른 상태로 배신을 당했다면 크게 당할 뻔했다. 그래서 록터도 그 손가락의 존재에 대해선 우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을 들었다며?”

“들었다.”

“이름이 뭐지?”

“…….”

“뭘 고민하는 거야?”

“은인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게….”

“시끄러! 지금 그딴 거 생각할 때야!?”

“내겐 중요한 일이다.”

“도움을 줄 세력이 필요해. 손가락이라며? 내가 아는 이름일 수도 있으니 어서 불어. 움직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모를 거다. 나도 처음 듣는….”

“저기 엘튼 안 보여? 얼른 말해!”

수풀을 헤치고 엘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투성이였는데, 시선을 잡아끄느라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신음을 흘리며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에 칼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록터를 노려보자,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보니, 더는 고집을 부리기 어려웠다.

“아서 클레이튼.”

“……뭐?”

“아서 클레이튼. 내게 배신자 에펠로아의 이름을 알려준 손가락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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