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백세지사(百世之師)(4)
소 한 마리를 잡는 날은 동네잔치 날이라고 했던가.
‘맞는 말이지. 버릴 부위가 하나도 없으니까.’
고기는 물론이고. 내장이나 지방, 힘줄과 머리, 꼬리 등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가죽은 가공해서 사용 가능했고.
‘극락왕생해라.’
여명은 흑청각우가 보여준 아낌없는 선물에 감사하며 합장했다.
백모가 잘 대해 주리라며.
‘걔가 반쯤 부처라고 했으니까, 아마 잘해주겠지.’
친구 좋다는 게 무엇일까, 아마 극락왕생 서비스도 있지 않을까 싶다.
짝!
명복은 충분히 빌어주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섭취할 차례.
타다다닥!
그가 본격적으로 칼질을 시작하자 고기들이 숭덩숭덩 썰려 나갔다.
통으로 이루어져 있던 고기들이 입에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로 썰렸고. 여명은 곧장 고기들을 분별하기 시작했다.
‘이건 숙성시키고. 이건 찜으로 하고. 이건 다지자. 아, 이 부위는 끓여야겠네.’
구이용, 육회용, 찜용. 볶음용.
이외에도 무수하게 고기들을 세분화시켜 적당히 고기들을 나누니 어느새 성인 장정 일곱 명을 합친 것만 했던 거대한 소고기는 여명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원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다섯 명이 달라붙어 하루 종일 고생해야 끝날 작업을 10분조차 걸리지 않아 끝내버린 퍼포먼스는 말 그대로 마술이나 마법과 같을 따름.
짝짝!
“훌륭하느니라!”
“월!”
두 여자가 손뼉, 아니 발바닥으로 박수를 보냈고. 여명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훌륭하다는 게 제 솜씨를 보고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고기가 훌륭하다는 거예요?”
“…두, 둘 다이니라.”
“월, 월.”
“…고기구먼.”
하여튼 식탐 넘치는 2인조 같으니.
여명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둘의 반응이 유쾌한 건 인정하는지 재빨리 요리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요.”
“오오오!”
“왈왈.”
육회. 어떤 이들은 육회무침이라고도 부르는 요리를 빠르게 내오니 미곡왕과 설기는 기뻐했다.
흔히 간장이 주(主)가 되는 경상도식과 고추장이 주(主)가 되는 전라도식으로 나뉘는 육회무침이었고. 여명이 지금 만든 건 경상도식 육회무침이었다.
뭐, 고기가 워낙 좋아 간장은 넣지 않고. 참기름과 잘게 다진 양파, 소금 등만으로 맛을 낸 거긴 하지만.
“마늘은 여우님이 싫어하실 것 같아서 안 넣었어요. 다진 양파는 물에서 아린 맛을 뺏으니까 좋을 거예요.”
“후후, 그대는 역시 본녀의 입맛을 잘 알아.”
“월.”
“…네 건 마늘 넣었어.”
“멍!”
“……너 솔직히 말해. 중원삼국이 태생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났지?”
비록 재료는 얼마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는 결코 대충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기의 신선함이 좋으면 좋을수록 간단하게 맛을 내는 게 더 맛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고. 지금이 그러할 뿐인 거지.
‘이 정도면 소금에만 버무려도 맛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입으로 육회무침을 넣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탄력과 감칠맛이 혀를 감쌌다.
참기름과 소금의 맛은 그저 다 된 밥상에 올라간 숟가락에 불과했고. 양파는 그저 식감을 더해주는 조연이었다.
그나마 육회무침에서 활약하는 것이 있다면.
아삭!
“이화 열매가 참으로 달고 맛있구나, 후후!”
“저번에 수확한 거예요.”
아삭하기 짝이 없는 이화 열매, 그러니까 배(梨)였다.
최근 천산에서 수확한 배였고. 기대보다 알맹이는 작지만. 과일이 작을 경우 단단하고 알찬 것처럼. 천산에서 수확한 배는 아삭함이 좋고 수분이 풍부하며 달기는 미치도록 달았다.
육회를 먹을 때 배와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먹는 사람이 있듯, 여명이 정갈하게 채 썬 배는 먹음직스럽다 못해, 실제로 먹으면 그 감동이 황홀했다.
“그대여, 항상 말하는 거지만 이 배는 모두 본녀에게 줘야 한다. 결코 그 새대가리 계집애에게 주는 일이 있어선 안 되느니라!”
“…음식 가지고 그러는 건 안 좋은 일이에요.”
“본녀가 다 구매한다고 했지 않느냐!”
“하하….”
그는 확답을 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여우님 고집은 알겠지만. 배를 어찌 다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어색함을 회피하고자 여명은 자꾸만 음식을 내었다.
“육회 먹은 다음이니 가볍게 육전 좀 했습니다. 마침 배추도 싱싱한 게 있어서 배추전도 했고요.”
“…요망한 것.”
미곡왕은 여명을 게슴츠레하게 노려보다가도 먹음직스러운 육전과 배추전, 그리고 배추와 무, 부추 등을 사용한 다양한 겉절이를 보며 입맛이 절로 다셔졌고. 음식에만 집중해야 했다.
