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연적(戀敵)으로 살아남기?(4)
“흑원께서, 가, 강림하셨다고…!?”
묻는 어투는 모두가 다 다르나, 결국 십칠마종이 묻는 요(要)는 하나의 줄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흑원신교의 교신, 흑원.
신께서 강림했다는 것이 진실인지 묻는 것.
그러한 물음에.
“네 강림했었고. 여유 있게 식사도 하고 가던데요?”
“…….”
“거짓말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여러분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려고.”
“그, 그것도 그렇지….”
삼국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세를 누리는 흑원신교였고. 마음만 먹자면 나라마저 세울 수 있다 자부하는 신교였으나, 감히 여명의 말을 논파할 논리를 찾지 못했다.
외려.
‘우리가 그의 눈치를 보면 보았지.’
‘성화를, 아니 과거보다 더욱 거대한 성화를 되찾아준 신인(神人)이 다름 아닌 그인데, 신교가 무어라고.’
‘살다 보니 신교가 시골 객잔보다 못하게 되는 날이 다 있구먼.’
영수와 백모신원의 벗(友).
이러한 신분만으로도 감히 그를 억압할 수 있는 이는 존재치 못하는 바.
또한 상대방은 자신이 가진 영향력과 힘을 모르는 모자란 이도 아니었으며. 그 힘을 적절히 사용하는 영악함이 있었다.
다만 그 영악함에는 선(善)함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일 테지.
어쨌든 그는, 식선이란 사내는 그들이 평가할 수 없다. 아니 평가할 자격조차 없었음이다.
그러니 그의 말은.
“허허, 이걸 믿어야 하는 날이 오다니….”
흑원의 강림은 일말의 거짓도 없는 참(眞)이란 의미였다.
“허허….”
십칠마종과 마선오괴 일동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교신이 왔는데도 배알하지 못한 우울감과, 교신을 만나지 않아 다행이란 안도감이 반절씩 섞인 형용 못 할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헛웃음이었다.
* * *
흑원의 강림은 무수한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신교 내에서도 광신도 소리 듣는 과격파 세력에게 있어선 더더욱.
그들은 조심스럽긴 하나, 언뜻 초조하고도 미칠 듯한 얼굴로 여명에게 힘겨운 물음을 이어나갔다.
“시, 식선, 아니 신인이시여! 부, 부디 흑원의 신언(神言)을 접한 분에게 천한 교신의 종이 물음을 던지겠나이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는 의미에서 흑원의 신탁을 여쭐 수 있겠나이까….”
“신탁이요?”
“부, 부디 하대(下待)하소서, 저희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뭔.”
여명은 이토록 저자세로 일관하는 교인들의 태도에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잘못 엮였다는 느낌?
‘진성 스토커 보는 느낌인데….’
여명의 지인인 트로트 가수를 따라다니던 스토커와 마주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불온함보다 더욱 농후했다.
안 엮이는 게 상책이겠지만. 왠지 그랬다간 이들이 더 귀찮아질 것 같다는 느낌에 여명은 대충.
“음, 신탁 같은 거창한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말해주자면….”
오오오!!
“…음.”
여명이 해준 얘기는 짧고도 간결했다. 다만 그 간결한 얘기를 진정 신탁(神託)으로 여기듯 교인들은 여명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받아 적었고. 관심 없는 척하는 십칠마종과 마선오괴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얘기에 집중했다.
흑원이 강림하여 십만대산 전체가 무너졌다는 대목에서 아찔해하였고.
흑원과 백모신원이 박투(搏鬪)를 나누었다는 말에 대경실색했으며.
흑원이 십만대산을 재생하였다는 대목에선 실성마저 하는 이들이 나오더니.
교신과 모신이 같이 식사를 하였다는 말에 눈물마저 보였다.
각색하거나 호들갑을 떨지도 않은 덤덤한 얘기가 끝맺음을 내니, 교인들은 여명에게 절을 했다.
━감읍(感泣)하고 또 감읍하옵니다. 신인이시여…!
“…반응 한번 참.”
여명은 코를 긁적였다.
대충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하겠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고. 마교에 대한 거부감이 마구 올라오는 여명이었다.
이 동네, 참 자기랑 안 맞는 것 같다고.
