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백세지사(百世之師)(3)
우공이산(愚公移山).
뜻을 풀이하자면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지만. 어떤 글에도 그 속뜻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를 좀 더 깊게 해석하자면.
‘우직하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산조차 옮길 수 있다는 거지.’
쿠웅!
여명은 딱 9,900구에 해당하는 태엽인형을 완성하며 크게 한숨 쉬었다.
“드디어 끝이 보이네….”
남은 30구만 만들면 주어진 수량을 모두 채우는 것이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진짜 힘들었어.’
대략 15일.
여명이 여기 붙잡혀 있던 시간이었고. 9천 구의 아바타를 조립하는 데 소비한 시간이기도 했다.
보름간 붙어있었고. 대략 그동안 식당을 쉰 격이니, 자영업자 입장에선 이 얼마나 손해인지 모를 것이다.
그래도 식당을 쉰만큼 얻은 게 없던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더라고.’
자화자찬이 아니라, 현 상황이 그러했다.
원래 아바타, 아니 인공의체를 모두 조립하는 데 들어갈 예상 시간은 6~7개월이었다.
하루 최대 5, 60개가 한계였으니 반년도 더 넘게 이 짓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명은 장사하는 사람이었고. 도저히 이 짓을 반년 동안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코피 쏟을 각오로 해본다, 내가.
-월?
-도핑 좀 해보려고.
-??
지천에 널려 다니는 영약과 방대하다 못해 압도적인 기력. 그리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단순노동의 숙련도까지.
여명은 이를 한번 믿고 막무가내와 같은 행위를 해보기로 했다.
특히 영약의 존재 유무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하루 5백 개까지 해본다.
-월!?
단숨에 평균 10배 가까이 조립을 늘리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여명은 정말 남들이 보아도 독하다 못해 무식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컴퓨터로 따지면 구식 컴퓨터로 코인 공장이나 최신 게임을 돌리는 격이었다.
미친 행위였으며. 도무지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으나, 여명은 도전했다.
설기는 그런 ‘주인이 장렬하게 산화할 줄 알았다’고 예측하며 미리 명복을 빌어줬으나…….
-이, 이게 되네?
-와, 왈왈?
여명과 설기는 기막히게도 동시에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성공한 것이었다.
지치거나 두통이 욱신거릴 때마다 영약 도핑을 무한히 공급받고. 연산 능력이 부족하여 헷갈릴 때면 설기가 훈수를 두며. 끝으로….
-나, 왜 이렇게 잘해?
-왈….
-얘, 얘기가 그렇게 되나?
여명의 기능은 구식이 아니었고. 뜻밖에도 ‘최신식(最新式)’이었다는 것이 그들이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여우님의 설명에 의하면.
-호오, 아무래도 그러한 가혹한 행위를 견뎌낼 잠재 능력이 그대에게 있었던 것 같구나. 역시 본녀의 벗!
라고 하시더라.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 여명도 그 진가를 드러냈을 뿐이란 여우님이었고. 여명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납득하고 말았다.
-나, 나 좀 대단했구나.
-월?
-크흠, 내가 없는 말한 건 아니잖아.
-왈!
-…그래, 나 재수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찐따 같은 발언일 수도 있지만, 불혹을 바라보는 아저씨에게도 아직 잠재력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사뭇 감동적이면서도….
-노동에 쓰고 있네….
거하게 막노동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째 처량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재능 낭비가 아닐까 싶었으나, 낭비하면 또 어떻겠는가.
-능률만 좋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하루 500구, 아니 갈수록 늘어나며 기어이 1,000구 이상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후배, 아니 후배님. 인정하겠네. 후배님이야말로 인공의체의 신이라네, 허허!
-별로 안 기쁩니다, 그 별명.
삼국 최고의 기환학사에게 막노동의 신(神)이란 칭호를 하사받게 되었다.
‘왜 이렇게 욕 같지?’
이상하게 저 칭찬이 ‘최고의 노예’ 혹은 ‘가성비 좋은 일꾼’ 등으로 들리는 건 여명의 착각이 아니리라.