‘참으로 요망한 요리로다.’
숙수가 요망해서 그런가?
관심사를 요리에만 집중시키는 데 성공하며 여명은 다시금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마교 이 양반들 싱싱한 걸로 보내줬네.’
전날 인연이 닿은 마교는 여명에게 자꾸만 ‘공물(供物)’을 보냈는데, 이게 마냥 부담스러워 거절하고 싶다가도, 보낸 공물을 확인하니 차마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실하다, 실해.”
“월!”
해산물과 과일.
과일의 신선함과 당도 등이 어디 동남아나 지중해보다 더욱 우월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흑원국의 식자재였고. 요리사로선 도저히 이를 지나칠 수가 없는 법이었다.
특히.
“대하(大蝦)가 뭐 이렇게 예쁘니.”
홍옥대하(紅玉大蝦).
이름 그대로 마치 루비가루를 뿌린 것 같이 아름다운 색을 내는 것이 스페인의 진홍새우(Carabinero Shrimp)와 비슷했지만. 반짝이를 뿌린 듯한 색감은 홍옥대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색감뿐만 아니라.
후욱!
“음! 달다.”
새우 특유의 감칠맛과 녹진한 풍미도 대단하지만. 살짝 끝에서 나는 단맛은 군밤이 연상될 정도로 깊고도 진중한 단맛이 있었다.
이 밖에도 신선한 참치와 연어, 조개 등의 다양한 어패류(魚貝類)가 있었지만. 그 무엇도 이 새우보다 특별하진 못했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해산물들을.
“생으로 먹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영양 보충으로 찜이 좋지.”
무엇보다 중원삼국의 해산물에는 어떤 기생충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무림인 양반들이야 기생충 있어도 삼매진화로 태워버리지만.’
기환학사같이 연약한(?) 양반들은 그런 재주가 없으니 말이다.
여명은 그렇게.
“우차!”
비장의 무기를 꺼내며 히죽거렸다.
‘놀라려나?’
지금껏 놀라기만 했던 입장이 아닌, 반대로 그들을 놀라게 만들 수 있을지 기대하며 여명은 활짝 웃었다.
* * *
“맛있구먼, 참으로 맛있어…!”
“몸이 건강해지는 것 같구먼, 허허. 젊은이의 정성이 가득 깃들어서 그런가?”
“아니아니, 실제로 건강해지고 있는 것 같네만? 이거 대체 원리가 어찌 된 겐가!?”
“그거 관찰만 하고 안 먹을 거면 나 주게. 아주 입에 착착 감기는구먼.”
“……자네 죽고 싶나?”
여명의 의도는 이미 진작 먹혔던 것처럼 천의각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돈은 많이 벌지라도 사치와는 멀게 사는 천의각일뿐더러, 누군가가 그들의 건강을 생각하여 이토록 음식을 해주는 경우도 처음이었으니까.
이미 이런 정성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할 만했지만.
“후우! 맛이 더 감동적이군.”
만박자의 말대로였다.
정성보다 더욱 감동적인 맛은 심금을 울릴 따름이었고. 모든 이들에게 미소를 깃들게 하기 충분했다.
‘놀라운 일이야. 이런 방식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거구먼.’
일평생 음식이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요소만으로 여기던 만박자였다.
한데 후배의 요리는 마치 이리 말하는 듯했다.
-요리는 허기만 달래는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달래주는 겁니다.
마치 지금껏 모르던 새로운 가르침을 받는 듯한 기분.
‘허허, 나도 아직 부족하군.’
세상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부했는데, 아직 이리도 모르는 미지(未知)가 넘쳐난다.
다만 이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즐거워할 일임이 분명했다.
아직 연구해야 할 것이 넘쳐난다는 뜻이니.
‘즐겁구먼, 즐거워.’
그러면서도 궁금해진다.
후배의 요리가 가진 이 ‘특별함’은 어디서 요인하는지.
‘분명 기환술임은 분명할 텐데, 도저히 그 원리를 모르겠구먼.’
짐작 가는 부분은 있다.
식재(食材)라 불리는 것들에게 기력을 불어넣어 식재의 원형(原型)이 되는 가축과 과실 등에게 생기를 되찾아주고. 여기서 더 나아가 불어넣은 생기가 기환학사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변하는 것일 터.
하지만….
‘이런 기환술은 도저히 인간의 재주가 아니다. 생물이 가진 본질을 바꾸는 격일 터인데, 이런 건 마치….’
신수(神獸)의 힘 같지 않은가-?
“…흠, 너무 과대 해석인가?”
인간이 신수의 힘을 가지는 건 원리상 불가능(不可能)한 일일 테니.
정말 신수에게 힘을 받을지라도 몸이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탐구심을 발휘하며 여명의 요리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만박자였으나, 안타깝게도 만박자의 집중력은 끊길 수밖에 없었다.
화아악!
킁킁!
“…호오.”
