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왕좌의, 아니 본좌(本座)의 게임(11)
지금껏 환상적인 광경만 보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여명이 만마전을 보고 느낀 점은.
“정적이고, 멋…있네.”
“월.”
설기는 진솔하게 말해도 된다며 낄낄거렸다.
정적인 게 아니라, 적막한 것이고. 멋있는 게 아니라.
“왈.”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답답한 곳이라고 말이다.
“크흠….”
여명은 차마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어 헛기침을 했고. 만마전 주변을 관찰했다.
‘진짜 신전 같은 느낌이야.’
동양식이 아닌, 서양식에 가까운. 굳이 예시를 들라고 한다면 고대 그리스 신전이 떠오르는 신전들이 즐비하여 어딘지 모르게 웅대한 느낌을 주었으나, 설기의 말대로 적막하기 그지없어 삭막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사람 사는 집은 없고. 신전만 딱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총 백팔 개의 마전(魔殿)이 있으며. 각각 자신이 믿는 마학(魔學)을 따라 수행을 쌓는 것이 만마전의 목적이지요.”
소마 일호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이어주며 여명의 궁금증을 풀어주고는 칭찬을 바라듯 눈을 빛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어색해하더니, 캐러멜을 먹고 난 뒤부터 어딘지 호의적인 소마 일호였다.
“근데 만마전이면 마전이란 것도 일만 개 이상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원래는 일만 개가 있었습니다. 다만 천 년 동안 투쟁을 통해 흡수당하여 지금은 108개까지 줄어든 것입니다.”
“…흡수?”
“만마전은 투쟁을 통해 완성되는 곳입니다. 약자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흡수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
“약육강식이라는 거구나.”
“정확한 평가십니다.”
“…그럼 지금도.”
“물론 투쟁이 이어지고 있지요. 아, 그렇다고 해서 살육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가진 신념과 가르침을 부수는 것일 뿐.”
“……그, 그것도 상당히 잔인한 행위 같은데.”
“목숨을 빼앗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지요.”
“…그러냐.”
여명은 자세한 설명을 들을수록 이 마교란 동네를 이해하길 포기하기로 하였다.
현대인이 이해하기엔 이곳은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초원이 아닌가 싶은 별세계였으니.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자.’
나름 무림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깨달아가는 여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바로 그, 교주님을 만나러 가는 거려나?”
마교에 오기까지 대충 마교의 구조와 최고 권력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게 있는 여명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자신들의 행보를 물었다.
그러자 소마 일호는.
“지존을 함부로 뵐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달이 뜨는 밤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달?”
“예에, 지하의 달빛이 비치는 순간을 기약해야 합니다.”
“…?”
저 또한 은유적 표현일까.
‘땅굴 안에 달이 뜰 수가 있나?’
여명이 저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달리, 설기는 이미 대충 바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았는지 혀를 찼다.
“월.”
“소, 소교주시여, 아무리 당신이라도 교주님을 그렇게 칭하시는 건….”
“왈-?”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왈왈.”
처신 잘하라며 경고를 건네는 설기는 평소 분위기와 남다른 낯선 눈빛을 지었다.
권력자. 그것은 타고난 지배자의 시선이었다.
결코 자신에게 반항하는 건방진 놈을 봐주지 않는…!
소마 일호는 그런 설기의 시선을 마주하며 몸을 떨었다.
‘실수했다!’
1년 전 행방불명되기 전만 하더라도 주교 중 가장 무서운 존재이자,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소교주의 지위를 하사받은 압도적인 잠재력을 가진 이가 다름 아닌 백천주교였고. 잠재력만큼이나 사나웠던 그녀였다.
한데 얼마나 됐다고 그 난폭함을 잊고. 건방을 떨었으니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
소마 일호는 눈을 질끈 감았….
후욱.
“월?”
“넌 또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고 있어. 애가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월.”
“그래, 기분 나쁘다고 괜히 엄한 사람한테 화내면 안 되지.”
“왈왈.”
“그래, 알아서 다행이네. 역시 우리 설기. 착해.”
