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와요 무림식당-217화 (217/261)

217-판이 개판이면, 뒤엎으면 그만(2)

‘이거 죽겠구먼.’

자허는 제 사형이 어떤 사람인 줄 안다.

협의와 신의 등을 목숨처럼 여기며. 최소한의 도리조차 귀하게 여기는 답답한 외골수.

그야말로 자허의 천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호인, 아니 호구(虎口)가 아닐 수 없다.

허나 마냥 호구가 아닌, 제법 똑 부러지며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재주가 있기에, 무림인이 아니라 그냥 도(道)를 수행하며 전파하는 도사가 되었어도 아마 명성이 높았을 양반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는 융통성이란 게 없었고. 한번 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루어내는 작자였으니….

“하필 그 융통성 없는 작자가 왜 내 앞에 있는지, 원.”

“혼자 중얼중얼 거리지 말고 얼른 답이나 하거라. 베이고 싶은 곳이 어디더냐?”

“…장문사형.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그래, 팔이 베이고 싶다고.”

“내 다 이유가 있으니 이러는 것이 아니겠소. 당신 사제를 그렇게 못 믿으오!”

“그래, 일단 혀부터 자르고 보자꾸나. 단도를 내줄 터이니 스스로 참(斬)하여라.”

“……우리 대화가 이어지는 게 맞소이까?”

“그래, ‘한때’ 곤륜의 제자인 이라면 그래야 하는 게 옳을 테지.”

“……장문사형, 잘못했으니 문적에서 파내었다는 소리만 하지 맙시다. 나 너무 무섭소.”

“어허허!”

“이, 이 양반 진짜 팠구나?!”

만약 여명이 보았다면 블랙 시트콤을 보는 것 같다며 재밌어했을 광경이었지만. 막상 심각한 상황에 놓인 자허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진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웃을 미친놈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으랴.

그렇게 재차 식은땀이 줄줄 흘리며 등만이 아닌 머리를 적실 때쯤.

“자운 대협. 그쯤 하시지요. 그자를 죽이게 되면 성화를 찾는 길도 요원해질 일이니.”

“걱정 마시게. 대답할 입은 남겨둘 터이니.”

“…자운 대협께선 신교의 교인이 되었더라도 잘 적응했을 것 같군요.”

웃프게도 자허를 구해준 것은 마도의 인물이었다.

선공지도(仙功至道)의 정점인 곤륜의 인물을 마도의 인간이 구해주는 일이 생기다니, 이를 세인들이 알게 된다면 그저 농담으로 알아들을 희극(喜劇)이지 않을까.

쓴웃음을 지은 남성.

흑원신교의 책사이자, 문(文)과 무(武)로 입신을 쌓은 뇌마종(腦魔宗) 야율초가 다름 아닌 그였음이다.

“음, 야율 소협이 그리 말린다면 어쩔 수 없구려.”

“…소협이라니, 제 나이가 이제 지천명입니다, 대협.”

“한창이구먼.”

“…….”

야율초는 십칠마종까지 올랐으면서도 이 영감 앞에선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쓰게 웃었다.

젊은 날 그가 사신(使臣)으로 곤륜을 올랐을 때도 자운은 백발이 자욱한 노인이었으니.

그렇게 연공(年功) 서열만큼은 웬만한 무뢰배조차 지키는 삼국의 문화를 받들어 지천명(50세) 나이에 소협 소리를 듣게 된 야율초가 말을 이었다.

“후우, 어쨌든 당장은 곤란하니 참아주시지요. 성화의 행방은 자허 도장밖에 모르는 실정이니.”

“허허, 알겠네. 야율 소협의 조언을 따르지.”

“감사합니다, 대협.”

“되었네, 아, 한데 말일세.”

“예에?”

“혹시 고문 같은 거 안 하시는가? 마교에선 그쪽으로 전문적인 기술자가 있다 들은 것 같은데….”

“…….”

…이 양반은 마도의 입문하였어도 분명 정점이 되었을 것이라며 야율초는 확신했다.

………

………

한창 자허의 생사가 오고 가는 시각.

여유롭게 달걀 토스트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던 여명은 문득 궁금 거리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설기 너는 안 찾아가도 돼?”

“월?”

“너희 부모님 말이야.”

“…….”

“일단 싫어도 뵙긴 뵈어야지.”

“…월.”

전날 밤. 설기가 제 부모를 싫어하는 ‘이유’를 들은 여명이었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아무리 싫다고 하여도 천륜을 어길 순 없는 법.

“뭐, 내 부모처럼 막장이면 모르겠지만.”

“…끼잉.”

여명은 모르겠지만. 어젯밤 삼자담화가 만약 대결이었다면 그 대결의 우승자는 그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설기가 투정을 부리는 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잡는 격일 터.

“워우웅….”

