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판이 개판이면, 뒤엎으면 그만(5)
“지하 속에 또 지하라니….”
감성 죽이네.
여명은 크게 경탄했다.
“월?”
“원래 이런 스팀펑크 감성이 남자의 심금을 울리는 거야.”
“…왈.”
별게 다 심금을 울린다며 설기는 혀를 내둘렀고. 여명은 여전히 감탄스럽게 천마전의 입구를 보았다.
영국의 스톤헨지가 연상되는 신비롭고도 거대한 신전.
그 신전 중앙에는 마치 승강기와 같은 것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만마전의 신월(新月)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감히 제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부디 무운(武運)을.”
“…우리 싸우러 가는 거 아닌데.”
누가 보면 전쟁, 아니 레이드 뛰러 가는 줄 알겠다며 여명은 어처구니없어했지만. 지금 상황이나 장소 등이 마치 MMORPG에 나올 법한 던전 같긴 하여 왠지 무운이란 대사가 납득이 갔다.
‘최종 보스한테 가는 느낌이긴 해.’
“왈.”
“…넌 네 아빠한테 그러고 싶니.”
“월!”
설기는 제 아빠를 레이드 하자며 당장 천산의 노인들을 다 데리고 오자고 언급했다.
당당히 패륜을 저지르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나, 설기는 신이 나서 자꾸만 헛소리를 해대었다.
힐러랑 법사는 주인이 하면 되니까, 단골 영감들은 딜러를 하면 된다고 하는데….
“넌 그럼 뭔데?”
“왈.”
“…자동 사냥 돌릴 거면 게임을 왜 해?”
여명은 요즘 애들 감성은 이해할 수가 없다며 결국 고개를 저었다.
* * *
쏴아아아!
“승강기인 줄 알았는데, 잠수함이었어?”
놀랍게도 지하의 밑은 막대한 물이 모인 수원(水源)이었으며. 승강기인 줄 알았던 것은 수원을 내려가기 위해 만들어진 잠수함이었다.
목조(木造)로 만들어졌을 뿐인 이게 어찌 물에서 잠수를 할 수 있나 하며 누군가는 의문을 표하겠지만. 여명의 눈은 대번 원리를 파악해갔다.
“…재밌네.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구나.”
전날부터 느낀 거지만. 이 마교라는 곳은 기환술과 친근한 조직이다 싶다.
승강기, 아니 잠수함(潛水艦)에는 보이지 않는 막(膜)이 붙어 있었다.
간단히 원리를 설명하자면 비눗방울의 원리였고. 겉면만 가볍게 코팅되어 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으음, 잘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엊그제까지는 무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그는 상위 기환술을 문제없이 쓸 수 있게 성장한 상태.
여명은 잘 기억해놨다가 써먹어 보자며 눈을 반짝일 때쯤.
쿠웅-!
그들을 태운 잠수함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내려앉으며 자동문처럼 문이 멋대로 열렸다.
허나 여명과 설기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현대 생활에 익숙한 그들에겐 일상 같은 광경이었을뿐더러, 이미 누군가가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기에.
아니나 다를까.
“모시러 왔습니다, 소교주, 그리고…. 식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을 맞이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허나 여명은 여인을 본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뭔가….
‘와아, 포스가 뭔.’
여명은 기세, 혹은 살기(殺氣)란 것이 유형화할 수 있다면 저러하지 않을까 하며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외눈 안경 같은 안대를 착용한 여인을 마주하며 여명은 당장 도망갈 준비부터 하기로 했다.
기환학사의, 아니 인간의 생존본능에 따른 결정이었고. 축지를 준비하려 하던 그때.
따악-!
…맑고도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이 철없는 년아. 넌 왜 지랄을 하고 있는 게냐, 지랄을!”
“…제가 뭘 했다는 거죠? 그보다 망치로 제 머리를 때리지 마시죠.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아픕니다.”
“아프라고 때린 거다, 이 멍청한 계집애야. 언제 철이 들는지, 쯧쯧.”
뜬금없이 등장한 한 노인은 도망가려는 여명의 발길을 붙잡듯 여인을 구박했고. 여명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았다.
‘저 영감님….’
경박하면서도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란 인상이었지만. 겉보기만 그럴 뿐.
마주한 순간 여명은 알 수 있었다.
저 양반…!
‘엄청난데?’
기환학사로 성장한 덕분에 알겠다. 저 영감님….
‘자허 영감님보다 위다.’
여명이 아는 기환학사 중 최고였던 양반보다 한술 더 뜨는 기환학사의 등장에 잠시 멈칫거리는 그에게 노인은 나이에 맞지 않은 순수함을 머금은 시선으로 직시했다.
