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개 같은 악당 새끼(3)
‘눈빛 한번 뜨겁네.’
뒤통수가 아주 따갑다.
등 뒤에서 록터가 노려보는 게 분명했다.
‘아, 괜히 록터 앞에서 통신구를 사용했나?’
호감을 얻기 위해 시원하게 카멜을 씹어대는 모습을 보여줬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싫어하는 인간을 같이 씹다 보면 금방 친해지는 거.
회사원 시절, 변태 팀장을 몰래 씹으면서 동료들과 금세 친해진 경험이 있어서 시도해 본 건데 융통성 제로인 록터에겐 먹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헌트(Hunt)의 알렉스라고?”
오히려 뒤통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는데 심장이 쫄깃했다.
어차피 들킬 정보라 타이밍을 재고 밝힌 건데, 역시나 헌트에 대해 바로 물어왔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헌트의 돌격 대장으로 만들어놨으니 당연한 건가?
“네. 지금은 알렉스란 가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소문, 그대가 낸 건가?”
“헌트의 돌격 대장에 관한 거라면 제가 낸 게 맞습니다.”
“왜지? 날 이용한 건가?”
당연하지.
그런데 여기서 솔직하게 답을 하면 어떻게 되려나. 꼴통으로 불리는 꽉 막힌 인간이니 한 번 사이가 틀어지면 돌이킬 수 없겠지?
그래서 록터 펠리스 버전으로 핑곗거리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독자라는 사실이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됐다.
입체적으로 상대를 파악할 수 있거든.
진지한 녀석은 진지하게 상대해야 한다.
“전 당신을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낸 소문입니다.”
고개를 돌린 내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했다.
“날 구하기 위해서?”
“조금 전 에토르로 향하던데 맞습니까?”
“맞다. 첫 만남에서 그대가 언급했던 장소였으니까.”
“에토르에 도착했다면 당신도 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원인을 제공했던 저는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혔겠죠. 그래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신호를 보냈습니다. 소문을 듣고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면서.”
“신호?”
“헌트. 소문을 흘린 베네타로 오라고 말입니다.”
“알렉스가 아니라 아서였다면 베네타로 향했을 거다.”
“이름을 밝히지 못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저 소문을 들으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당신이 베네타를 찾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헛소문을 바로 잡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뜻이었나?”
그런 뜻이었냐고?
당연히 아니지.
내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소문을 냈겠니?
하지만 내 눈동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후 연기 실력만 주연급으로 늘어난 것 같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한 소문으로 록터님의 심기만 불편하게 했군요.”
“아니다. 내 머리가 부족해서 그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네?”
“개 같은 악당 새끼.”
꽉 막힌 인간이라 전혀 안 통한 줄 알았더니, 록터도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냥 싫어하는 인간도 아니고 복수로 칼날을 가는 대상인데 오죽했을까.
쌍욕을 더 박을 걸 그랬나?
시선을 마주 보며 피식 웃고 있는데, 통신구에서 귀를 사로잡는 내용이 들려왔다.
카멜이 아닌 처음 듣는 목소리들이었다.
[형, 놈이 숨은 곳을 찾은 것 같아.]
[록터?]
[아니, 새로운 표적.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데 어떡할까?]
[놈을 특정했어?]
[아니, 양 떼 속에 있어서 특정이 힘든 상황이야. 그냥 다 죽일까?]
[지켜보고 있어. 주인이 주술사들과 합류한 후에 움직이라고 했으니까.]
[천천히 와도 돼.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아직 살아있거든.]
형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쌍둥이 형제 중 동생인 하우엘을 떠올렸다.
통신구로 편히 대화를 주고받는 위치라면 그들밖에 없었다.
잭과 하우엘 형제.
방금 형제가 주고받은 대화, 진짜일까?
형인 잭이 주술사들과 합류한다고 했는데, 주술사 부대를 말하는 건가? 그들은 에토르 쪽에 몰려 있을 텐데?
거짓으로 치부하기엔 칼을 대놓고 언급한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마지막 말이 너무 디테일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아직 살아있다니…….’
납치해온 여인들이 분명했다.
이딴 걸 거짓 정보로 흘린다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넬라. 더 빨리요!”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쉰 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었다.
