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와요 무림식당-255화 (255/261)

255-내 손안에 남은 것(4)

…바둑판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남은 건 다시금 손안에 들어온 용골과 저릿저릿한 황룡의 시선뿐이었다.

‘나 싫어하나?’

아니, 싫어하는 것보단 불쾌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뭘 했다고?’

저런 시선을 받게 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었고. 여명은 조금 억울한 감이 들락 말락 하려고 할 때, 황룡이 다시금 물었다.

[선택해라. 열쇠인가, 아니면 질문인가.]

“…….”

여명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고민할 것도 말 것도 없었음이다.

‘저 열쇠가 없으면, 어쩌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할지도 몰라.’

전날 천마가 말했지 않은가.

-원한다면 그대에게 일어난 신비한 현상을 억제할 수도 있을 터. 물론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겠지만.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었고. 당시에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저 용골은 촉매일지도 몰라.’

어쩌면 저 용골이야말로 그가 중원삼국과 현대를 오갈 수 있는 핵심 중 하나라고.

여명은 그렇게 여기고 말았다.

천의각이 여명을 황룡에게 보내주었던 [차원문]을 보며 감을 잡은 것이지만. 아마 여명이 중원삼국으로 통행 가능한 이유는 용골의 힘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차원문의 힘이 담긴 매개체라는 뜻이며. 저 용골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더는 중원삼국으로 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를 터.

‘…모두 예측일 뿐이지만.’

그러나 불안함이 이토록 완연하게 느껴지는데 괜히 실험 같은 걸 해볼 수 없는 법.

여명은 치를 떨고 말았다.

황룡은 선택지라고 하였지만. 이미 이건 선택이고 뭐고가 없는 악의적인 시험일뿐이었다.

혹은 여명이 잘못된 선택지를 골라 아예 중원삼국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수작일 수도 있고.

‘저 양반은 그걸 아니까 이런 선택지를 준 걸 거야.’

이는 무조건이다.

[머리가 나쁘지 않군.]

“역시, 이미 다 읽고 계셨네요….”

[흑원과 달기도 가능한 일은 나 또한 가능하지.]

“…….”

[흠, 마음의 문을 닫는 수작은 달기에게 배운 것인가. 허나 그 정도 문은 네 세상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동문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의미한 짓은 하지 마라.]

“…참 나.”

나름 여우님에게 배운 비장의 한 수였음에도, 역시 통할 사람이 있고. 안 통하는 신수가 있는 노릇.

여명은 쓰게 웃었다. 이건 뭐 발가벗게 놓고 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처지니.

[재롱을 다 부렸다면 이제 말해라. 무엇을 선택할 텐가.]

“…저는.”

[참고로 나의 예측은 정답이며. 다른 선택지를 고른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잘못된 선택지를 고른다고 해도 난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야.]

“…….”

…염병.

돌아버릴 것 같다. 여명의 직감대로 용골은 중요한 촉매가 맞았으며. 선택하지 않을 경우 황룡은 가차 없이 용골을 없애버릴 것이다.

비록 천안은 사라졌지만. 저 말이 거짓이 아닌 참이란 것쯤은 천안이 없어도 알겠다.

‘뭐 하냐 등신아. 그냥 용골 선택해.’

여명은 제 스스로를 욕하며 용골을 선택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래, 여전히 의문도 많으며. 흑원이 자신을 황룡에게 떠민 이유나 불쑥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찜찜함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그 찜찜함을 알고자 중원삼국을 포기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이미 자신에게 중원삼국은.

‘너무 소중한 곳이 돼버렸으니까.’

천산의 어르신들과 북궁린과 같은 인연들. 그리고….

-월!

아기자기한 솜뭉치 가족까지.

도저히 포기하지 못할 소중한 보물이 너무 많았으며. 아쉬운 일이지만 그가 선택해야 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

─ 포기하지 말거라.

“………아.”

툭.

용골이 여명의 손에 잡히기 직전 허무하게 떨어졌고. 그 모습은 마치 용골을 필요 없다는 듯 내팽개친 형국이었다.

금방 다시 주우면 그만이지만.

[줍지 않는 건가.]

“…….”

무언의 긍정.

여명은 황룡의 서늘하고도 엄격한 시선에도 대답 없이 또렷한 눈으로 황룡을 직시했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렇게 여명은 확신한다.

여우님이 말한 ‘포기하지 말라’는 조언이 어떤 속뜻을 가졌는지, 황룡에게 말해야 할 소원이 무엇인지도.

