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왕좌의, 아니 본좌(本座)의 게임(9)
그 개는 참으로 거대했다.
적색보단 홍염색이란 말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붉은 털을 가졌으며. 눈은 마치 홍옥(紅玉)을 박아놓은 듯하여,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웠으나 두 눈을 직시하는 순간 정신이 빨려드는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낄 것임이 분명했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 그를 마주했다면 즉각 혼절하는 것을 넘어 목숨마저 보전하기 힘들었을 터.
허나 다행히.
“허허, 제발 좀 진정하게 교주. 이 늙은이를 기절시킬 셈인가?”
“…구왕.”
“음, 역시 자네는 노인공경을 할 줄 안단 말이지.”
노인은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었다.
“지괴(地怪). 쉬고 계신 교주를 방해하지 마시지요.”
“오오, 기련. 너도 여기 있었느냐?”
“함부로 제 이름을 부르지도 말고요”
“…까칠한 것. 어릴 적에는 참 귀여웠거늘.”
“50년도 더 된 얘기를 해서 어쩌잔 건지 모르겠네요.”
지괴. 이름과 나이, 고향과 스승을 포함한 모든 것이 불명(不明)인 노괴.
그저 어느 순간 흑원신교에 있었고. 그가 있던 세월을 감히 누구도 짐작치 못한다 하여 누군가는 그를 보고 불명지괴(不明地怪)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마도의 총본산 신교의 권력을 양분하는 마선오괴의 일석(一席)을 도맡은지라 그의 권력은 어떤 의미에서 교의 2인자인 광마와 동등하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지괴 본인이 권력 자체를 탐하지 않는 성격인 탓에 그의 서열은 모든 게 다 비공식적이었지만.
‘권력조차 불분명하니, 그야말로 불명지괴란 별호가 참으로 적절하지.’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딱 맞는 별호라며 혀를 차는 그녀였다.
“한데 너는 아직도 교주의 시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십칠마종이란 이름이 울겠구나.”
“흥,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다만.”
지괴보고 특이하다고 했으나, 어찌 보면 그녀 또한 특이하다 할 수 있으리라.
미부(美婦)라는 말이 어울리는 기품 있는 여인.
허나 넘치는 기품과 달리 눈 한쪽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선 위압감이 줄기차게 흘렀다.
그리고 십칠마종 중 유일하게 한쪽 눈이 없는 독안(獨眼)의 마종은 한 명밖에 없음이었다.
“어이쿠, 독기가 가득 흐르는구나. 조심 좀 하여라. 이 노인네 몸이 녹는다.”
“흥! 이 엄살이 심하시군요.”
독안독마 기기련.
독의 종주이자, 당가의 독마저 그녀의 앞에선 비루하다 평가받는 독인(毒人).
천마에게 도전하였다가 눈이 하나 빼앗긴 얘기는 이미 유명했고. 그 일을 계기로 천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마종의 위치에 있음에도 기꺼이 천마의 수발을 들기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괴와는 다른 의미로 괴팍한 행보를 걷는 여인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렇게 교의 인물 중에서도 특이하기론 손에 꼽히는 두 인물이 대면하게 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온함이 감돌았다.
“지괴. 소교주가 오는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교주께서 알게 되실 텐데, 일부러 찾아와 말하는 저의가 뭐지요? 혹 교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러 온 건가요.”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이 노인네는 부녀 싸움이 한시라도 빨리 해결되길 바랄 뿐이라네.”
“하, 그런 분이 다른 주교를 소교주로 밀고 있나 보죠?”
“섭섭하게 말하는구먼. 이 노인네는 그저 어린 것이 직접 간청하기에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라네. 그리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소교주가 되기 싫어하는 이를 소교주로 앉히는 것보다. 차라리 소교주에 대한 욕심이 있는 녀석을 앉히는 게 도리가 아닌가 싶다만.”
“그걸 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에요!”
“귀청 떨어진다, 이년아.”
“이년?! 당신 감히…!”
━구왕.
흠칫!
순간 개의, 아니 ‘천마의 일언(一言)’이 떨어지는 순간 기기련과 지괴가 입을 닫았다.
“…죄송해요, 교주.”
“흠흠, 내가 교주 앞에서 못 할 말을 했구먼.”
두 사람은 빠르게 사죄를 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정점에 위치한 권력자들이라고 해도, 교주가 지닌 교권(敎權)은 신이 직접 내린 지위.
감히 인간들끼리 정한 권력 따위가 대들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가 그들 사이에는 존재했음이었고. 무엇보다….
“구왕.”
마도제일(魔道第一).
일대마종(一代魔宗).
마종일좌(魔宗一座).