그렇게 현재.
약속했던 9,900구가량의 인공의체를 모두 완성하여 주니 천의각의 장인과 학도(學徒), 학사 등이 모두 경이로운 눈으로 그를 보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되는구먼.”
“이게 돼?”
“…되는 거였구나.”
……어쩐지 듣기에 따라선 하지 말라고 맡긴 것을 성공시킨 느낌이었다.
여명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만박자 어르신,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 가상전쟁 하는 데 의체 일만 구 필요한 거 맞긴 해요?”
“맞긴 하다네. 다만….”
“…왜 불안한 감은 틀리지 않는지, 원.”
말꼬리를 흐리는 만박자의 말만 들어도 여명은 가상전쟁이 단지 인공의체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도 있음을 깨우쳤다.
“내가 왜 이걸 늦게 알아서 그 개고생을 했는지, 원….”
“월?”
“…아니, 그건….”
‘진짜 몰랐냐?’는 설기의 게슴츠레한 물음에 여명은 입을 닫아갔다.
어쩌면 마음 한편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인공의체 9천 구가량을 만드는 일은, 만박자가 자신을 황성에 보내지 않으려는 ‘배려’였음을.
하지만 어느 순간 만들다 보니 할 만했고. 자신이 고생하는 만큼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멈출 수가 없더라.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한텐 다시 세상이 들리도록 해주고.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한텐 다시 세상을 보여주고. 다리가 없는 사람한테 다시 다리를 주고.’
여명이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힘이 누군가에게 [기적(奇蹟)]을 선사한다는 점이 눈앞을 가리는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있기 마련이었다.
봉사자들이 괜히 평생을 바쳐 사람을 돕는 게 아니란 걸 이 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달까?
참으로….
‘하아, 이런 내가 싫다.’
여명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호구 같은 점을 타박했다.
“허허, 호구라니, 내가 봤을 때 자네 같은 의협의인(義俠義人)이 없다네. 한데 만약 자네를 어리석은 우자라고 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사람이라네.”
“어째서요?”
“당연하지 않은가.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호의(好意)가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라네. 가족 혹은 친지가 없다면 그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만약 제힘만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확언하는 이가 있다면 그자는 몸만 큰 아이일 뿐일세.”
“……음.”
여명은 만박자의 답변이 가슴 속에 깊이 와 닿았다.
현묘하진 않지만. 큰 핵심을 찌르는 명언이 아닐 수 없었으며.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 또한 결국 무수한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마찬가지이니.
여명이 한결 표정이 풀리자 만박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된다네. 결코 스스로를 비웃지 말고. 어리석다 하지 말게. 자부심을 가지고 뜻을 바로 세운다면 그 어떤 풍랑(風浪)과 겁박에도 꺾이지 않을 게야.”
“…하하, 그렇게 말하니 마치 선생님, 그래 교사 같으시네요.”
“소싯적 학당에서 애들 좀 가르쳐 본 경력이 있다네, 흐흐!”
유쾌하기 짝이 없는 양반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몇 마디 말로 마음 한구석 찜찜함을 없애주는 것은 감사했고. 여명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 좀 쉬운 놈일지도?’
저런 말 좀 들었다고 간단히 넘어가 버리는 자신이 황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그래도.
‘고마운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리고 요리사가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단순한 법이었다.
‘간만에 작품 하나 만들어봐야겠네.’
그동안 그 험한 노동을 하고도 손이 근질거리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천직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지표이리라.
“월….”
산책에 안달 난 강아지 같은 주인을 못 말린다며 바라보는 설기였다.
* * *
-마침 길일(吉日)이 이틀 코앞이었구먼. 안타깝게도 자네를 황성으로 보내줘야겠어, 쯧쯧.
-아, 안타까운 일이군요.
다행스럽게도 드디어 애초에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게 되었으니 행운인 일이었다.
다만 만박자의 반응을 들어보면 영 불안하기도 했지만.
뭐, 어쨌든 이틀이면 갈 수 있다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때 동안 사람들 먹일 거나 만들어보자.”