그의 집중력은 분명 삼국제일이지만. 삼국제일의 집중력조차 뜨끈한 김과 함께 올라오는 매력적인 향 앞에는 무색하였다.
매혹적이다 못해 감미롭기까지 한 그것은.
“노송(老松)?”
노송나무의 향.
즉, 편백(扁柏)이었다.
“모두 맛있게 드시고 계시죠?”
지금껏 음식을 만드느라 바빠 여급이 음식을 날랐는데, 조금 여유가 난 것인지 여명이 직접 모습을 보이며 그들의 만족도를 물었고. 만박자와 다른 이들은 기꺼이 찬사를 보냈다.
“덕분에 말일세.”
“식선이란 이름을 듣고 오만하다고 여겼으나, 자네는 충분히 오만해도 된다네.”
“자네야말로 요리의 선인이야, 허허!”
“…놀리지 좀 마요.”
여명은 쓰게 웃었다.
하여튼 자신이 아는 영감님들은 왜 이렇게 자신을 놀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의 만족스러움은 진심처럼 보였고. 이 부분은 여명도 흐뭇했다.
‘반나절 전만 해도 안색이 창백했던 양반들이, 이제야 좀 사람 같네.’
돈도 있는 양반들이 피골이 상접하여 어찌나 보기 싫던지.
다행히 배불리 먹이고 나니까 드디어 얼굴에서 윤택이 나고. 살이 올라와 멀쩡한 사람처럼 보인다.
“한데 이제 그만 줘도 될 것 같네.”
“맞네, 배가 불러 죽겠어.”
“이제 더 이상 넣을 자리가 없다네, 흘흘.”
“…어떻게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네.”
워낙 안 먹고 사는 양반들답게, 위장 용량도 참 작다 싶었다.
그래도 여명은 걱정 없었다. 이들은 지금부터 다시 배가 고파질 예정일 테니까.
“그래요, 그거 아쉽네요.”
취이이익!
“이제 시작인데.”
“……”
순간 그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매력적인 노송의 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가마솥?”
가마솥에서 풍겨오는 범상치 않은 내음에 절로 시선이 집중된 것이었지.
여명은 그들의 관심사가 쏠리건 말건, 가마솥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대략 4시간 이상 팔팔 끓인 가마솥을 맨손으로 만진다는 것 자체가 미친 행위였으나, 문제는 없었다.
비싸게 주고 산 내열 장갑이 확실히 돈값을 했으니까.
그러니…!
‘문제없이 이 짓도 할 수 있겠네.’
흡, 하고 여명은 힘을 주었다.
지난날 두부를 저으면서 깨달은 오행(五行)의 깨달음.
특히 화(火)와 수(水)와 같은 요리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에 있어선 그 깊이가 남다르다 확언해도 되는 바였고. 여명은 가마솥 안 사골에 집중했다.
고오오오-!
심상치 않은 흐름이 가마솥 안을 감돌며 집중되었는데, 그 광경을 보던 기환학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도 그럴 게.
“…뼈, 뼈를 우려내는 데 기환술을 그렇게 쓰는 겐가?”
사골을 우려내는 데 저토록 ‘거창하게 기환술을 쓴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라.
낭비도 저런 낭비가 없었다.
후우욱!
“!!!?”
그러나 곧이어 가마솥을 뚫고 올라오는 냄새에 그들은 다시금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 했다.
무엇인가, 이 냄새는…!?
뭐가 이토록.
“꿀꺽…!”
먹음직스럽단 말인가.
그런 그들을 향해 여명이 물었다.
“음, 일단 물어볼게요. 더 안 드실 거라고요?”
“…….”
“그럼 먹을 사람만 손…, 아. 안 들어도 괜찮으세요.”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배가 꽉 찼다는 이들뿐이었지만.
꼬르르륵….
다시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는 듯이.
여명의 눈앞에 손을 안 든 사람은 없었고. 요리사는 그 모습이 한없이 만족스러웠음이다.
tmi후기.
-중원삼국 세계관에서 고수는 기생충을 먹어도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삼매진화로 없애면 그만이니까.
-중원삼국에서 의사가 되려면 대부분 삼매진화를 기본적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
-즉, 기본적으로 중원삼국 의사는 절정급 고수란 의미이다.(다만 내공은 익혀도 무공 자체는 익히지 않은 편인지라 약한 편이다, 그래도 내공은 많아서 바위는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
-삼매진화가 필수인 이유는 삼매진화가 세균, 기생충, 염증, 지방도 안전하게 태워주기 때문이고. 웬만한 병은 문제도 아니다.
-만약 중원삼국 의사가 현대로 건너가면 건강클리닉이나 다이어트 의학 등으로 떼돈 벌 것이다.
-참고로 중원삼국에선 암이나 뇌종양도 삼매진화로 태울 수 있지만. 명의(名醫)급 의원은 돼야 하고. 명의급부터는 초절정이며. 신의부터는 화경이다.
-그래서 중원삼국에서 의사한테 대들면 안 된다. 대들었다가 잘못 맞으면 그대로 인생하직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