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내 손안에 남은 것(7)
도무지 이해 못 할 얘기다.
무슨 뜻일까?
며늘아기라니?
‘내가 아는 그 며늘아기 말하는 거야?’
혹시 며늘아기에 다른 뜻이 있거나, 중원삼국에서만 쓰이는 은어(隱語)가 아닐까 싶어 슬쩍 여우님을 보니.
쩌어어억….
…입을 쩌억 하고 벌린 채, 침마저 흘릴 것 같았다.
도저히 뭔가를 물을 상황이 아니었으며. 어째 묻지 않더라도.
‘지, 진짜야?’
답이 보일 것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누구 하나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킨 원흉은.
“그런 식으로 볼 것 없다.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도 아닐뿐더러,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
…라고 하신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만….”
여명은 어처구니없는 걸 넘어 허탈하게 중얼거렸고. 황룡은 시종일관 똑같이 무심하게 허공을 직시할 뿐이었다.
그때.
“또. 똑바로 말해라! 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미곡왕이 확신 서린 얼굴로 취조하듯 황룡에게 답을 촉구했다.
허나 역시 황룡답다면 황룡답게.
“그걸 내가 왜 너에게 말해줘야지?”
“이 노망난 늙은이가…!”
미운 짓은 골라서 하는 양반답게 미곡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황룡이었고. 그녀는 정말 제대로 화가 나 보였다.
하긴, 궁금하게 할 건 다 하고. 이토록 재수 없게 구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도 이런데.’
여명은 미곡왕처럼 따지거나 캐묻지 않았으며. 황룡을 향한 시선을 억지로 거두기까지 했다.
황룡에게 답을 구하려고 해봤자, 그건 스스로 어리석다고 자백하는 꼴과 마찬가지일 뿐이며. 이런 상황에선 도리어 냉정한 것이 답이란 사실을 2년의 세월 동안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래, 이제 일문일답을 할 준비가 됐나.”
“…아, 그거 아직 해주는 거였어요?”
이 양반이 밉살스러워서 그렇지, 그래도 내뱉은 말은 끝까지 지키나 보다.
“다 들린다.”
“알고 있다니까요.”
“……흠.”
“후우….”
마음에 안 든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황룡과, 강제로 물음을 던져야지만 꿈자리가 사납지 않을 것 같은 여명.
서로를 향해 미묘하고도 쾌쾌한 감정을 주고받는 그들이었다.
* * *
“너는 어째서 힘을 포기한 것이지?”
“…그걸 이제 와서 묻는다고요?”
일문일답을 시작하자마자 황룡이 던진 질문이었고. 여명은 이제야 그걸 묻나 싶어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힘을 포기한 이유라….”
손님의 질문에는 성실히 답하는 것이 요식업자의 귀찮은 특성 중 하나이리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그게 이유인가?”
“으음,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진짜 진지하게 답한 거니까.”
황룡의 물음은 요 며칠 동안 여명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던 화두였다.
기환술이란 마법과 같은 힘을 포기하고 아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명은 딱히 그 당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 원영신을 이뤄 신선이 되었다고 해도 그건 총기(銃器)와 같은 것이란 게 여명의 생각이니까.
“총기가 뭔지 아시나요?”
“안다. 너의 세상에 존재하는 편리한 살인 도구이지. 제 동족을 더욱 잘 죽이기 위해 병기를 만드는 것을 보자면 어리석고도 또 어리석더군. 하등한 벌레들 같으니.”
“…개인적인 사견이 좀 많은 것 같지만. 알 건 다 아시네.”
그래, 총기란 놈은 그런 거다.
자기방어니 뭐니 해도 결국 살인 도구이자. 한 10분만 설명을 들어도 누구나 쓸 수 있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병기.
그리고 여명은.
“저는 황룡해에서 얻은 힘이 그렇다고 느꼈어요.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결국 그토록 쉽게 들어오는 힘은 총기와 다를 바가 없겠지요.”
“감히 원영신과 총기 따위를 비견하는 것이냐.”
“그런 말이 아니에요. 단지 아무런 노력 없이 얻은 힘만큼 자신을 파멸시키는 건 없다고 생각한 것뿐이죠.”
“……계속해라.”
“계속할 것도 자시고. 그렇게 거룩한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제가 고집쟁이라서 이런다는 게 결론이죠.”
여명도 공짜를 좋아하고. 행운으로 얻은 기회가 있다면 그걸 놓치지 않고 잡을 것이다.
