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왕좌의, 아니 본좌(本座)의 게임(6)
자허.
곤륜삼선의 일인이자, 황룡국을 넘어 중원삼국에서 그 명성이 자자한 전설적인 기환학사.
기환술이란 분야에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과거에는 장강의 물을 뒤엎기도 하였으며. 가뭄 중에는 비를 뿌렸다고 전해지는 그였으니, 어찌 보면 신선이란 명성도 부족하지 않을 터.
하지만 문제는.
‘그만큼 악명도 깊다는 거겠지.’
명성 못지않게 악명도 뒤지지 않는 괴인.
악인이기에 악명이 쌓인 것이 아닌, 해괴한 짓을 워낙 많이 벌여 악명을 쌓은 기가 막힌 양반.
기껏 쌓은 선업도 해괴하고도 난폭한 사건 사고 때문에 모조리 다 깎아 먹어 곤륜에게 민폐를 끼치기론 으뜸인 것이 다름 아닌 자허였다.
몇 번이고 곤륜에서 그 이름을 문적(門籍)에서 파내려고 했지만. 자운의 스승이기도 한 전대 곤륜 장문인이 보기 드문 호인인지라 끝내 그를 제적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림에서도 제법 유명한 얘기라고 한다.
“내 일평생 스승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으나….”
“…….”
“오늘만큼은 조금 원망하고 싶구려.”
“하하….”
여명은 인상이 마구 찡그려진 자운에게 무슨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은 대략 수십 년 이상 쌓인 감정일 테니까.
“으음, 이, 일단 얘기를 들어볼까요?”
애써 주제를 넘기며 여명은 청죽을 물고 있는 밤톨이를 보았다.
“아직 우린 정확히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기환학사에게 필수 아이템과 같은 법구를 왜 밤톨이가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알려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컹!”
밤톨이는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리며 그에게 청죽을 건네었다.
마치 이걸 받으면 다 알 수 있으리란 것처럼.
“…확실히 무슨 기환술이 걸린 것 같긴 하네.”
역시 자허라고 할까, 엄청난 난도(難度)가 느껴지는 기환술이 법구에 걸려 있었고. 아마 이것에는 자신이나 혹은 자운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나 보죠.”
그렇게 여명은 망설임 없이 청죽을 움켜쥐었고. 이후 청죽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기력이 여명의 팔을 올라타며 몸을 휘어 감았다.
일순 움찔거리며 여명의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동이었지만. 여명은 안심하라며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청죽의 기력에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아주 정다운 느낌이 날 정도였다.
파아앗!
점차 기력의 빛은 커져만 갔고. 여명은 일순 자신의 눈앞으로 흐릿한 인영(人影)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무어가?]
“하아….”
여명은 그 인영의 주인이 누군지 단숨에 알 수 있었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것임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영감님은 진짜 달라진 게 없네요.”
[이 나이 먹고 변하면 그건 노망이 난 게지, 흘흘!]
“…….”
말은 잘한다.
자허, 얄미운 영감님이 끌끌 웃어대며 나름 반가움을 표시했다.
* * *
여명은 신기하게 자허를 보았다.
얼굴과 몸의 윤곽만 보일 뿐. 모든 게 다 흐릿한 것이 마치 자허란 사람이 수묵화(水墨畫)가 된 것만 같다.
“이건 뭐라는 기환술이에요?”
[‘몽환(夢幻)의 술(術)’이다. 정신세계의 통로를 만들어 나와 타인의 꿈속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지, 흘흘.]
“…왠지 사생활 침범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은데.”
[사생활 침범은 무슨. 무림인이나 영수 같은 녀석들한테 먹히지도 않는데.]
“그럼 그밖에는 다 된다는 거 아니에요? 거참.”
여명은 뒤늦게 머리를 긁적이며 눈치챈 것이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북궁린과 설기, 단골들과 바람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경이적인 광경이었고. 여명은 이것이 꿈과 같은 현상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지금 잠든 건가요?”
[잠든 것은 아니다. 아마 타인이 보기엔 그저 멍한 상태일 테지. 뭐 걱정은 마라. 어차피 바깥과 이곳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니.]
“…진짜 대박이네.”
여명은 이 [몽환]이란 이름을 가진 기환술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직감했다.
애초에 자신의 꿈마저 조작할 수 있단 대목에서부터 흥미가 가득해지는데, 시간마저 느리게 간다?
