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와요 무림식당-251화 (251/261)

251-여명 표류기(3)

끔뻑끔뻑….

퓨즈가 나간 전구처럼 여명은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여기 오고 나서 하루 온종일 잠만 자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하루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다.

“…이, 일어나야지.”

여명은 제 몸을 뒤덮는 수면욕을 가까스로 극복했다.

이렇게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며 나태(懶怠)와 무기력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200일 전에 그러다가 뭐 될 뻔했지, 진짜.’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제 자신이 그 얼마나 세상 한심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며 수치심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오늘도 가야지.”

이 지긋지긋한 바다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표류 521일째.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다 못해 청명하여 기분 나빴고.

─여전히 항구는커녕 무인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 * *

기환학사들이 열어준 차원문을 통과하니, 여명을 맞이한 것은 광활하고도 보석처럼 빛나는 백청해(白淸海)였으니.

-여기가, 황성?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만박자가 그를 다른 엉뚱한 곳으로 보내준 게 아닐까 의심마저 하였고.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어안이 벙벙하여 허탈함마저 느꼈었다.

허나 곧.

-…물이,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는 건가?

여명은 이 바다가, 아니 이 ‘세계(世界)’가 정상적인 곳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맨 처음은 바다의 맑음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태초의 바다가 있다면 아마 이러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이 바다는 바다지만, 사람들이 흔히 아는 바다가 아니었다.

다른 점을 대자면 수십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다른 점을 찾자면.

-…물을, 마실 수 있어.

그래, 이 바다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맑은 청정수(淸淨水)였으며. 염분조차 없어 여과할 필요도 없는 물일 뿐.

상식이 파괴당하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대량의 물이, 아니 대량이란 말이 무색한, 그야말로 무량대수(無量大數)와 다를 바 없는 물이 모여 있거늘, 어찌 이토록 맑을 수 있는 것일까?

흙이나 먼지 같은 침전물이야 얼마든지 가라앉을 수 있다고 치겠는데, 이 바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침전물이란 요소가 존재하지 않으며. 도리어 여명이란 외부인 때문에 더러워지는….

-…어?

다음 순간 경이롭게도 바닷물에서 빛이 났고. 여명은 아연실색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아앗!

-……여기 진짜 뭐야?

여명의 옷은 말 그대로 깔끔하게 반짝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물에 녹은 것도 아니고, 그저 완전히 대기 중으로 사라져 그 흔적조차 살필 수 없었으며. 여명은 다시금 깨달아야 했다.

아, 이곳은.

-그 어떤 더러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여명은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엘리스가 된 기분을 느끼며.

여명이 이 바다를 더욱 신비하게 느끼게 된 것은 목이 말라 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느끼는 강렬한 포만감 때문이었다.

-사, 삼 일은 굶어도 되겠네.

정확히는 일주일을 굶어도 멀쩡했다.

물 한 모금만 마셔도 허기짐이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포만감이 몸을 가득 채운다.

마냥 포만감이 드는 것뿐만 아니라, 여명은 제 몸이 좀 더 날렵해지고. 강건해지는 것을 체감했다.

육안으로만 보아도.

-배, 배에 웬 왕(王)자가…?

최근 세심공 수련조차 등한시하며 의체 조립에 열을 올렸던 탓인지, 근육이 빠지고 도리어 지방이 붙어가던 배였다.

한데 물을 마신 이후 이틀이 지났을 때 지방이 대부분 모습을 감추고. 잘 잡힌 근육이 보기 좋게 생겨났다.

복근만이 아니라, 등배근과 척추기립근, 허벅지와 옆구리, 팔과 다리 등에도 적절한 근육이 잡히는 것이 아주 뭐….

-…여기 물 팔면 대박이겠네.

포만감은 일주일이나 가며. 단백질이 없어도 근육이 생기게 해주는 바닷물이라니.

헬스인에겐, 아니 건강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겐 성수와 다름없을 터.

여명은 그제야 인정했다. 이 신비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바다가 황룡의 영역이란 것을.

-이런 곳이 절대 그냥 바다일 리는 없지.