그렇게 설기는 정말 싫은 얼굴을 지으면서도 그의 조언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인정하고는.

“월.”

천마전(天魔殿)에 입성할 것을 천명하였다.

* * *

천마전.

만마전에서도 명실공이 부동의 정점에 위치한 마전이자 천마와 그 혈족, 그리고 십칠마종이나 마선오괴와 같은 신교의 권력자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마전.

하지만 다름 아닌 당대 천마가 정한 후계자가 그를 뵙고자 청한 것이니, 원래는 훨씬 더 복잡해야 하는 절차가 원활하게 풀려갔다.

“일월(日月)의 교차가 생기는 때, 문이 열릴 겁니다.”

“왈.”

즉, 새벽 일출이 떠오르기 직전에 오라는 말이었고. 참 일찍도 오라 한다며 설기는 혀를 찼다.

전혀 바쁘지도 않을 양반이 비싼 척 군다며.

설기의 발언에 다른 이들이 대경실색하는 것과 달리 여명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흠, 새벽까지 시간이 있다 이거지?”

여명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기왕 설기의 부모를 뵙는 자리인데, 그냥 빈손으로 가는 건 뭔가 아니다 싶었으니.

“혹시 그분 좋아하는 음식 없어?”

“월.”

“대충 아무거나 먹여도 충분하다”라는 불효녀의 발언이 이어졌고. 여명이 쟤한테 뭘 물으면 안 되겠다 싶어 사마윤윤과 갈지윤 등에게 시선을 주니 두 여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무래도 저의 신분으로 교주께서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조언을 드리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긴 한데, 아! 그러고 보니.”

“뭐 아는 게 있어요?”

“네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교주님은…!”

“…….”

“가리시는 게 없다고 그랬어요!”

“그, 그게 다예요?”

“예에!”

“……하.”

여명은 백치미 넘치는 답변에 일순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사마윤윤을 보았다.

혹시 원래도 이런 사람이냐고.

“으음.”

사마윤윤은 제 동료도 아닌데, 왜 자신이 창피할까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식선의 물음에 성실히 답변하였다.

하기 싫은 할 말은 다 하는 꼼꼼함이 아닐 수 없으리라.

‘…참 별의별 이상한 인간만 다 모아 놓은 것 같은 동네일세.’

개성적인 인간들이 넘쳐나 지루할 틈은 없겠다며, 나름 긍정적인 점수를 주는 여명이었다.

* * *

예전 일했던 호텔의 주방장은 한때 프랑스 대사관에서 일했던 셰프였는데, 가끔 같이 술을 기울일 때면 자기 옛날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요리란 게 무조건 맛있고 화려하면 장땡이란 양반들이 있는데, 이게 외교의 영역에선 요리란 단순히 맛과 화려함에만 치중해선 안 돼.

국빈급 인사를 맞이할 때 통역사를 비롯하여 요리사 등은 항상 긴장하고 외교적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했다.

국빈의 가치관과 그 국가의 문화와 예절 등등.

알아야 할 사항이 한없이 많고. 조금의 방심이 곧 외교적 실수가 되어 트집이 날 수도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상류층의 세계라는 것이었으니까.

-여명이 너 정도 열정이라면 지금이라도 노선 틀어서 프랑스 요리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도 대성할 거야. 그럼 언젠가 대사관에서 일할지도 모르니 그때가 되면 기억해. 항상 요리의 메시지와 뜻을 담는 연습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닐까 싶어 부담스럽기 그지없던 말들.

그래도 당시 들었던 조언들은 여전히 여명의 뇌리 안에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을 보면, 인상적인 가르침이었던 건 분명했다.

‘상류층을 위한 요리라.’

설기의 아버지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삼국 최대 종교 세력의 정점이 다름 아닌 설기의 부친이었으니, 상류층 중에서도 최상위권 상류층이란 의미일 터.

허니 그런 상대에게 걸맞은 요리를 해줘야 나름 체면이 살지 않을까 싶은데.

‘나다우면서도 정성스러운 걸 하자.’

흑원국에 대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게 많지만. 결국 이곳의 미식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맛을 내는 미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어제 대접받은 식사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오지.’

간단한 달걀 토스트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는 것만 보아도 흑원국 사람들의 입맛은 대충 어떠한 것인지 짐작이 간다.

아마 교주란 이 또한 다른 이들과 입맛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며. 가리는 음식도 없다고 했으니.

“두부를 해볼까.”

“월?”

설기는 갸웃거리며 여명의 말에 의문을 보였다.

두부(豆腐)?

“월월.”

자신이 아는 그 두부가 맞느냐고 설기는 물었고. 여명은 긍정했다.

“맞아, 그 두부지.”

“…월.”

설기는 여명이 만드는 음식은 모두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보잘것없는 음식이 아니냐며 당황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두부는 중원삼국에도 있는 음식인데, 전혀 특별하지도 않고.