이건 완전히…!
“이상적인 가상세계를 실현시킬 수도….”
[뭐, 가능은 하지. 하지만 그다지 추천은 하지 않으마.]
“왜요?”
[자칫 잘못하면 네놈의 자아가 먹힐 테니까.]
“…….”
[지금 네 수준으론 꿈도 꾸지 못할 기환술이니. 관심을 꺼도 될 게다, 흘흘!]
“참 나.”
여전히 습관적으로 사람 자존심을 뭉개는 발언을 툭툭 내뱉으니 기분이 나빴으나, 여명은 저게 저 양반 나름 그를 걱정하기에 하는 발언임을 알고 있다.
아마 정말 자신의 현 수준으론 감당하기 불가하니 저러는 것일 터.
물론.
“말만 좀 다정하게 해주면 적이 반절로 줄어들 텐데.”
[쯧, 이 정도면 다정한 것이지! 알아듣지 못하는 못난 것들이 문제인 것이고!]
“…그런 면이 문제라는 거예요.”
여명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여튼 사서 고생하는 양반이라며.
잠시 쓸데없는 잡설로 간만에 회포를 풀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여명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치신 거예요?”
[왜 내가 잘못했다는 전제로 말하는 것이냐?]
“그럼 아니라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네놈은 노인공경을 배워야 한다.]
“저만큼 노인공경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놈, 묘하게 뻔뻔스럽게 변했구나.]
수묵화 버전 자허는 1년 전과 달리 훨씬 더 뻔뻔하고 말빨이 청산유수인 여명이 신기한지 눈을 끔뻑였다.
“지난 1년간 많은 일이 있었죠.”
기환술을, 특히 축지를 배우고 난 이후부터 천산에만 묶여 있던 그의 환경은 다양하게 변해 갔다.
어찌 보면 기환술을 배웠던 그 시점이야말로 여명이 무림에서 맞이한 두 번째 전환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 성격은 영감님 덕분에 이렇게 변한 거죠.”
[흥! 책임 전가를 번지르르하게도 말하는구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디가 버릇없다는 건지 참…. 그보다 논점을 흐리지 말고 빨리 얘기나 해요. 어차피 이 기환술도 얼마 가지 않을 것 같은데.”
[호오, 그걸 알겠더냐?]
제법이라는 시선을 주는 자허에게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비록 1년일지라도 그가 기환술에 쏟아부은 시간은 농후한 것이었고. 이 정도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허접하지 않다고 자부하기에.
“이 몽환이라는 거. 술자와 피험자를 이어줄 매개체가 중요한 기환술이죠? 그러니 법구까지 저한테 맡긴 거겠죠.”
[정답이다. 다만 원래는 법구까진 필요가 없고. 간단히 기력만 축적시킨 매개체만 있으면 될 테지만. 지금 네 입장에선 아무래도….]
“수업은 나중에 해주시고. 일단 본론부터 들어가요. 어쩌다 마교에 있는 거예요?”
[…역시 버르장머리가….]
“저 가버립니다?”
[……에이이잉!!]
자허는 투덜거리며 그에게 불만을 표시했으나. 여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토록 교묘하게 대화 주제를 돌려 대화의 논점을 흩트리는 게 저 양반 주특기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쯧, 재미가 없어졌구나.]
수단이 안 먹힌다 싶으니 불만을 내뱉던 자허였으나, 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여명은 차분히 그가 할 말을 기다려주었고. 자허는….
[쩝, 별건 아니다만. 내가 광신도 종자들이랑 조금 다투는 중이다.]
“다퉈요?”
[그래, 이 좀팽이 같은 놈들이 어찌나 속이 좁던지, 원. 조금 사소한 잘못 좀 했다고 나를 붙잡고 놔주지를 않더구나.]
“…….”
…순간 여명은 무언가 쎄한 기분을 느꼈고. 자허가 ‘사소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얘기를 들으며 여명은 점차….
“야, 이 미친 인간아!”
기어이 노인공경을 내다 버리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
………
“이 사부는, 괜찮은 건가?”
“월.”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 그래?”
“네에.”
“흐음….”
단골들은 여명의 몸에 혹시나 무슨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자허의 법구를 만진 뒤로부터 급격이 눈이 몽롱해지며 멍해진 그였고.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됐지만. 이 사부의 애견이 ‘괜찮으니 건드리지 마라’라고 충고를 건네니 차마 건드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자네 사제의 법구라고 하니 불길하기 짝이 없구먼.”