“…끼이잉.”
어느새 여명의 품에 안긴 채 쓰담쓰담 당하는 설기는 언제 기분이 불쾌했냐는 듯 헤픈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소마 일호를 포함한 소마 일동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그런 설기를 보았다.
‘내가 뭘 보는 거지?’
‘소교주가, 그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백천주교가 어찌…!’
‘역시 식선, 괜히 천외 등급을 받은 게 아니란 말이던가.’
‘과거와 달리 부드러워지셨군. 다행이-.’
“-월.”
“…….”
“월월.”
알아서 눈깔아.
나지막한 소교주의 경고에 소마 전원은 금세 눈을 내리깔며 바닥을 보았다.
아무리 부드러워졌다고 한들, 역시 사람 본성은…, 아니 폭군의 성깔은 어디 안 간다는 것을 확인하며.
* * *
“근데 난 별로 상관없지 않나?”
“월?”
“컹?”
“…너희가 못 알아들으면 어쩌자는 거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여명은 딱히 교주라는 자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자허 그 망할 인간 탓에 마교까지 오게 된 것이었으니, 그는 교주를 볼 게 아니라 자허 그 인간부터 만나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컹?”
밤톨이는 순간 ‘그러네?’ 하는 반응을 보이며 살며시 설기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식선을 데리고 와 자허를 만나게 하고. 자허가 훔쳐 간 성화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으르릉!”
“…커엉.”
손절하려던 밤톨이의 개수작은 단박에 걸리고 말았다.
‘네가 도망가면 나랑 주인도 그냥 천산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협박을 날리는 설기의 살벌함에 밤톨이는 ‘잘못했어요, 누나….’라며 낑낑거렸다.
“하여튼 귀여운 녀석들이야.”
“…흠흠.”
공감은 하지만 차마 진솔한 마음을 내뱉지 못하는 북궁린이 헛기침을 할 때, 소마 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식선, 풍운괴선을 만나러 온 것이라면 오늘은 시간이 늦은 것 같습니다.”
“늦어?”
“예에, 현재 풍운괴선이 갇힌 곳은 신교에서도 최고 범법자만이 갇히는 아귀굴(餓鬼窟)이란 장소입니다.”
“아귀굴?”
무언가 불길한 명칭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처럼 소마 일호가 설명을 이었다.
“아귀굴은 밤마다 굶주린 아귀가 돌아다니는 감옥입니다. 절대고수조차 들어가기 꺼려지는 장소이거늘, 식선이 들어가신다면….”
“그 양반,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갇혀 있던 거야?”
여명은 새삼 자허가 어마어마한 죄를 저질렀다는 실감이 들면서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르신을….
“괴선은 재밌어하시더군요. 연구할 거리가 많다면서.”
“…그 양반이 그럼 그렇지.”
걱정한 사람만 손해인 인간이 아닐 수 없다며 여명은 질려했다.
“어쨌든 아귀굴에 들어가시기엔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 정오에 가시는 걸 추천드리지요.”
“그렇다면야, 뭐.”
원래 낯선 타지에 오며 현지인의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하는 법.
여명은 납득하며 설기를 보았다.
“천산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오자.”
“월!”
“예에!?”
“굳이 지금 있을 필요는 없다며? 그럼 상관없잖아.”
“그, 그건….”
여기 올 때야 처음 오는 장소이고. 딱히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물건조차 없으니 축지를 사용치 못했다.
하지만 이제 확실한 장소도 기억해 놓았으니 축지로 집에 갔다 와도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
“아, 아니 되긴 하지만. 아, 안 되는데….”
소마 일호는 당황하며 눈알을 대굴대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마치 이렇게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큰일이 날 것처럼.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챈 것일까. 여명은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누가 우리를 잡아두라고 했어?”
“예, 예에!?”
“…진짜인가 보네.”
찔러만 봤는데 곧장 반응이 나오자 여명은 떨떠름하게 그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땐 각 잡힌 군인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마냥 그 나이에 맞게 어리버리한 구석이 있는 소마 일호였다,
그렇게 무언가를 더 물으려고 할 때.