“월.”
설기는 여명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낯부끄러워하며 대신 사과했다.
“됐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아니 그보다….”
“?”
“넌 말할 수 있으면서 또 개인 척하고 있을 거냐.”
“…….”
“얼씨구.”
이제는 묵비권마저 행사하는 설기였고. 여명은 어처구니없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 요망한 강아지 같으니.
여명과 설기가 말 없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여전히 사람들은 흑원의 흔적을 찾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래도 이 사부 말이 사실인 것 같은데?”
“재생? 그 얼토당토아니한 얘기가 진짜라고…?”
“나무를 봐라.”
“…아.”
생기(生氣)가 넘쳐난다.
마치 이제 막 뿌리를 개화하고 자라난 어린나무가 내뿜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고. 그밖에 십만대산 주변에 흐르는 호연지기가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듯했다.
“…이걸 몰랐군.”
흑원이 남긴 잔재가 이곳저곳에 있었거늘, 그걸 몰랐다는 부분에서 그들은 낯을 붉혔다.
절대고수 소리 들으면 뭐 하나. 바로 눈앞에 거인의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몰랐는데.
“너만 몰랐던 거 아니니 수치스러워하지 마, 영감탱이야.”
“솔직히 누가 믿겠어. 허허, 시공간(視空間)을 다스리다니. 말도 안 나오는구먼.”
“으음.”
입신에 오른 이후 어디 가서 주눅이 든 역사가 없는 그들이었거늘, 지금만큼은 자신들의 경지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이 정점.’
중원삼국의 정점이 가진 힘을 실감하며 무기력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목표가 높은 것은 좋은 일이지, 흘흘.”
“아직 오를 산이 남았구나. 끝도 보이지 않는 산이.”
“언젠가는 오른다.”
입신경에 오른 이들은 결국 무(武)를 좋아하다 못해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일지니.
그들은 새로운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눈가에 광명을 머금었다.
열망을 품은 어린아이처럼 열정을 태우는 이들이 있노라면, 반대로 냉정한 어른도 있는 법.
“그래, 흑원께선 잘 가신 겐가?”
“네, 듣기론 화과산(花果山)으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놀라는 것도 지치는구먼.”
“아는 곳이세요?”
“신지(神地), 혹은 신산(神山)이란 곳이라네. 듣기론 백모신원께서 태어나신 장소이며. 훗날 교신께선 백모신원을 기리기 위해 영토로 삼으셨다 들었거늘…, 허허, 전설이 사실이었구나.”
“으음….”
“왜 그러는가?”
“아니요. 그냥 좀 익숙한 이름이라서 말이죠.”
“?”
“그런 게 있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화과산이란 이름은 여명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현대인 중 서유기 좀 읽어본 양반들이라면 알법한 이름이었으니까.
‘손오공의 고향이 분명 화과산으로 아는데, 이게 우연일까?’
어쩐지 여명은 우연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저기, 혹시 백모를 부르는 다른 명칭이 있나요?”
“명칭?”
“네에, 그…, 미후왕이나 투전승불 같은?”
“허허, 자네 신교의 역사서에나 나오는 백모신원의 또 다른 이름을 잘 아는구먼. 웬만한 역사가들이 아니면 모르는 이름인데, 그 이름을 알다니, 역시 백모신원의 지기지우라고 할 만하구먼.”
“…….”
그런 지괴의 확답과 같은 발언에 여명은 어처구니없다며 헛웃음을 삼켰다.
‘찐이었냐?’
TS손오공이라니….
‘참 나.’
여명은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흑원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 무엇인지 말이다.
‘답을 얻고 싶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란 거구나.’
━우오!
착각일 테지만. 그의 귓가로 흑원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 * *
흑원과 백모신원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여명에 대한 불만과 의혹을 어느 정도 풀자마자 흑원은.
-우오오.
뜬금없이 강림했을 때처럼, 또 뜬금없이 사라지려 했다.
그야말로 벼락이 한 번 번쩍거리며 그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다시금 벼락이 되어 자취를 감추려는 흑원이었다.
-제우스냐고….
-월.
-사, 사장님.