역시 꼼수 쓰는 펜리년과 다르다.
“록터, 위험하면 칼이 신호를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각을 분다고 했다.”
“호각….”
호각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그럼 둘 중 하나다.
놈들의 대화가 나를 기만하려는 거짓이거나, 아니면 하우엘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칼이 아직 발각당한 사실을 모르는 것 말이다.
만에 하나 상황이 후자 쪽이라면 형인 잭이 도착하기 전에 칼과 합류해야 했다.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 * *
칼 일행이 록터와 떨어져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냥꾼 무리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사냥꾼 복장으로 위장했어도 소수인 열 명으로 돌아다니는 건 눈에 띄었다.
표적이 그 유명한 록터이다 보니 최소 백 단위로 사냥꾼들이 뭉쳐 다녔기 때문이다.
‘전처럼 사냥꾼 무리와 섞여 움직인다면 괜찮아지겠지.’
여럿의 사냥꾼 무리와 섞여 움직인다면 가슴을 옥죄는 이 불안한 감각도 곧 없어지리라 판단했다.
록터의 이동 경로를 잠시 떠올린 칼은 코룬 강 하류를 따라 여러 숲을 돌아다녔다.
최대한 큰 규모의 무리를 찾아다녔고, 이백 단위가 넘은 무리를 발견하자, 자연스레 스며들며 무리에 합류했다.
가장 먼저 사냥꾼들부터 살폈는데, 역시나 100만 골드란 현상금에 무작정 몰려온 어중이떠중이가 대부분이었다.
실력이 떨어질수록 규모를 키우려는 사냥꾼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 칼이 딱 원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정보가 없어서 실시간으로 합류하는 사냥꾼들의 정보를 취합해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일행에게 신호를 보내자, 엘튼과 일행이 무리 속으로 흩어져 은밀히 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헌트의 지원군이 나타난 모양이야.”
“조금 전 대규모 전투에서 블라이어가 패배해서 수백이 죽었다더군.”
“록터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정보를 흘리자 동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냥꾼들이 잠시 후 실제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냥꾼들이 합류하면서 사실을 확인했고, 그때부턴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록터를 쫓던 사냥꾼 중에 지원군 소식을 듣고 사냥을 포기한 이들이 나타났다.
수가 상당했는데, 이백 중 절반에 달하는 수가 뿔뿔이 흩어졌다.
칼 일행은 사냥을 포기하지 않고 에토르로 향하는 무리에 섞여 조용히 이동했다.
그것도 잠시, 칼이 섞인 사냥꾼 무리는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사냥꾼 무리와 합류하며 금세 세를 불렸다.
칼은 일행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고, 똑같은 작업이 은밀하게 반복됐다.
“록터 펠리스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지원군? 난 돌아갈래.”
“나도.”
무리를 이탈하는 사냥꾼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엘튼과 일행은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마스터를 따라 해오던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냥꾼들이 물어온 정보를 취합해 현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반대로 거짓 정보를 흘려 주변에 혼란을 주었다.
거짓 작업으로 사냥을 포기한 사냥꾼들만 오백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상당한 성과인데,
“…….”
“마스터?”
무슨 이유인지, 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엘튼의 의문에 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네? 이상한 거라면…….”
“사냥꾼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아. 보낸 수만큼 계속 흘러들어온다고.”
칼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동하는 내내 여러 사냥꾼 무리와 섞였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지원군의 정보를 흘려 사냥꾼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는데, 흩어진 무리에서 다시 새로운 무리와 합류하면 머릿수가 비슷해졌다.
보낸 만큼 다시 이곳으로 새로운 사냥꾼들이 합류한다는 건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왜 이쪽으로 전부 몰리는 것 같지?
게다가 이젠 사냥을 포기하는 이도 눈에 띄게 줄어서 작업이 더는 무의미했다.
‘어디서 온 놈들이지?’
새로 합류한 사냥꾼들을 살펴보니 어중이떠중이 같지 않았다.
합류하는 놈들마다 착용한 장비가 꽤나 좋았다.
표적이 에토르로 집중되면서 실력 있는 놈들까지 모조리 몰려든 건가?
‘불안감도 여전하고, 계속 뭔가가 거슬려.’