“그 노망난 놈, 이번에는 무슨 짓을 저지른 겐지….”
“하아, 이 사부한테 무슨 피해가 생기면 자네뿐만 아니라 곤륜도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게야.”
“……크흠.”
자운은 미약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불편함 아닌 불편함을 티 내었다.
그들의 시선이 껄끄럽거나 거슬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자허 탓에 이 사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초조함이 몰려와서 그런 것이었다.
‘후우, 좌불안석이 따로 없구나.’
곤륜의 비전 신공인 태청무상신공 덕분에 머리는 맑기 그지없으나 속은 타들어 가는 이중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 마른침이 자꾸만 넘어간다.
그때.
“으음….”
“이 사부…!!”
드디어 이 사부의 몽롱했던 동공이 제자리를 잡으며 초점이 돌아왔고. 멍했던 그의 낯에서 다시금 선하고도 지혜로운 총기가 돌아왔다.
“…아, 깨어난 게 맞네요.”
“이 사부?”
“괘, 괜찮아요. 잠시 몸이 좀 노곤해졌을 뿐이니까.”
“??”
“하아암….”
따악!
마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하품마저 내뱉는 이 사부였으나, 기환술로 피워 낸 맑은 생기(生氣)로 몸을 휩쓰니 이 사부는 언제 하품을 내뿜었냐는 듯 개운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야 좀 살겠네요. 하여튼 자허 그 영감님은 이런 부작용이 있으면 말해줘야지.”
“…몽환의 술이구려.”
“아세요?”
“허허, 당연한 게 아니겠소.”
썩어도 사제라고. 자허의 기환술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운이었다.
그리고 자허 그 망할 사제 놈이 몽환의 술을 쓰면서까지 이 사부에게 대화를 건 것은 분명…!
“이 사부. 그 녀석이 또 무슨 해괴한 짓을 한 것인가?”
또다시 사고를 쳤음이 분명하리라.
“으음, 꼭 듣고 싶으세요?”
“…진짜 쳤구려.”
예측했다고 해도 예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대체 이놈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마, 말해주시구려.”
“후회 안 하시겠어요?”
“…….”
“어르신?”
“크흠!”
자운은 도저히 듣고도 후회 안 할 자신이 없기에 차마 확답하지 못하며 불편한 기색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려 볼 따름이었다.
여명은 저 마음이 이해가 간다며 잠시 망설임을 보이더니.
“혹시, 성화라고 아세요.”
“성화(聖火)? 혹 과거 배화교를 상징하던 그…?”
“정확히 아시네요.”
현 마교가 수라신교와 배화교가 합쳐져 탄생했다는 것 정도는 무림의 역사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고. 특히 곤륜의 장문인쯤 된다면 그 속사정이나 자세한 일화도 아는 법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 사부가 말하는 성화라는 것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인지.
“한데 성화는 이미 옛날 옛적에 꺼진 것으로 아는데, 그것을 왜 언급하는가?”
이미 먼 과거에 꺼진 불꽃을 왜 언급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
“-안 꺼진 모양이에요.”
“……?”
“정확히는 꺼졌다가 다시 불붙인 것 같은데, 어쨌든 성화가 여전히 있대요. 그런데 하필….”
툭툭.
“그 성화를 강탈했다고 하네요.”
“…….”
“누가 강탈했는지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크흑!”
자허의 법구를 툭툭 치며 미간을 긁적이는 여명의 확인 사살에 자운은 기어이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절대고수가 화병으로 앓아눕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tmi후기
-몽환을 잘만 사용하면 실사판 가상현실게임이 가능하다.
-참고로 몽환은 감각을 속이는 힘도 있기 때문에 촉감 등도 꿈속에서 느껴진다.
-다만 이를 위해선 시전자의 상상력이 좋아야 하고. 여명의 경우 판타지보다 실존하는 무협 세상을 8년 넘게 본 덕분에 무협 세상 기반에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
-훗날 여명이 몽환을 배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하체마비 혹은 전신마비 증상이 있는 아동이나 사람들에게 몽환을 써서 가상현실을 체험시켜 주는 비밀 봉사를 하는 일이었다.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무협 세계를 경험한 환자들 중에는 몸이 낫는 신비한 경험을 한 이들도 많아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