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와요 무림식당-207화 (207/261)

207-왕좌의, 아니 본좌(本座)의 게임(7)

“으으음…!”

“어르신, 좀 괜찮으세요?”

“미, 미안하구려 이 사부. 자, 잠시만 더 이렇게 있겠소이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드릴까요?”

“…당홍두(糖紅荳)를 잔뜩 얹은 빙수를 주면 고맙겠구려.”

“…….”

어째 구체적인 자운의 주문에 잠시 벙쪘지만. 여명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우유 얼음을 눈처럼 곱게 갈고. 수제 아이스크림과 단팥 등을 주문대로 잔뜩 올려주었다.

자운은 화병이 난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으나, 여명이 우유 팥빙수를 주니 그대로….

후웅.

“허공섭물 낭비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자운 녀석, 제법인데.”

허공섭물을 마치 염력처럼 사용하여 숟가락을 들어 올려 팥빙수를 퍼먹는 자운이었고.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것이 입에 들어가니 자운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들었다.

“역시 이 사부가 만든 빙수는 천하일미(天下一味)구먼. 아주 훌륭해.”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무렴. 아, 한데 생각해 보니 본도가 삯을 가지고 오지 않았구려.”

“천천히 내세요. 외상도 괜찮고.”

“아니구려. 지금 당장 급한 볼일만 마치고 바로 가지고 오면 되지, 허허.”

“볼일이요?”

“빠르게 처리하고 오겠구려.”

“…어르신, 검은 왜 챙기세요?”

“허허, 이걸 써야 할 일이 있는지라.”

“…….”

여명의 착각이 아니라면 자운의 검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검명(劍鳴)이라고 하였던가. 검이 주인의 심정을 헤아리며 짐승처럼 사납게 울부짖는 것 같았고. 왠지 이대로 보냈다간.

‘큰일 날 것 같은데.’

그제야 본 것이지만. 자운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묘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아주 냉혹하고도 서늘하게 보였지.

여명은.

“어르신들.”

“불렀느냐.”

“자운 어르신 제압하는 거 혹시 가능하세요?”

“허허, 제압이라, 혼자서는 안 될 테지만.”

스윽.

“물량 앞에서 장사 없는 법이지.”

“그래요? 다행이다.”

금천후의 자신만만한 확답이 떨어지자 여명은 검지를 척하고 들며 부탁했다.

“정신 좀 차리게 해줘요.”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은거고수들이 자운에게 달려들었다.

평소 고상한 척하는 놈을 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에.

그렇게 자운의 반항은 반 시진도 안 되어 끝났다.

* * *

성화(聖火).

과거 배화교를 밝히는 상징이자 배화교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던 불꽃을 이르는 말로, 인신공양을 통해 불꽃을 계속 유지했다는 대목에서 오싹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라 할 만했다.

다만 초대 천마에 의해 배화교가 강제로 복속되고. 그 복속 과정 중 흑원의 존재를 느끼게 되며 성화는 악신(惡神)의 불꽃 취급을 받으며 허무하게 꺼졌다고 한다.

한데….

“그런 줄 알았던 성화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니…. 천산은 배화교를 다시 부활시킬 생각이었던 것인가?”

금천후는 서늘한 시선으로 무백과 단백설을 직시했다.

마교의 2인자와 가장 오랜 세월 마교에 몸담았던 교인인 만큼 성화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을 테니까.

두 남녀는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대들은 상관없겠지.”

“어차피 밝혀지기도 했고.”

그들은 딱히 성화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긍정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수라신교의 후인인 그들일 텐데, 어찌 성화를 저토록 긍정할 수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인바.

그러한 의문에.

“그건 과거의 성화처럼 사람 잡아먹는 불꽃이 아니니까.”

“도리어 신교의 전해지는 다섯 개의 유물 중 하나이지.”

“유물?”

“그렇다. 자세한 사정은 밝힐 수 없으나. 현재 존재하는 성화는 과거의 존재했던 성화와 별개의 것이며. 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니 그것은 더 이상 배화교의 불꽃이 아닌, 흑원신교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불길이라 할 수 있겠지.”

“호오….”

금천후와 삼존 등의 고수들은 무백이 거짓을 말할 인사가 아님을 알기에 그의 얘기가 사실임을 인지했다.

“역시 마교로군. 숨겨진 것이 아주 많아.”

이제는 도리어 흥미로운 기색으로 성화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그들이었는데, 성화가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었다.

“별건 아니다. 그저 정신적으로 아픈 자의 마음을 편히 해주고. 반경 삼백 리 이상 지역에서 역병이 나돌지 못하도록 해주지.”