“호오, 무얼 만들려고 하기에 이틀이나 쓰려는 건지고?”
“이 양반들 하나같이 먹는 게 부실하잖아? 보셨죠, 몸 빼빼 마른 거.”
연구에 미친 양반들답게 음식을 단순히 허기만 채우려고 먹는 것이지, 맛이나 영양(營養)을 따지지 않는 천의각의 사람들이었다.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몸 버리기 딱 좋은 생활 습관을 그대로 실천하는 그들이었음이다.
뽀득, 뽀득.
“그러니 영양분도 풍부하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줄 생각이에요.”
“호오, 어떤 것을 말이더냐?”
“영양식 하면.”
화르륵!
“사골이죠.”
핏기를 모두 없앤 우골(牛骨).
또한 보통 우골이 아니라, 무려 영물 소리 듣는 소인 흑청각우(黑淸角牛)의 뼈였고. 흑청각우를 자랑하는 흑청색의 뿔도 같이 끓여주는 것이었다.
여우님 왈. 녹용처럼 먹을 필요 없이 뼈와 같이 끓여줘도 별문제가 없으며. 영양분도 온전히 뽑아낼 수 있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다.
“물은 담천수로 끓이고. 술은 매화홍주로 잡도록 하죠.”
담천수는 깨끗한 대웅산의 빗방울만을 받아 지하에서 정화된 물이었고. 매화홍주는 여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화산파의 선물이었다.
도수(度數)는 강하고. 향은 그윽하여 우골의 잡내를 적절히 잡아줄 터였다.
그리고 이를.
“여우님.”
“알겠노라.”
화아악!
그녀가 가볍게 꼬리를 튕기자 여우불이 장작을 태우며 가마솥을 달구었다.
이대로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하루 동안 푹 익혀줄 필요가 있었다.
원래는 한 번 끓여서 뼈의 붙은 찌꺼기랑 불순물을 없애줄 필요가 있었지만. 담천수가 그러한 불순물을 모두 가라앉혀 줄 터이고. 두 번 끓이는 행위로 흑청각우의 영양분을 무의미하게 만들 터이니, 단번에 끓일 필요가 있었다.
‘사골은 이제 장작이랑 물만 꾸준히 보충해주면 그만이고. 나머지도 시작하자.’
여명은 식도를 꺼내어 도축된 우육(牛肉)을 부위대로 썰어 나누었다.
사태, 양지, 안심, 등심 등등.
피 냄새조차 안 나는 신선한 우육은 생으로 먹어도 될 정도로 맛있어 보였고. 실제로.
찰싹!
부르르르!
“찰기가 미쳤네.”
소의 뒷다리 쪽에 해당하는 사태 부위가 엄청난 찰기를 보이며 부르르 떨었다.
당일 도축된 신선한 소고기만이 보이는 찰기였으며. 이를 뭉텅뭉텅 썰어내고.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장과 같이 먹으면…!
우물우물.
“…미쳤네, 진짜.”
“나도 주거라.”
“월!”
“안 말해도 주려고 했어요, 아 맞다.”
“음?”
“육회도 할 건데 드실래요.”
“뭐 하더냐. 이화(梨花) 열매도 팍팍 썰어서 내오거라!”
“하하!”
역시 육식 여우.
제대로 고기 즐길 줄 아신다.
tmi후기.
-원래 여명이 9천 구가량의 아바타를 안 만들었어도 가상전쟁을 할 방법이 있었다.
-백룡성 1만 장병한테 몽환의 술을 단체로 걸어서 진짜 가상현실 게임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만 보면 마냥 여명이 개고생한 것 같지만. 그래도 몽환의 술로 감각마저 느낄 수 없는 것에 반해 아바타가 있으면 감각 공유도 되니 아바타가 약 100배 더 효과적이다.
-또한 여명이 조립한 아바타들은 전쟁뿐만이 아니라, 반신불수이거나 감각이 없는 이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한 달 후, 약 일천 명가량이 새 생명을 얻었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