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여명 표류기(2)
천산.
곤륜과 마도본산의 중간지대이자.
누군가는 기연의 땅. 혹은 인외마경라 불리는 장소.
물론 기연이니 뭐니 해도 중원삼국의 금역(禁域)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위험지대이기에 죽고 싶은 바보가 아니라면 절대 오를 일은 없을 테지만.
한데 하필.
“내가 그 바보가 됐네요….”
천산에 스스로 오른 우자(愚者).
기예화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하고 고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쁘게 풍광 하나는 삼국의 보배라는 향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기분이 묘하다.
천산에 노괴들만 아니었다면 개척할 맛이 날 터인데.
‘흑점한테 투자 좀 받고. 객잔이랑 기루 좀 세운 다음, 금천상단한테 공급만 잘 받는다면 아주 좋겠네요.’
풍수지리만 보아도 재운(財運)이 마르지 않을 기름진 땅이 아닐 수 없다.
‘쩝, 그럼 뭐 해요. 어차피 화중지병(畵中之餠)인 것을.’
묵화(墨畫) 속 전병.
흔히 여명 오라비가 어차피 못 먹는 감이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어휴…!”
기예화는 속이 쓰린지 입맛을 다셨다.
오라비가 있었으면 쓰린 속 좀 달래게 주전부리나 좀 만들어 달라고 했을 텐데, 하필 자리에는 없고.
“하아, 오라비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리 투덜거리고 있던 중 그나마 기예화를 즐겁게 하는 대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 소저,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얼른 일을-.”
“-소저가 아니라 언니(姉)라고 부르라고 했죠, 내가. 혹시 북해에는 웃어른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법도라도 있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절대 저는 기 소저에게 함부로 대할 생각이 없습….”
“또 언니라고 안 부르네요?”
“흐읍!?”
“풋! 농이에요.”
“너, 너무하십니다….”
“오호호!”
향주의 동생들에게선 볼 수 없는 참신하고도 청순한 반응.
기예화는 우물쭈물하는 북궁린의 반응이 세상 재밌는지 흐뭇해하며 다시금 놀려댔다.
“농이긴 했지만. 언니라고 부르라고 한 건 진심이에요. 설마 여명 오라비의 의매(義妹)인 저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 아닐 테고.”
“그, 그게.”
“북궁 동생 그렇게 안 봤는데, 혹시 제가 서역인이라고 차별하는 건…?”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못 믿겠어요. 안 되겠네, 이거. 나중에 오라비가 오면 말해야겠어요. 북궁 동생이 얼마나 차별이 심한지.”
“그, 그건 안 됩니다! 자, 잘못했습니다…, 어, 언….”
“‘언’ 뭐요?”
“언……니.”
“…뭐, 나름 발전했네요, 후후!”
더욱 재밌는 건 북궁린은 몇 번을 놀려도 속아서 자신이 농락당하는 걸 모른다는 것이리라.
하염없이 진지하여 더욱 귀여웠고. 기예화는 능청스럽게 북궁린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히익!”
“머리 정돈해주는 거예요.”
쑥스러워하는 북궁린의 반응을 즐기며 자꾸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기예화는 슬쩍 손을….
따악!
“아악!”
“딸아. 걔한테 개수작 그만 부리고 일 좀 해. 이 사부한테 받아먹은 거 다 토해내고 싶지 않으면.”
“…정작 아빠는 한 번도 일한 적 없으면서….”
“불만이면 절대고수가 되던지.”
“…….”
“눈으로 욕해도 다 안다.”
“꺄악!”
따악!
기예화의 이마에서 다시금 별이 보였다.
기예화가 천산까지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여명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를 대신하여 한동안 [밥심]을 지켜줬으면 하는 부탁을 받고 여기 있는 것이었지.
다른 이들도 많은데 왜 하필 기예화냐고 할 수도 있으나, 그녀만큼 적절한 인선도 없었다.
일단 천산의 거주민 중 나름 입지적인 인물인 악진보의 딸이며. 악진보 못지않은 고수들인 삼존과도 안면이 있으니, 다른 고수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을 터이고.
무엇보다 여명과 의남매(義男妹)로 맺어진 사이기도 하여 은거자들에게도 마냥 남이 아닌 바였다.
뭐, 위에 언급한 이유는 대부분 백효가 재미로 읊은 명분일 뿐이고. 실질적인 이유를 꼽으라면.