“…그게 별것이 아니라고?”

터무니없는 기능이 아닐 수 없다며 그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가보(無價寶)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능력.

성화가 가진 가치를 단숨에 가늠한 은거노인들은 왜 성화에 대한 정보가 마교 이외에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알려진다면 피 바람이 불겠군.”

“우리가?”

“아니, 너희를 노리는 이들이.”

상대는 분명 중원삼국 최대의 무림세력인 마교였으나.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존재다.

혹시나 싶은 마음이나, 성화의 가치에 눈이 멀어 마교를 노리는 이들이 필시 생길 터.

천산의 은거자들이야 이미 누릴 것 다 누리고. 보물 따위는 필요치도 않은 경지에 올라와 있어 별 상관이 없긴 했지만.

“한데 그런 무가지보를….”

“자허, 그 망나니 영감탱이가 훔쳤다는 것이군.”

“으음….”

일순 그들의 시선은 온몸이 천잠사로 묶여 제압당한 자운에게 향하였다.

뚝! 뚜욱…!

절대고수를 상대로도 잠시지만 버티는 천잠사이거늘, 천잠사는 자운이 내뿜는 강렬한 기세와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점차 끊어지고 있었다.

“그 망할 놈이…!”

자운은 군자(君子)란 말이 아깝지 않은 사내이며. 세상 돌아가는 도리와 이치가 무엇인지 아는 곤륜의 장문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인 만큼 성화란 것이 단순히 마교의 보물이 아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알았으며. 마도와 정파를 나누기 이 전에 이것이 도리가 아니란 것을 알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어떤 뜻이 있다 할지라도 문파의 역사를 훔쳐내는 건 결코 해선 안 될 금기(禁忌)와 같거늘…!

“…이 사부.”

“말씀하세요.”

“그놈이 성화를 훔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주었소이까?”

“…….”

“역시 들은 게 있구려. 혹 괜찮다면 본도에게 말해줄 수 있겠소.”

“으음.”

“듣고도 결코 아까처럼 이성을 잃지 않으리라 약속하겠구려.”

“…저도 들은 게 얼마 되진 않아요.”

“부탁하겠소.”

“하아.”

여명은 얕게 한숨 쉬며 조금 전 자허와의 대화를 상기하여 보았다.

* * *

여명은 왜 남의 물건을 훔치냐고 자허에게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자허는 자신이 이토록 화낼 것을 몰랐는지 한결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놀렸다.

-크흠, 나, 나도 처음엔 이럴 생각은 없었다. 처음만 해도 연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단 말이다.

-잘도 연구하게 해주겠네요.

문화유산을 개인이 연구하고 싶다고 해서 과연 누가 얼씨구나 하며 빌려줄까.

-그럼 어쩌겠느냐. 꼭 필요한 것을.

-그래서 훔친 거예요?

-훔쳤다니! ……잠시 빌린 것뿐이다.

-그게 훔친 거예요.

여명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찔함을 느꼈다.

이 양반이 괴팍한 구석이 있는 건 알았지만. 설마 도벽마저 있을 줄 몰랐다고.

여명이 실망스러운 낯빛을 지으며 약간의 경멸 섞인 눈빛을 주려고 하니 자허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기다리거라. 설명을 들으면 내 행동이 마냥 잘못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테니!

-…일단, 해보세요.

-허!

여명은 별 기대도 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니 자허는 자칫 잘못하면 우군 하나를 잃는다는 것을 짐작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봉마림 때문이다!

-…봉마림?

그 이름이 왜 갑자기 나오는 걸까?

-알고 있나 보지? 그렇다면 얘기하기 쉽겠구나. 사실은---.

-……영감님?

일순 화면이 지직거리는 것처럼 자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전하려는 그였지만. 법구가 더 이상 몽환을 유지할 기력이 없는 것인지 그의 말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알며 자허가 다급히 소리쳤다.

-설명은 나중에 해주마! 일단 내가 있는 곳까지 오거라! 그때 다 설… 명….

끝내 자허는 모든 말을 잇지 못했고, 그는 멍하니.

-…지가 무슨 막장 드라마 작가도 아니고.

왜 이리 떡밥을 남기는지, 원.

여명은 저 망할 양반과 인연을 맺은 게 인생 최대의 실수가 아닐까 하고 기어이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하여튼 저도 모두 들은 건 아니에요.”

“…….”

“그 영감님 나름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하고. 다급하기도 한데…. 왜 제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더라고요.”

“컹!”

“응?”

그 부분에 대해선 자신이 얘기하겠다며 밤톨이가 입을 열었다.