본연의 힘 자체도 이미 십칠마종 중 그 누구와도 비견 불가한 절대자가 다름 아닌 ‘천마(天魔)’란 존재이거늘.
어찌 그들 따위가 반항할 수 있으랴.
뭐.
“구왕.”
…겉모습이 조금, 아니 심하게 귀여워 위엄이 안 서는 게 문제 아닌 문제긴 했지만.
“역시 좋아….”
“…넌 역시 취향이 이상하구나.”
“큼큼! 시, 시끄러워요!”
지괴는 취향 한번 이상하다며 혀를 차고 말았다. 제 눈을 뽑은 상대에게 저토록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정상적이지 않았으니.
하여튼 이놈의 교에는.
“정상인이 없구나, 쯧쯧.”
“…구왕.”
그게 당신이 할 말은 아니라며 처음으로 반박 어린 말을 하는 천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구왕…….”
저 멀리서 다가오는 어떠한 존재감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뜨며….
“─오고, 있는가.”
처음으로 짐승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를 내뱉으며 그는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혈족(血族)의 냄새를 맡았다.
………
………
“월.”
“냄새? 나, 나아, 잘 씻었는데…?”
“…월월.”
주인보고 한 말이 아니라며 설기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를 향해 한 말이었지.
이미 자신의 냄새를 맡았을 혈연상 부친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준 설기였으나, 곧 설기는 관심을 껐다.
만날 때가 되면 저절로 만나게 될 거란 무심한 반응을 보이며.
그렇게 설기의 시선은.
“왈.”
간만에 돌아온 고향의 그리운 정경을 눈 안에 담아갔다.
“멍.”
설기는 주인에게 물었다. ‘자신의 고향을 처음 본 감상은 어때?’라는 가벼운 물음으로.
질문을 받은 여명은.
“…그러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여명은 볼을 긁적였다.
어째 자신이 온 곳이.
“여긴 뭔가 내가 평가할 수가 없겠다, 야.”
무어라 평가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자신 없는 답변을 늘어놓고야 마는 여명이었다.
“거참….”
설기의 고향이라 안 좋은 말을 하기가 미묘하여 그런 것이 아닌, 진심으로 여명은 곤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 민간인들 사는 곳 맞아?”
“멍?”
“아니, 내가 봤을 때, 이거 완전….”
‘태릉선수촌’을 방문한 것 같단 말이지….
여명의 눈앞에는 웃통을 헐벗은 채 쇠질을 하는 근육남들이 즐비해 있었다.
* * *
흑원신교의 교리 중 가장 일순위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마 현대의 인간들도 많이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 분명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과 바른 마음이 깃든다.]
어떻게 보면 건강을 챙겨 정신적인 건강도 같이 챙기라는 교훈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장이지만. 이 세상이 무공이 실존하는 세상인 탓일, 아니 덕분일까?
흑원신교의 사람들은.
“힘줘! 힘주라고!”
“허리 나갈 수도 있으니, 장비 착용하게나.”
“오오! 오늘도 열심히 철구(鐵球)를 들어보세.”
정말 ‘과도하게 건강’했다.
아니, 강건(剛健)하다는 것이 더욱 바른 말일 터.
집마다 하나씩 무겁게 보이는 쇳덩어리가 옵션처럼 놓여 있었으며. 놀이터가 있을 법한 장소에는 철봉과 아령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는데, 아이부터 노인까지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무게 또한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혹시나 다칠 우려가 있다는 걸 아는지 감시자도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철저한 관리 감독하에.
“흐읍! 흐으읍!”
극기단련, 아니 ‘일상적인 운동’을 해갔다.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올바른 호흡법을 통한 전력 달리기를 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근력 운동뿐만 아니라 유산소 운동을, 그것도 전력을 다해 가며 마을 들판을 뛰는 사람들이 수십 명은 될 법했다.
“…저거 자발적으로 하는 거 맞지?”
“월.”
설기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자발적으로 저토록 열심히 운동하는 이들이 수십, 아니 지금도 계속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놀라움 아닌 놀라움을 표현했다.
여기가 무림이 아니라 국가대표들만 모아 놓은 마을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자신이 구운몽의 나비가 되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헛생각마저 든다.
“소문으로 들었지만, 정말 대단한 곳이군요. 아이부터 어른, 심지어 노인마저 외공을 이토록 극성으로 익히다니…. 대단합니다.”
반대로 무공을 익힌 사람의 눈에는 저러한 가혹한 맨몸 운동 등이 전부 외공(外功)의 수련법 중 하나임을 알기에 북궁린은 감탄하며 존경을 표했다.
“적진성산 일만련(積塵成山 一萬練). 설마 저 수련법을 하는 자들이 있을 줄이야.”
외공이란 내공과 달리 괴로운 육체수련을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단련하는 길밖에 없는 꾸준함을 가장 중요시한다.