-우리 밭이랑 요리할 때는 기력이 필수거든, 네가 좀 고생해줘라.
사실상 기력 셔틀이란 말이었으나, 기예화의 자존심상 이는 그저 농으로 치부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후우, 진짜 제가 기력 노비(奴婢)도 아니고….”
농사는 짓지 않더라도 음식을 해야 하는 건 농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왜 이리 늦느냐.”
“이 사부라면 진작 다 했을 텐데.”
“느리구나, 느려.”
……눈앞에 인간들에겐 향주제일미란 권위조차 한없이 얄팍한 것에 불과했으며. 삼국에서도 그녀에게 대놓고 하대할 수 있는 인간들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기예화는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보이면서도 고분고분 음식을 만드는 이유기도 했음이다.
주르륵.
‘후우, 오라비는 진짜 이걸 어떻게 매일 하는 거죠?’
온종일 가무(歌舞)를 선보이며 지친 기색 하나 없었던 그녀였거늘, 한두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고 벌써 체력과 기력이 빠듯해졌다.
미리 만들어진 선식을 덥히고 굽는 간단한 행위일 뿐인데도 이토록 기력을 빨아들이다니….
최근 봉마림 등에서 대량의 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진즉 쓰러지고도 남았을 터.
‘선식이란 게, 이런 거였군요.’
이 선식이란 것. 법구와 닮았다.
기력을 아주 쭉쭉 빨아먹는 요망한 법구와.
‘이러니 오라비의 음식에 사람들이 환장하나 보네요.’
법구를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격인데, 백 년 묵은 봉황산삼(鳳凰山蔘)을 물처럼 마시는 것과 무얼 다를까.
허나 기예화는 설령 선식의 비법을 알아내는 일이 생길지라도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천만금이건 억만금이건 벌어들일 수 있어도 자칫 전신의 기력을 모두 빼앗기고 목내이(木乃伊)가 될 판인데, 어찌 엄두가 나랴.
그런 뜻에서 기예화는 이 짓을 하루 온종일을 넘어 삼 일 밤낮을 새고도 쌩쌩하던 오라비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진짜 괴물, 아니 영수 같은 오라바이에요.’
진짜 기력이 얼마나 방대하면 이런 기환술이 가능할까 하고.
“예화야, 그만 노닥거리고 안주 좀 주거라.”
“…노닥거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감탄하고 있는 거예요, 천 숙부.”
“노닥거렸다는 말이구먼, 무슨.”
“……하아, 제가 앓느니 죽죠.”
감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듯 그녀의 속을 긁어대는 천리후와 위현악을 보니 여전하다 싶다.
말만 숙부지, 옆집 객잔 아저씨보다 못한 양반들이 아닐 수 없다며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으나, 그녀는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향주제일미라는 이름을 그냥 얻었겠는가.
그녀의 정치력과 연기력은 심후한 내력을 자랑했고. 입신의 고수에게조차 통하는-.
“내숭 그만 떨거라.”
“우리 앞에서 극(劇)을 하고 싶으면 백 년 후에 오거라, 흘흘.”
…역시 이 노인네들은 자신의 천적임이 분명하다.
* * *
기예화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몸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요. 오라비가 만들어둔 계(鷄)조림이에요.”
“촌스럽긴. 찜닭이라고 해야지.”
“……그냥 좀 조용히 드세요.”
여명이 재워놓은 찜닭은 흔히 간장으로 만든 것뿐만이 아니라, 맛이 무려 열 가지나 되었다.
기예화는 그 모든 것을 먹어보았는데, 하나같이 맛나기 그지없어 정신없이 먹다가 3근이 늘어나는 굴욕 아닌 굴욕마저 겪었으니!
‘왜 이리 맛있어서 원.’
적색으로 빛나는 맛이 네 가지.
백탕(白湯)처럼 보이는 두 가지.
묵색으로 빛나는 것이 두 가지.
적백(赤白), 혹은 묵백(墨白)으로 빛나는 것 두 가지.
맛이 같은 것이 없었고. 어떤 것은 맵고도 고소했으며. 또 어떤 건 적색으로 빛나고 있음에도 맵기는커녕 오히려 감칠맛이 넘치는 것도 있었다.
색마다 그 개성이 확실한 요리가 아닐 수 없었고. 가히 감탄이 나오는 요리가 아닐 수 없으니.
‘분명 같은 조리법이거늘, 사소한 재료를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이런 총천연색의 매력을 내다니, 역시 오라비야.’