“허허, 그놈 제법인지고.”
불명지괴.
그가 동족(同族)을 향해 기껍다는 듯 웃어주었다.
* * *
같은 시각. 단백설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천마전에 그 계집애가 있었지, 참!”
“계집애? 누굴 말하는 것이오, 선배?”
“주제도 모르고 교주한테 도전했다가 눈알 하나 없어진 계집애 말이야.”
“천마에게 도전한 여인? 혹시….”
금천후와 삼존은 단백설이 일컫는 여인이 누군지 떠오른 것인지 미간을 찡그렸다.
“독안독마, 그 여자가 거기 있다고?”
독안독마(獨眼毒魔) 기기련.
천마에게 쉼 없이 도전하여 무려 세 번을 패배하고. 네 번째 도전에서 기어이 눈 한쪽을 잃은 여인.
특유의 투쟁심은 분명 무림인으로서 감탄스럽기 그지없으나. 투쟁심과 살의가 워낙 강하여 입신에 오른 지금도 그 기세를 감추지 못한다는 그….
“그 독뱀이 아직도 살아있었단 말이오? 죽은 줄 알았거늘.”
“후후, 그 이름. 가능하면 그 미친년 앞에서 해봐. 아마 재미난 걸 볼 수 있을걸?”
“싫소. 난 독쟁이와는 싸워도, 천지 분간하지 못하는 독뱀과 싸울 마음은 없으니.”
남는 장사가 아니다.
실로 이득을 따지는 상인다운 평이었다.
“아하하하! 정확한 표현이구나.”
단백설은 직설적인 금천후의 표현에 시원하게 웃었다.
아니, 시원한 것을 넘어 쩌렁쩌렁하였고. 내공도 없이 그저 웃을 뿐인데도 온몸이 저릿저릿해질 따름.
‘괴물이로다.’
금천후는 살면서 이기지 못할 자가 없다 자부하며 살아온 오만함이 있으나, 이는 마냥 오만한 것이 아닌. 오랜 세월 자신의 무(武)를 쌓으면 생긴 확신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자신보다 무력이 높을지라도, 승부에서는 이길 능력이 그에겐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르겠군.’
이 여자는 정말 모르겠다.
전날 천산에서 가볍게(?) 손을 섞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못내 분하면서도 아직도 오를 산이 있다는 것이 기껍기도 한 것은, 그가 상인(商人)의 피보다 무인(武人)의 피가 더 진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후우, 다 늙고도 주책이구먼.”
“늙기는, 이제 겨우 백 살 좀 넘은 것 가지고. 그 정도면 마교에서는 아직 청춘이니 좀 더 노력해 봐. 반로환동도 팍팍 하고. 우리 애들은 다 그랬어.”
“…그건 당신네들이 이상한 것이오.”
천산에도 별의별 이상한 인간들이 다 모여 있지만. 아마 마교와 비교하자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어찌 이토록 개성적이고도 과감한 이들밖에 없는지, 원.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인물들을 모조리 압도하여 굴복시킨 ‘한 명’이 있다는 점이었다.
단백설이나 광마 무백조차 그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니.
“한 번씩 ‘천마’란 이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구려.”
“금가야?!”
“…말실수를 했군.”
금천후답지 않은 실수였음이다.
어쩌면 고양된 투쟁심 때문에 일어난 실언.
천마. 흑원신교란 거대한 조직의 지배자를 알고 싶어 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한데도 천마에 대한 정보가 삼국 무림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흑원국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흑원국 내에서 활동하며 흑원신교 내부에만 떠도는 전설과 같은 인물, 그리고 흑원신교, 아니 흑원제일인이라 불리며. 어쩌면 삼국제일일지도 모르는 당대의 천하제일.
어찌 단 한 번의 강호행조차 한 적 없는 무인을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겠냐만, 흑원신교의 지배자라는 것은 십칠마종 전원을 꺾었다는 의미이니 충분히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리고 이러한 명성 탓에 천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수많은 무림의 명사들은 흑원신교를 직접 찾아와 천마를 직접 만나 비무를 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흑원신교까지 직접 행차한 이들 모두가.
‘죽었지.’
천마는 단순히 단체의 수장이 아닌, 흑원신교의 성인(聖人)이자 황족.
그를 만난다는 것은 곧 황족을 배알하겠다는 의미이며. 신앙심이 절정에 달한 흑원신교 앞에서 천마를 만나겠다는 것은 곧 불경죄였음이다.