허나 아무리 성실하게 수련을 한다 한들, 외공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보려면 일만 번가량의 반복적인 수련을 쌓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일만 번의 수련을 하였다고 한들, 그로 인해 쌓을 수 있는 무력도 티끌조차 되지 않았고 말이다.
외공이란 어찌 보면 티끌을 모아 태산을 이루어야만 성과를 볼 수 있는 무공이었고. 그 성과를 보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필요한 무공이기도 했다.
황룡국에선 소림을 제외하곤 이런 외공이 가진 비효율성 때문에 내공수련이 각광받으며 외공으로 고수 소리 듣는 이들은 손에 꼽는다고 할 수 있었다.
한데, 이곳은.
“저들 모두가 이류무사 수준이군요.”
무인(武人)인가 무림인(武林人)인가를 판가름하는 경지가 다름 아닌 이류인 것을 봤을 때, 저들은 하나같이 당장 무림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들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이들이 무려 백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북궁린은 다시금 기함했다.
“저들은 혹시 마교에서 키우는 정예무인인 것이 아닌지….”
“왈.”
“그, 그게 사실입니까, 설기님?! 세상에 그런 일이…!”
설기는 북궁린의 발언에 반박하며. 저들은 일반 교인(敎人), 그러니까 그저 민간인일 뿐이라는 설명에 눈을 부릅뜨고야 말았다.
아니, 어찌 저런 이들이?
“월월.”
설기는 마교의 품에서 살아가는 교인들 대부분이 이류무사이며. 절정의 외공 고수도 민간인으로 사는 이들이 많다고 발언했다.
무림에서도 대접받는 것이 절정 고수지만. 마교에선.
“멍.”
‘그저 교리를 실천하는 성실한 교인에 불과하다’고 발언하는 설기였다.
“세, 세상에.”
설기의 설명을 들으며 북궁린은 그제야 마교가 무림 최강 세력 중 하나라 불리는지 납득이 갔다.
“마교, 참으로 대단하고도 무서운 곳이군요.”
삶이 곧 무공이며. 무공을 곧 당연하게 여기는 곳인데, 어찌 강하지 않을 수 있으랴.
북궁린은 간접적으로나마 느낀 마교의 저력에 몸을 떨었다.
한 명의 무림인으로서 느끼는 전율과 흥분이 그녀의 피를 뜨겁게 한다는 듯이.
“월.”
설기는 그녀 또한 어쩔 수 없는 무림인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다만 그런 지극히 마초적이면서도 어딘가 전투민족을 연상케 하는 그들과 달리 여명만은 그녀들의 반응에 마냥 공감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저 근육이 울근불근한 사내들을 보는 게 괴로워 정신적으로 고단하여 이러는 것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무림인이 아닌 그로선 이해하지 못할 감성이었으니까.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삶이 곧 헬스인 양반들이 모인 나라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해한 여명은 이 동네가 자신과.
‘난 이곳에서 절대 못 살겠네.’
그도 운동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조건 가출했다.’
차마 설기 앞에서 하지 못할 발언을 떠올리며 여명은 진절머리를 내었다.
평소 그라면 다른 사람의 삶에 이토록 부정적이지 않겠지만. 여명이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진절머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된 마을에 제대로 된 식당 하나 안 보이냐?’
다른 건 몰라도 밥 지어지는 냄새 대신 닭 가슴살 삶아지는 냄새만 풍기는 것에 질리고야 마는 여명이었다.
뭐 그래도….
‘여기서 프로틴 팔면 대박이긴 하겠다.’
나름 새로운 블루오션을 발견했다며 사업회로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영업자인 모양이었다.
tmi후기.
-흑원국은 현대로 따지면 미국이나 호주 같은 동네다.
-뭐든 다 잘 자란다, 밀이든 옥수수든, 혹은 닭이나 거위 같은 가금류든.
-그래서 식량 걱정은 필요 없는 동네이기도 하다.
-딱히 농사를 짓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기 때문에 흑원에서 가장 쉬운 직업은 농업이다. 그야말로 농업에 있어서 축복받은 환경이라고 보면 된다.
-199화 tmi에서 언급했지만. 마교의 교인들은 하나같이 다 헬창, 아니 외공을 익힌지라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부 다 이류무사 수준이다.
-이류무사쯤 되면 현대에선 인간병기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든 노인이든 대부분 소 세 마리와 줄다리기를 해도 거뜬히 이긴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흑원국의 소는 버팔로만 하다.
-또한 흑원국은 식량만 축복받은 게 아니라, 보석 광산도 많으며. 수많은 천연자원이 잠들어 있다만. 과학 등이 발달될 일이 없는 중원삼국 입장에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자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