“컹컹!”

“내가 가지 않으면 성화를 안 줄 거라고 했다고?”

“컹.”

“…그 얘기를 믿어?”

“……커엉.”

밤톨이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봤지만 그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말하며 슬쩍 자운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커엉….”

“지, 진짜? 그, 그렇게 말했다고…?”

“컹!”

“…….”

“이 사부?”

“그, 그게.”

여명은 지금 들은 얘기를 과연 자운에게 해도 될까 싶어 망설이는 중이었다.

들으면 다시 화병 나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나 자운은.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게.”

인지한 미소를 머금고 여명에게 다정하게 물었고. 여명은 저 미소가 오늘따라 마냥 무섭게 느껴진다 생각했다.

잠시 말할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여명이었으나, 말 안 하고 답답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화병을 키우리라 싶어 끝내 그는 입을 열었다.

“……곤륜과 전쟁을 한다고 협박을 했는데도, 곤륜이라면 알아서 잘 살아남을 거라고 했답니다.”

“…….”

“어르신?”

“…내가.”

“?”

“내가 전생의 죄업이 깊었나 보오, 이 사부….”

“…….”

여명은 자운이 정말 안쓰럽다 싶었다.

* * *

…넋이 나간 건지, 분기를 태우는 건지 모를 자운을 두고. 여명은 대충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너희는 설기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찾으러 왔다는 말이네.”

“컹!”

“내가 안 가면 어쩌려고?”

“……커엉.”

“끼에에….”

여명의 발언에 밤톨이와 대붕의 동공이 먹먹해지며 촉촉하게 젖어갔다.

만약 안 가겠다고 하면 여명을 데려갈 방법이 없음을 아는 거였다.

그러더니 돌연 밤톨이는.

“컹컹!”

“월!?”

영리하게 목표를 설기로 바꾸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발 누나 주인 좀 설득해보라는 것처럼.

설기는 당혹스러워하며 여명과 막냇동생을 번갈아 보았고.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결정해. 난 어느 쪽이건 상관없으니까.”

“…멍.”

어려운 결정을 맡기는 주인에게 투정을 부리며 설기는 슬쩍 마교 삼인방을 보았다.

“자가, 금천주교를 이대로 보낼 거야?”

“이대로 교로 돌아간다면 문책(問責)이 따를 테지.”

“이건 뭐 하늘이 가라고 떠미는 수준이구먼.”

그녀가 막내에게 약하다는 것을 아니 신이 나서 기세등등해진 삼인방이었고. 설기는 이를 갈았다.

하여튼 저놈의 마인들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비수를 꽂는다며.

“…월.”

설기는 여전히 눈가가 촉촉한 막내와 간절한 대붕의 시선에 아파하였고. 다시금 주인을 보았다.

설기는.

“끼이잉….”

“음?”

“월월.”

“난 또 뭐라고.”

설기는 물었다. 자신 탓에 귀찮은 일이 생겨도 괜찮으냐고, 또한 자신을 도와줄 것이냐고.

한데 질문을 들은 여명의 표정은 어딘지 화가 나 보였다.

혹시 불쾌한 질문이었던 걸까?

“넌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허나 여명이 화난 이유는 설기의 물음이 무척이나 어처구니없다 못해 실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넌 내가 가족 일을 귀찮아할 것 같냐? 당연히 도와주지!”

“…….”

“참 나. 평소에는 세상 다 똑똑한 척하면서 이럴 때는 헛똑똑이네, 이 녀석이.”

“……멍.”

설기는 그가 자신을 질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짜증 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家族).

분명 아무렇게나 내뱉었을 테지만. 진심이 담긴 저 단어가 이토록 달콤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월!”

망설이는 것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설기의 눈에는 더 이상 주저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냐.”

딱히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지만. 여명은 이미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사이에 많은 대화는 필요 없었으니까.

tmi후기.

-성화의 효능은 정신적 외상 스트레스 등을 치료해주는 효능이 있고. 특히 전쟁을 겪은 군인들에게 효과적이다.

-성화가 있는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역병뿐만이 아니라, 웬만한 병 정도는 모두 없애주기에. 잔병치레 없는 인생을 보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성화는 실존하는 판타지 교회에서 등장하는 신성력을 응축시켜 놓은 것과 같은 물질이다.

-그러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자허가 아무리 어떠한 의도가 있어 훔친 것이라고 해도 조직이 중요하게 관리하는 소중한 보물을 훔친 것이니 자허는 양아치인 것이 맞다.

-참고로 자허는 이번에 사형인 자운을 만나면 정말 죽을 수도 있기에 잡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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