자신이 입에 담아야 할 소원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용골도 질문도 됐으니, 그냥 제가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저는 이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

황룡이 제시한 선택지가 아닌 자신이 고른 제3의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답이었다.

* * *

여우님도 가끔 이럴 때 보면 지긋한 세월을 머금은 분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 간단히 말해주면 될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인가?

‘포기하지 말라는 게 사실은 충고가 아니었던 거지.’

그녀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던 건 다름 아닌.

‘긴장을 풀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경고였던 거야.’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룡이란 이가 얼마나 성격이 꽉 막히고. 삐뚤어져 있으며 인간을 싫어하는지.

그렇기에 황룡이 무수한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고. 또한 그 방식 또한 악질적이며 교묘하다는 것을 아니 방심하는 순간 지금 같은 상황이 올 줄도 미리 알았으리라.

‘여우님은 [사고(思考)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끊임없이 궁리하고 의심해라.

황룡해는 물론이요. 황룡과의 대국과 황룡이 주는 선택지 등등.

그 모든 것이 함정이요. 시험의 일환일지어니.

‘여우님, 좀 더 쉽게 말씀해주시면 안 됐나요?’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직접적으로 ‘상황을 의심해라’거나 ‘황룡을 조심해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여명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마냥 의심만 하며 도리어 어떠한 선택지도 고르지 못했을 것이다.

외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거나 이도 저도 아닌 상황만을 직면했겠지.

그러니 응원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로 그가 백지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와 현상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극복하며 ‘몸’으로 받아들이길 원한 것이리라.

황룡이란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그리고 여명은 황룡이란 신수가 어떠한 양반인지 똑똑히 실감했다.

‘꼬이다 못해 심술궂고. 밥 먹는 것, 숨 쉬는 것 하나도 모두 시험인 미친 꼰대!’

[…다 들린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흐음….]

그래, 그는 여명을 시험한 것이다.

황룡해가 1차 시험이었다면, 2차 시험은 바둑이었다.

아니, 바둑 자체도 사실상 시험이 아닌 문제 풀이를 위해 준비한 배배 꼬인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함정 서술에 불과하다.

‘바둑 자체도 그냥 괴롭힘인 거지.’

자신이 올바른 선택지를 내리지 못하도록, 혹은 더 나아가 자신이 판단력을 상실하고. 뒤죽박죽과 같은 상황에서 혼란만 느끼다가 저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라며…!!

[그런 의도까진 아니었다. 물론 아무 의미가 없던 것은 맞지만.]

“…그게 괴롭힘인 거잖아요.”

차라리 흑원의 인성이 백배 천배 호인일 지경이다.

‘그 양반은 차라리 직설적이라서 낫지.’

숨기는 것이 없으며. 마냥 호전적이고 제 아내 앞에선 착실하기 짝이 없는 성성이.

그에 비해 수만 년 묵은 용은 악의를 선보이는 게 쉽다 못해 자연스럽다. 아니 자신이 하는 행동이 악의적이란 마음도 없을 것이다.

“후우!”

치가 떨리고. 속이 다 역해진다.

털썩!

여명은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만한 악의를 체감하니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힘겹기 그지없었고. 모든 게 다 허무하기 짝이 없어서.

‘난 대체 뭘 한 거야?’

무려 2년 가까운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하고도 알아낸 것은 결국 황룡에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는 것뿐이니, 원….

[난 네가 묻는 선택지를 존중해주었을 것이다.]

“대신 저를 중원삼국에서 내쫓았겠죠.”

[…….]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처음 황룡이 준 선택지인 용골과 질문.

이 둘 중 하나를 골랐다면 분명 황룡은 성실하게 답변을 주었을 테지만. 그 결과는 무조건….

“중원삼국 퇴출 엔딩이겠죠.”

용골을 골랐다면 용골이 가진 능력을 없앴을 것이요.

궁금증에 대한 답을 골랐다면 중원삼국에서 내쫓은 뒤 아마 그가 죽은 이후 답변을 줬을 것이다.

“‘아마’도 아니죠. 분명 그랬을 겁니다, 당신은.”

[…….]

“…부정도 안 하시네.”

[나는 거짓을 싫어하니.]

“!…!?”

저런 답변을 들으니 속이 뒤집힐 것 같다. 누가 보면 성인군자인 줄 알겠다.

사실상 순수악과 순수 꼰대의 끝판왕이나 다름없으면서.