간단한 요리일지라도, 그 요리를 비범하게 만드는 사람.
식선이란 별호를 처음에 누가 붙였는지 몰라도 참으로.
‘오라비한테 잘 어울리네요, 후후.’
제 오라비에게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음식을 내었다.
분명 노인들도 같은 평을 내놓으리라 여긴 것이었….
“쩝, 이 맛이 아니야.”
“…에잉! 입맛만 버렸구먼.”
“허허, 그래도 음식을 남기지 말게나. 이 사부가 알면 화낼 게야.”
“……에이이잉!”
“…….”
허나 기대한 것과 다르게 은거자들의 반응은 미묘하다 못해 혹평이 가득했다.
못 먹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
“바, 반응이 왜 그래요? 여명 오라비가 해놓은 그대로 내놓은 건데?”
“…그렇겠지.”
“그, 그런데 맛이 없다고요?”
“……맛이라.”
…어허허.
어딘지 김빠진 탄산수와 같은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그들이 느끼는 씁쓸함이 전파되는 것 같다.
“맛이라, 그래 맛이야 이 사부가 한 찜닭의 맛이지. 하지만 이것은 ‘이 사부의 요리’가 아니구나.”
“네에?”
“이 사부의 요리에는 말이다…. ‘맛’ 이외에도 많은 것이 담겨 있단다.”
“…….”
……일순 입을 연 자운의 아쉬움이 진득한 발언에서 기예화는 무언가 깨닫는 게 있었다.
맞다. 오라비의 음식은 마냥 맛있고 몸의 활력을 주기에 대단한 것이 아닌, 어딘지 모를 ‘따스함’과 ‘즐거움’을 주기에 특별한 것이다.
마냥 성성이처럼 흉내 내어 만들어선 결코 만들 수 없는 특별함이.
‘아, 이분들은 마냥 오라비의 음식을 먹으러 오는 게 아니군요.’
은거(隱居)를 했다지만. 여전히 풍진강호를 그리워하는 은거자들에게 있어 여명이란 사내는 그들의 공허함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대리만족마저 시켜주는 멋진 벗(友)이었을 터.
그리고 그녀로서도, 아니 설사 중원삼국의 그 누가 올지라도 그를 대체할 수 없음이었다.
‘참 나, 설마 사내한테 패배할 줄은 몰랐네요.’
절세가인이 눈앞에 있는데, 멀리 떠난 사내보다 매력이 떨어질 줄이야….
기예화는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이 동네랑 나랑은 안 맞는 게 분명할 거예요.’
의문의 1패와 함께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여지는 기예화였으나, 한편으로 생각하고 만다.
…오라버니 보고 싶다고.
“…사장님.”
북궁린 또한 은거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전파된 까닭인지 서글픈 눈으로 창문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무 날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소식이 없으니….’
누군가에겐 겨우 스무 날일 수도 있지만. 북궁린은 마치 20년 같은 스무 날이 아닐 수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그를 보고 싶었다.
그가 만들어준 따스한 음식과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오늘따라 더 그립다며.
‘부디 무사히 돌아만 오시길.’
북궁린은 간절히 기도했다.
………
………
………
쏴아아아.
“…얼마나 지났더라.”
바다 한가운데를 돛단배처럼 떠다니며 여명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계산해보았고, 대략.
“‘반년’ 정도 지난 건가?”
바닷물밖에 없는 세상에서 표류하여 생존한 기간을 상기하며 여명은 무덤덤하게 시간을 세었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눈길로.
쏴아아아…!
눈치도 없는 파도가 일렁이며 여명의 마음에는 불온한 격랑(激浪)이 한없이 커져만 갔다.
tmi후기.
-여명이 있는 바다는 약간 영화 [인터스텔라] 개념이 도입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다행히 영화처럼 시간의 흐름이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며. 황룡의 세계인 탓에 나이도 먹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다시 언급하는 거지만, 기예화는 히로인이 아니다. 그냥 찐 의남매라고 보면 된다.
-최근 작가가 기예화와 가장 근접한 이미지의 여배우를 발견했는데, 이름은 [디피카 파두콘]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배우가 닮았을 뿐이지. 기예화는 좀 더 서양인스러운 외모와 금발머리, 피부도 백옥 같고. 여러모로 부분에서 압도적으로 매력적이다.
-혹시나 독자님들께서 생각한 기예화의 이미지가 있다면 댓글로 가르쳐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