“확실히 특별하진 않지.”

여명은 선선히 인정했다. 저 말대로 두부 자체는 별 특별할 게 없는 건 분명하니 말이다.

그래도.

“한식 두부 요리는 이곳에 없을 거잖아?”

원래 어떤 국빈이라 할지라도 그 나라 전통의 요리를 맛보는 걸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며. 무엇보다.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고. 거기다 나름 고급스럽게 만들 수 있거든,”

“…?”

“뭐, 일단 보여줄게.”

백 마디 설명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나을 거라며 여명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일단, 두부부터 만들자.”

“…멍.”

아,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월.”

‘요즘엔 슈퍼 두부도 먹을 만한 것 같던데….’라며 자그마한 반론을 해보는 설기였으나, 여명은.

“에이, 맛있게 먹으려면 직접 만들어야지.”

“…….”

역시, 우리 주인. 사서 고생하는 모습이 아주 한국 사람다웠다.

* * *

한편, 사마윤윤과 갈지윤은 배탈이 난 채 쓰러진 자신들의 주군을 모시는 중이었다.

“왜 이리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하시는 건지….”

“그러게요. 제 주군은 경계심이 많은 분인데, 이상한 일이에요.”

흑천이야 워낙 그 성격이 까탈 하여 모르는 자가 없었고. 금천도 마냥 애교가 많아 보이는 모습이지만, 사실은 함부로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않는 도도함을 유지하기로 자자했다.

한데 그런 두 주교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식선에게 이토록 친근감을 비추니 그녀들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흥,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

“무슨…?”

“검마님?”

단백설의 뜬금없는 발언에 그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단백설은 저토록 눈치가 없느냐며 혀를 찼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가(自家)가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당장 시종 자리에서 내려와야겠지.”

“…….”

“…아.”

두 여인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가, 그러니까 소교주께서 선택한 남자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소교주’가.

‘교에서도 그 난폭함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십칠마종밖에 없다고 전해지는 분이었지.’

‘한데 직접 만나 보니 그런 느낌도 아니었고요.’

소교주를 이토록 가까이서 뵌 것은 처음이지만. 소문의 백 분지 일도 안 될 만큼 얌전하시고 늠름했던 소교주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예상엔 저러한 변화가 있었던 원인에는 아마도….

“우리조차 자가의 그 난폭한 성정을 바꾸길 꺼려 했지. 한데 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타고난 성장마저 바꿔버린 자가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건….”

“그래, 너희가 모시는 그 꼬맹이들조차 푹 빠져버릴 매력이 그에게 있다는 거겠지.”

“허….”

매력(魅力)이라니….

오로지 힘(力)과 무(武), 혹은 피(血)의 논리만으로 돌아가는 흑원신교에서 매력이란 말을 들을 줄 몰랐다며 어떤 의미에서 어안이 벙벙한 그녀들이다.

하지만 저러한 말을 마냥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확실히 덮쳐보고 싶은 매력이 있긴 했어요.”

“네에?”

“마치 세상 깨끗한 백의(白衣)처럼 보이던 사람이잖아요. 가능하면 그런 백의를 제 색으로 더럽히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후후!”

“호호, 네가 뭘 좀 아는구나.”

“뭐, 뭔…!!?”

사마윤윤은 갈지윤과 단백설의 희롱과 같은 말에 기함하며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갈지윤이 덮쳐보고 싶다는 매력이 있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는 자신을 발견하며 사마윤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고, 공감하면 어쩌잔 거야!’

백로가 흑로 무리에서 놀면 흑로가 된다 했던가.

음흉한 두 여인에게 감화되며 나쁜 길로 빠지려는 사마윤윤이었다.

그리고…….

“…다 들리는데.”

“월…….”

설기는 차마 고향 사람의 행실이 낯 뜨거워 마냥 대신 미안하다 속삭일 따름이었다.

“내가 이런 경험을 다 하네….”

35년의 인생을 살며 처음으로 여인에게 희롱을 당해보는 느낌은 불쾌하기보단 신선한 것이었다.

tmi후기.

-흑원국은 아무래도 남녀 상관없이 영수의 피나 강한 외공 고수들의 피를 이어받다 보니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이 높다.

-즉, 남녀의 신체 능력이 동등하여 물리적-남녀평등 사회를 이룬 상태다.

-이렇다 보니 여성이 오히려 더욱 강인한 지위를 누리는 경우도 빈번한지라, 약간 남녀역전 세계와 같은 느낌이 드는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워낙 근육이 터질 듯이 크고, 덩치가 산만 한 이들밖에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명처럼 호리호리한 타입이 인기이기도 하다.

-흑원국 여자들의 눈에는 여명이 마치 군대에서 갑자기 여배우가 면회를 온 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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