비범한 것을 넘어 특별했고. 특별하다 못해 기적(奇蹟)이 밥 먹듯이 일어나는 황룡의 거주지.

즉, 이 바다 자체가.

-황성인 거구나….

하하….

여명은 아득하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 세상은.

-예상한 게 맞는 경우가 없어.

비정상이 오히려 정상적인 세상이라고.

* * *

이후로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처음엔 황룡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며 어찌 만날 수 없을까 싶었으나.

-역시 안 오네.

이름을 부르면 뭐 하겠는가.

황룡은 눈 코빼기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데.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쉽게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괜히 그분들이 뭐라고 한 게 아니지.

미곡왕과 백효, 심지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하다 못해 잠으로 모든 걸 허비하는 산묘마저 그가 황룡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기겁하며 말리기 일쑤였다.

한데도 좋게 좋게 풀리리라 생각했다면 그건 머저리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상상 이상이긴 하네.

여명은 쓰게 웃었으나,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집주인이 불러도 만나주지 않고. 모습을 꽁꽁 숨기고 있는다면 결국 할 일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지.

그렇게 여명은 황룡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헤엄쳐야 하려나?

기꺼이 물개가 되기로 했다.

뜻하지 않는 표류기, 아니 멀고 먼 알현기(謁見期)의 서막이었다.

* * *

표류 2일 차.

다행스럽게도 황룡의 바다, 쉽게 부르자면 황룡해(黃龍海)는 아무리 오랜 시간 물속에 빠져 있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이때만큼은 유쾌했는데, 아무리 장시간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어도 몸이 퉁퉁 불거나 차가워지지 않으니 오래 빠져 있는다고 해도 목숨을 잃을 위협은 없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좀 따뜻할지도?”

바다가 따뜻하다니.

이것도 좀 웃긴 얘기였다.

허나 이보다 더 웃긴 건.

“…밤(夜)이 없다고?”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명은 다른 의미로 경악해야 했다.

하늘에는.

“햇님이랑 달님이랑 썸 타냐고….”

해와 달리 서로를 마주 본 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동시에 떠 있었다.

그림 같은 아름다움이었지만. 저것이 뜻하는 바를 알기에 여명을 웃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밤낮이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표류 12일 차.

나무가 우거진 해림(海林)을 발견했다.

바다에서 자라난 나무의 숲이라니, 상상치도 못한 일이지만. 해와 달이 썸타는 걸 보고 있으면 이제 놀라는 것도 지칠 따름이며. 그저 무난하다 싶었다.

해수(海水)에서도 자란다는 맹그로브 나무일까 싶었으나, 사진으로 봤던 맹그로브 나무와 달라도 너무 달랐고. 야자나무와 대나무 등의 특징을 골고루 섞어 넣은 가냘픈 나무이다 싶다.

뽀각!

“…겨, 경도는 뭐 이렇게 약해?”

단지 손으로 쥐었을 뿐인데 이름 모를 나무는 스티로폼처럼 꺾였다.

무게도 가벼울뿐더러, 경도까지 약하니 어디다 쓸까 싶을 테지만. 이 나무가 여명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귀중한 보물의 발견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박이다!”

나무의 경도가 약한 덕분인지 손으로 부서트려 꼬아대니 드디어 새끼줄 비슷한 걸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가느다란 줄을 만들어 적당히 이리저리 다룬 끝에야.

“도, 돛단배다…….”

의체를 만들던 노력이 값진 것이었는지, 어검의 활용도가 엄청나게 늘어난 여명이었고. 덕분에 줄을 꼬아 배를 만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새끼줄로 배 하나가 만들어졌고. 드디어 물에 빠질까 두려워 쪽잠을 잤던 나날에서 안녕이었다.

“일단……!”

잠 좀 자자.

근 십 일 만에 제대로 된 환경에서 수면에 들며 여명은 이틀간 죽은 듯 잠을 잤다.

표류 20일 차.

여러 번의 실패와 도전 끝에 나무로 삼베옷 비스름한 것을 만들어 입는 것으로 여명은 드디어 원시인에서 다시금 문명인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사람 한 명 없을지라도 옷을 입지 않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더라.