“그 아이를 그만 괴롭히시지요, 식선.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할 테니.”
“…….”
“인사 올립니다, 소녀는….”
“기환학사?”
“…역시, 명불허전이군요.”
“…….”
뜬금없이 등장한 여인에게 여명은 낯설음과 친숙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가 정말 생판 남이기에 느끼는 낯설음을 압도하는 ‘동족’에게 느끼는 친숙함을.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인 친숙함을 느끼는 건 마냥 그만이 아니란 듯 단아한 여인 또한 수줍으면서도 얕게 경직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크릉!”
“…시선강탈 제대로 하네.”
여인보다 더욱 그의 시선을 끄는 건, 여인의 품에 안긴 자그마한 검정색 댕댕이였다.
…어딘가 설기를 쏙 빼닮은.
* * *
털썩, 털썩.
“흑천주교를 뵙습니다.”
━흑천의 주인을 뵙습니다.
소마 전원이 설기와 밤톨이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정중한 모습으로 무릎을 굽히며 검은 강아지에게 굴종했다.
그 모습이 심히 만족스러운지 흑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릉.”
자신이 앞에 있는데 인간은 무릎을 꿇는 게 당연하다는 오만함.
만약 사람이 저랬다면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지겠으나.
“…왜 이리 하찮지.”
“월.”
조막만 한 강아지가 저러고 있으니 마냥 하찮고 귀여운 투정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크흠! 식선. 비록 당신이 교의 귀중한 객이라고 하나, 흑천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은….”
“월!”
“!!”
여명에게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던 여인이었지만. 설기가 호통을 내지르니 그녀는 찔끔하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네가 뭔데 우리 주인한테 뭐라 하냐!
…며 성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르릉!”
설기가 자신의 수하에게 화를 내니 흑견 또한 분노하며 설기에게 소리쳤다.
-그런 너는 뭔데 본좌의 부하를 혼내냐!’
“왈왈!”
“크르릉!”
흑견과 설기는 서로 마주하고 말다툼을 시작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게 싸우기 시작했다.
마치 언제라도 서로를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고. 대화하는 것이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마주한 것만 같은 개싸움.
저들은 대체?
“컹.”
“첫째 형이라고?”
“컹.”
“…설기가 둘째라는 거네.”
“커엉.”
“……원수일 만하네.”
서로를 왜 저토록 적대하나 싶었는데, 오빠랑 여동생 사이라고 하니 바로 납득이 가는 여명이었다.
“어쩐지, 할 말 못 할 말 다 한다 싶더니.”
“…시, 식선께선 저 두 분이 무어라고 얘기하는지 다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그쪽은 몰라요?”
“저, 저는 아직 수행이 부족한지라…. 호, 혹 저분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별건 없는데.”
“꼭 좀 부탁드립니다.”
“……대충 해석하자면.”
부담스럽도록 얼굴을 들이대니 여명은 볼을 긁적이며 저들의 대화를 해석해주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가 죽어라, 라고 말하고 있네.”
“…….”
“음, 정상적인 남매네.”
참으로 가슴 웅장해지는 하찮은 것들의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tmi후기.
-참고로 말하자면 지금 등장한 여인은 히로인도 뭣도 아닌 엑스트라1일 뿐이다.
-202화에 등장한 여인으로, 자허와 대화를 나누던 여인이 다름 아닌 엑스트라1이다.
-기환학사와 같은 고급 인력이 왜 무림 세력에 속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종교 세력에 고급 인력이 많은 건 현대도 비슷하다.
-다만 엑스트라1인은 여명에 비하면 한없이 약하다. 레벨로 따지면 여인은 레벨10인 수준이고. 여명은 레벨10,000이라고 보면 된다.
-기환학사가 고급 인력이 건 맞지만. 그중에서 진짜 제 몫을 해내는 이들은 얼마 없으며. 여인은 기환학사 평균인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여명처럼 세심공을 수년 동안 열심히 수행하고. 선업 활동 등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드문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