가슴을 옥죄는 압박감은 풀리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됐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며 입술을 깨물 정도로 불안감이 한계에 치닫자 칼은 다급히 일행을 호출했다.
가슴이 떨려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한곳에 머물다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움직여야 했다.
흩어졌던 일행이 하나둘 모이는 사이, 칼은 사냥꾼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됐다.
“저놈들, 그놈들 아니야?”
“맞아. 쌍둥이 형제 밑으로 들어간 녀석들.”
“웬만한 실력으론 못 들어간다더니 장비빨 죽이네.”
“두 형제가 현상금 분배를 약속하고 모은 사냥꾼들이잖아. 꽤 많이 모였다고 했는데.”
“맞아. 저기도 있는데?”
“뭐야, 다 몰려온 거야? 설마 록터가 이 근처에 있나?”
사냥꾼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칼은 위기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저들은 록터를 얘기했지만, 칼은 잭과 하우엘 형제를 떠올렸다.
형제가 영입한 사냥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건 쌍둥이 형제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왜 이곳으로?’
불현듯 느껴지는 불안감에 칼이 수신호를 보내자, 다가오던 일행이 속도를 줄였다.
칼은 일행을 살피며 그 주변을 면밀히 관찰했다.
두 형제에게 영입된 사냥꾼 무리 중 일행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괜한 불안감이었나?
“빠져나간다.”
엘튼까지 모두 모이자, 칼은 일행을 이끌고 무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사냥꾼이 현상금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건 의심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역시나, 물러나는 칼 일행을 보고 붙잡은 이는 없었다.
일부 사냥꾼들이 칼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꺼지라고 조롱할 뿐이었다.
칼 일행은 빠르게 사냥꾼 대열에서 벗어났고, 코룬 강 하류와 이어진 숲으로 파고들었다.
칼은 속도를 높였다.
무리에 섞여 움직이느라 록터와 거리가 많이 벌어졌다.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런.”
칼 일행이 사냥꾼 대열을 벗어나고 잠시 후, 주술사 한 명이 그 근처 숲으로 다급히 달려와 누군가를 찾았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빽빽이 찬 숲 너머에서 여인의 비명과 신음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으니까.
“하우엘님.”
“…….”
“급한 일입니다.”
잠시 후, 여인들의 비명이 뚝 멈췄다.
그리고 숲 사이에서 발가벗은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촘촘한 근육으로 이어진 길쭉한 팔과 다리, 얇은 허리가 눈에 띄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사내는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짜증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시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놀 때 방해받는 거 알지? 시답지 않은 일이면 이곳에서 형체도 없이 녹여버릴 거야.”
“표, 표적이 도망쳤습니다.”
주술사는 둥지에서 콧대가 제법 높았지만, 눈앞의 형제들 앞에선 빌빌 기었다.
주군의 총애도 있지만, 주술사조차 학을 뗄 정도로 강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도망쳐? 표적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고?”
“그렇습니다.”
“사냥개들은?”
“따라붙었습니다.”
“아, 그 개새끼는 좀만 더 있다가 도망칠 것이지.”
욕설을 내뱉은 하우엘은 숲으로 다시 들어갔다.
잠시 후, 숲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끔찍한 비명과 함께 그 주변 숲이 녹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주술사는 주춤 물러나며 눈앞의 광경에 마른침을 삼켰다.
하우엘을 중심으로 남은 건 녹다가 굳은 작은 뼛조각들과 진물이 흐르는 휑한 대지뿐이었다.
닿은 즉시 삽시간에 녹아버리는 맹독.
하우엘은 나뭇가지에 걸린 옷을 걸치며 주술사에게 턱짓했다.
그 신호에 주술사는 주술 인형에 올라타곤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하우엘은 조용히 따랐다.
그는 칼 바스타인을 떠올렸다.
사냥꾼들 사이에 숨어 있던 표적이 무슨 이유인지 바깥으로 나왔다.
이젠 표적을 특정할 수 있는 상황.
지시 때문에 줄곧 표적에 신경을 끄고 있었지만, 자신의 취미를 방해받았기 때문일까.
“놈의 얼굴이 궁금하네.”
문득 얼굴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야 붙잡은 뒤 얼굴을 천천히 녹이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