역시 문명인에게 옷이란 건 소중한 자산-.

“-쩝, 자산이 있으면 뭐 하나 싶기도 하지만.”

여명은 제가 만든 옷과 배를 보면서도 기쁘지 않았다.

분명 보람도 있고 성취감이 있었지만.

“……외롭네.”

혼자 성취감을 느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혼자가 된 지 20일.

고독(孤獨)이 점차 여명의 가슴을 갉아 먹었다.

표류 32일 차.

혹시나 싶어 나무를 많이 수확해두긴 했지만. 황룡해에는 제법 해림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았다.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면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는 보였고. 그 이후로부터는 쟁여놓는 것을 멈추며 최소한의 목재만을 쌓았다.

어차피 많이 있어봤자 의미도 없을 테니.

“…설기가 있었으면 많이 부수고 다녔을 텐데.”

-월!

“하하, 그렇지.”

상상 속 설기는 혀를 내밀로 장난스럽게 돛단배를 뛰어놀았을 광경이 쉽게 연상된다.

같이 있었다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아니.

“외로울 틈도 없었겠지.”

표류 50일 차.

“…이건 인정해야겠네.”

여명은 자신의 귀환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인정했다.

충분히 식은땀이 나고 미치고 팔짝 뛸 사실이 아닐 수 없으나, 여명은 무덤덤했다.

50일간 지속된 항해가 그를 굳세게 만든 것인지, 그도 아니면 외로움 때문에 어딘가가 망가진 건지 모르겠으나. 호들갑을 떨며 소리친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음을 알기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생존본능처럼 유지되었다.

“방심하면 안 된다.”

여명은 방심이란 단어를 자꾸 되뇌며 자기암시를 걸듯 긴장감을 높였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황룡도 황룡이지만. 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어떤 선택지가 맞는지 모를 바다에서 자칫 몸만이 아닌 멘탈마저 표류했다간….

‘그때는 진짜 죽는다.’

여명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자칫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그는 어쩌면.

짜악!

“…이런 생각도 하지 말자.”

주륵.

여명은 제 뺨을 얼마나 강하게 후렸으면 입안이 다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정신은 번쩍 들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

사아악.

“…….”

─일순 소름이 돋았다.

“상처가….”

흔적도 없이 단숨에 사라졌다.

“…이거 설마.”

여명은 상상력이 풍부한 자신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상처가 회복되는 속도로 봤을 때, 이 세상에선 다쳐도 금세 낫거나 지워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라 친다면.

“……자해도 못 하는 거야, 이거?”

절대적인 생존(生存)은 보장해도 ‘죽음’만큼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 세상.

참으로.

“…존나 무섭네.”

여명은 이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이 처음으로 무서워졌다.

………

………

………

[그래, 꺾여라.]

번뜩이는 황금색의 용안(龍眼)이 여명을 직시하며 포기를 종용했다.

그것은 어떠한 기대도 담겨 있지 않았고. 또한 무심(無心)하여 무서웠고.

[이제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군.]

하찮은 미물(微物)이나 벌레를 바라보는 듯해 더할 나위 없는 서늘한 이질감만이 있었다.

tmi후기.

-황룡해의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수명이 20년 늘어나며. 몸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상태가 된다.

-이른바 게임 캐릭터가 레벨업하면서 몸이 완전회복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다만 한 번 먹었을 때만 허용되는 현상이고. 두 번째 먹어도 그저 포만감이 생기고 상처 등을 회복시켜줄 뿐이다.

-다만, 그러한 복합적인 효능 때문인지, 황룡의 바다에서 자살이나 자해 등은 불가능하다.

-바닷물에 빠져 숨을 못 쉴지라도 괴로울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

-물을 마시지 않아 허기가 생기더라도 공기 중 수분들이 영양분을 주기에 허기로 괴로울 뿐 죽지는 않는다.

-참고로 병도 안 생긴다.

-문명의 이기 등도 허락하지 않기에 모두 공기 중으로 분해되며. 어떠한 희로애락도 느낄 수 없는 장소이다.

-만약 정말 밉고 참교육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적절한 고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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