‘사탄도 울고 갈 양반일세.’

혀를 내두르며 여명은 그냥 의사소통을 포기했다.

의사소통도 대화가 통하는 양반과 해야지. 아예 자신이 멋대로 답을 내고. 주제를 정하는 양반과 어찌 대화를 이어나가랴.

자신도 속병이 생길뿐더러 마냥 상처만 남는 대화일 뿐이다.

여명은 황룡을 향해 무감한 시선을 던지며 발언했다.

“…황룡님께선 인간과 달리 약속을 지킬 분일 테지요. 제 요구를 들으셨으니 이만 저를 여기서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가는 것인가.]

“어차피 답을 주지 않을 걸 압니다.”

[…….]

“하찮은 인간을 농락하는 건 황룡님의 마음이시겠지만. 약속은 지켜주리라 믿습니다.”

[…너의 소원은 이뤄질 것이다.]

화아아악!

병 주었다가 약 주는 돌팔이마냥 바람이 몸을 감싸며 여명은 두둥실 떠올랐다.

놀랄 만한 경험이지만. 여명은 그저 덤덤했고. 황룡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여명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이며.

“부디,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과정 없는 진솔함을 드러내었다.

………

………

………

“…….”

“왔느냐?”

살랑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가 그를 반기듯 흔들렸고. 여명은 간만에 듣는 정겨운 목소리에 약간 멍하니 답하고 말았다.

“네, 네에….”

“후후.”

허나 멍한 그의 대답에도 그녀는 유쾌해 보였으며. 하등 인자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됐느니라.”

“……진짜구나.”

“그럼 가짜겠느냐.”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긴 해요.”

근 2년 만에 만난 북극 여우의 존재를 확인하며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혹시 이 상황 자체도 그 망할 꼰대 용이 내리는 시험이 아닐까 의구심이 피어오르고 만다.

그러나

“월!!”

“어이쿠.”

그의 불안함을 불식시키듯 몸통 박치기를 하듯 그의 배를 쿵 하고 부딪치는 어느 강아지의 돌격에 여명의 의구심은 너무나 쉽게 깨졌다.

“왈왈!”

“…그래, 이 녀석아. 오빠 왔다.”

“헥헥헥!!”

이 따스하기 짝이 없는 부드러움과 그리운 내음. 그리고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는 친숙함마저 거짓일 리는 없을 것이라며 여명은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침 범벅으로 만드는 강아지는 연신 그를 꾸짖으면서도 반가워했고. 여명도 강아지를, 설기를 세상 소중하고 쉽게 깨질지 모르는 도자기 다루듯 마냥 조심스레 잡아 쓰다듬었다.

상처뿐인 귀환이었지만….

“하아, 이제야 살겠네.”

여명은 설령 모든 걸 잃었다고 한들, 자신의 삶이 생생이 숨 쉬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에 마냥 감사할 따름이었다.

진심으로.

………

………

………

[…….]

그가 떠나간 자리가 보인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용골만이 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

[닮았군.]

대략 수천 년, …아니다. 생각해 보니 딱 백 년 언저리에 저 자리에도 사람이 왔었고. 이와 같은 선택을 내려 떠나가 버린 이가 있었다.

그때도 그 인간은.

-네. 저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전 인간과 똑같은 선택을 내렸음이다.

[…전생체와 현생체는 기억도 공유하는 것인가?]

고금 아래 모르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황룡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마냥 의문만 들 따름이지.

그렇게 의문이 피어오른 그는.

[이 또한 한때의 여흥일 테지.]

따악.

화아아악!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금빛의 광채가 운해를 뒤덮었고. 선선한 선풍의 고요함과 함께 황룡은….

…휘이익.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고. 운해에는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tmi후기

-참고로 하나 말하자면 여명은 기환술을 잃긴 했지만. ‘선식’은 여전히 만들 수 있다.

-용골 자체가 파괴된 것도 아니기에 현대로 오가 가는 것도 문제는 없다.

-여명이 황룡을 만나길 포기한 이유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그의 운명을 멋대로 정하려는 그가 불쾌하며. 동시에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여명의 행동이 옳았던 것이, 황룡에게 만약 무언가를 원하면 도리어 황룡은 절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기에 여명의 선택지는 올바르다고 보면 된다.

-황룡은 이른바 ‘청개구리’ 같은 신수로, 싫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집착하는 귀찮음의 끝판왕이다.

-영수들이 황룡을 꺼려 하고 멀리하는 대표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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