그러니 삼국에서 천마의 정체나, 그 무력을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 되었고. 감히 궁금해해서도 안 되는 바였다.
솔직히 이번처럼 개인이 천마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었지, 원래 같았으면…!
“천마에 대한 언급을 마교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들었소이다. 내 실수이요, 겸허히 사죄하지.”
금천후는 목숨을 잃는 것이 무서워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느 조직이나 율법이란 엄한 것이거늘, 외부인이 율법을 감히 건드리려 한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단백설은 그런 금천후의 사과에 담백한 반응을 보였다.
“사과는 무슨. 별것도 아닌데. 솔직히 그 율법이니 하는 건 과거의 것이기도 하고. 조금 부풀려진 경향이 있을 뿐이야.”
“부풀려져?”
“그래, 죽었다고 알려진 녀석들은 대부분 제 명성만 믿고 뻗대는 녀석들이었지. 거기다 괜히 교주를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많아지면 안 되니까 조금 소문이 과장되어 부풀게 한 거야.”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가장 최근만 해도 궁산월이 교주와 직접 대면하고도 무사히 돌아갔던 적이 있었으니까. 궁산월처럼 예의만 잘 지키면 누가 교주를 못 만날까.”
“궁 선배가?”
월하신궁 궁산월.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자운이나 금천후와 같이 정천팔걸의 이름을 올린 여걸이자, 정파무림의 원로 무인이 다름 아닌 그녀였고. 원래는 천산의 은거자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어찌 보면 그들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뜻밖의 이름에 놀라고 있는 그들에게 단백설은 추억을 상기하듯 말하였다.
“궁산월이 제자를 찾는다고 흑원국까지 왔었지.”
“그런 일이 있었구려.”
궁산월이 제 문파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삼국을 떠돌아다니는 건 천산에선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한데 그런 그녀가 설마 흑원국까지 왔을 줄은.
그들이 그녀의 집념에 감탄하고 있을 때, 단백설은 그들과 다른 의미로 그녀에게 감탄했던 얘기를 꺼내었다.
“제법이었지. 설마 교주와 비무를 해서 일수(一手)를 버틸 줄은 몰랐어. 그래도 두 수에서 바로 지긴 했지만. 광마를 제외하고 두 수를 버틴 사람이 없는 걸 생각하면 대단했지.”
“……뭐?”
“지금 뭐라 하셨소이까?”
“두 수…?”
자기들의 귀가 잘못된 것일까.
궁산월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팔걸의 이인지와 다를 바 없는 그 월하신궁이 두 수만에 패하였다?
천산에서도 적수를 찾기 어려웠던 그녀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였고. 그들이 눈을 부릅떴음에도 단백설은 덤덤했다.
도리어 자기가 무슨 이상한 얘기를 한 건지 모르겠다는 듯.
그리고는.
“아, 맞다. 너희는 교주가 어떤 양반인지 모르지. 확실히 그렇다면 궁산월의 패배가 신경 쓰일 수도 있겠네.”
“천마가, 그토록 강한 것이오? 궁 선배가 두 수만에 패할 정도로….”
그런 천리후의 물음에 단백설은 단호하게, 또한 단번에 답변을 내놓았다.
“아무렴 강하지. 오히려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게 무슨 뜻이오?”
“간단해.”
단백설은 기꺼운 마음으로 흑원신교 최대의 비원(悲願)이자, 교주라는 존재가 왜 이토록 신성시되며. 자존심 강한 십칠마종이나 기환학사 같은 자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 비원을 듣는 순간 어찌하여 천마에 대한 소문이 무림에서 금기처럼 여겨졌는지 그들을 깨우쳤다.
‘이러니 마교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들, 과연 누가 이 얘기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정상적으로 보였거늘…. 아니었어. 이들은 모두가 미쳤던 게야.’
‘제정신이 아니군. 정녕 가능하리라 여기는 겐가!?’
‘허허….’
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기함하며 그들의 염원을 회피하고 싶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비원이었기에.
──흑원을 죽인다.
신(神)을 죽인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발언.
신교가 어찌하여 마교(魔敎)라 불리는지를 새삼 깨닫는 일동이었다.
tmi후기.
-궁산월은 100화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여명의 첫 고백 상대이기도 하다.
-삼국에서 신수란 것은 실존하는 신이며 자연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상대하는 것은 인간이 맨몸으로 화산 폭발이나 운석 등을 막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참고로 흑원이 죽으면 발생할 피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흑원국이 아포칼립스를 맞이하는 결과를 낳는다.
-허나 흑원은 도리어 이런 흑원신교의 어리석음을 기꺼워하기에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을 넘어 지원마저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