다만 제우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바람둥이가 아닌 오로지 한 여자만 일편단심 바라보는 순정남이란 게 극과 극의 다른 점이 아닐까 싶었다.
-우오오.
-네에, 백모도 잘 가요.
-우오!
-…아, 오늘 저녁에도 온다고요.
그만큼 먹고도 다시금 천산까지 찾아온다는 백모였고. 여명은 쓰게 웃었다. 저런 소리 하면 분명….
-우오오….
-저 좀 억울합니다만.
경고성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흑원에게 억울하다며 소리쳤지만, 흑원에게 자신은 도둑놈에 불과했다.
기껏 전심전력을 다해 요리를 만들어 점수를 따면 뭐 하나, 이토록 연적 취급을 받는데.
대놓고 자신은 고릴라가 취향이 아니라고 하면 백모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으니 당당히 말할 수도 없고….
-우오오!
…아, 마음 읽지, 참
취향이 아니란 발언(속내)을 듣고 ‘내 아내한테 안 반한다고! 이런 썩을 자식이…!’ 하며 대노(大怒)하는 흑원이었다.
말 그대로 좋다고 해도 문제고, 싫다고 해도 문제인 상황.
-답도 없다.
-우오!
그런 여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모는 여명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한 손에는 보석을 꺼냈다.
늘 그렇듯 밥값이라며.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 안 줘도 된다니까 그러네요.
-우오?
-우오!!
-…아니, 과해서 안 받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충분하고요.
‘감히 우리 아내가 준 걸 안 받아!’라고 화내는 흑원에게 여명은 변명 아닌 변명을 꺼냈다.
이미 백모신원에게 보석 중 다이아몬드만 스무 개가량이 넘는 형국이었다.
그것도 하나 같이 주먹 크기만 해서 시중에 풀렸다간 보석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들밖에 없으니, 원.
여명으로선 더 이상 보석은 사양하고 싶은 바였으나, 흑원에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제 아내의 성의를 안 받는다는 것이 괘씸할 뿐.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흑원님은 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화나시는 거죠?
-우오!
-숨도 안 쉬고 긍정하시네….
여자의 질투보다 남자의 질투가 더욱 끈질기고 집요하다는 말을 영감님한테 들은 적이 있긴 했으나, 직접 겪어보니 영감님의 말보다 수십 배는 껄끄러웠다.
그래도.
-…우오.
흑원은 밥을 먹은 후 ‘잘 먹었다’고 말해주는 이였고. 여명에게 말했다.
-우오오.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오.
-…??
흑원은 아내 대신 밥값을 계산한다는 듯 여명의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발언을 하였다.
여명은 저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헤맸지만. 흑원은 이 정도면 밥값은 다하였다는 듯, 백모를 껴안고는.
-우오.
콰르르릉!
검은 벼락이 되어 찰나의 순간만에 사라졌다.
-뭐, 뭐, 이런 제멋대로인 양반이 다 있어…?
여명은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상태로 헤어진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고. 그러면서도 흑원이 남긴 말이 신경 쓰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네가 가진 것들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황룡을 만나라’니…, 저게 무슨 뜻이야?
여전히 알쏭달쏭한,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로 신탁(神託)과 같은 계시를 들은 여명은 두 눈을 끔뻑거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런데 있잖아.”
“월?”
“…황룡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가 있나?”
“……멍.”
“그렇지?”
신탁을 내려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거….
‘난이도 실화냐고.’
여명은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받은 밥값 중 가장 처치곤란 하다며.
tmi후기.
-여명이 흑원에게 해준 타코는 훗날 흑원신교를 넘어 흑원국 전체에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여전히 자연주의 요리를 중요시하게 여기지만. 유일하게 타코만은 신이 인정한 요리라고 여기는 분위기라 볼 수 있다.
-특히 여명 같은 경우에는 한술 더 떠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동상이 세워지고. 성화의 화신(化身) 소리를 들으며 중원삼국 역사에 길이길이 그 이름을 남긴다.
-여명이 자신의 동상을 보게 되는 건 앞으로 30년 후의 일이며. 철거를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철거하지 못한다.
-하필이면 동상은 구리로 만들어진 거대 동상이란 사실에 수치스러워하며, ‘내가 수령 동지냐고….’ 하며 스트레스를 적립하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