하지만 여명은 부정할 수 없는 옛사람이다.
스승인 강태산도 그렇고. 그와 친한 사람들 모두가 21세기보다 20세기 시절을 추억하며. 낭만과 노력을 우상시하던 세대였다.
이런 어른들의 영향을 짙게 이어받은 여명에게 노력 없이 얻은 기술이나 힘은 어딘지 비겁한 반칙과 같다 느꼈을 뿐.
비록 누군가는 같잖다며 비웃을지라도 여명에겐 큰 이유였음이다.
“바보 같군.”
“알고 있다니까요, 바보 같은 거. …그래도.”
“?”
“전 이런 제가 좋습니다.”
“…….”
“누군가는 바보 같다고 할 테지만. 전 이런 제가 좋고 만족스러워요, 그러니 전 이거면 됐습니다.”
“…흐음.”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자기긍정’과 ‘자기만족’.
아닌 말로 자기가 좋다는 데 남의 평가가 무슨 상관이랴.
“어리석군.”
“누군가는 황룡 님처럼 그렇게 평가할 겁니다. 하지만 전 제 선택이 틀렸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저에게 가장 소중한 ‘힘’을 아직 가지고 있으니, 절망할 이유도 없죠.”
“힘? 그 알량한 심상을 말하는 것이냐?”
“에이, 존재부터 몰랐는데 소중할 게 있겠습니까.”
“허면?”
“이거죠.”
“…?”
황룡은 다시금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뜬금없이 손바닥을 활짝 편 다음 보여주는 그의 행위가 이해 가지 않았기에.
“무슨 뜻이지? 복수라도 하는 것인가.”
그를 시험한 것처럼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려 할 때, 여명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굳이 말하자면, 이 손이 제힘입니다.”
“…손?”
“조금만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마치 나무껍질처럼 투박한 굳은살과 화상 자국, 그리고 수두룩하게 베인 흉터.
그 밖에도 여기저기 엉망이다 못해 지문조차 없는 손가락 마디들.
허나 이러한 형편없는 손이야말로.
“내 모든 것입니다.”
이 손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가 담겨 있었으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설사 잠시 몸져누울 정도로 힘들고 아픈 시간을 겪을지라도 이 손은 언제나 자신을 일으켜줄 거다.
왜냐하면 이 손을 보고 있노라면 어떠한 것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드니까.
“이 상처는 제가 처음 식도 잡고 까불다가 생긴 상첩니다. 여기 화상 자국은 숯불에서 고기 굽는다고 치료 안 하다가 생긴 거고요. 또 이 굳은살은 냄비 휘두르다 터졌었죠. 참, 볼품없지요?”
한데 여명에겐 이 볼품없는 손이야말로 가장 큰 재산이다.
그도 그럴 게.
“가끔씩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이건 틀렸으니 저렇게 해라’라고 혹은 ‘도전해’라고 자꾸 등을 떠밀어줍니다. 인생의 선택지를 알려주는 거죠. 어떻게, 이 정도면 큰 보물이 아닙니까?”
선택지를 골라주고. 망설임을 없애주는 ‘힘.’
적어도 여명에겐 기환술 못지않게 대단한 바였다.
“그러니 전 기환술을 버린 게 아쉽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힘이 저에게 남아 있으니까.”
한 치의 흐림도 보이지 않은 올곧은 답변.
황룡이 만족할 만한 답변이 아닌, 어째 자아성찰과 다를 바 없었지만. 부족한 자신으로선 이러한 답변이 최선이었다.
“어설프고 투박한 언변이군.”
“…크흠.”
여명은 헛기침을 했다. 자신도 자기 말재주가 한미하다는 것을 아니 부끄러운 줄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짓을 내뱉거나 자신을 부풀리는 것보단 낫군.”
황룡은 어딘지 여명의 답변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마음과 감정마저 읽는 신수에게 있어 ‘진솔함’만큼 와 닿는 것은 없는 법이었으니.
그렇기에.
“무엇이 궁금하더냐, ‘며늘아기야’.”
충분한 답변을 들은 황룡은 그에게도 똑같이 답변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여명의 입에서 나올 물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왜 그렇게 저를 부르는지 좀 알아야겠습니다.”
“으음.”
후우우웅!
황룡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일순 식당 안으로 강풍이 휘몰아쳤다.
육안으로도 보이는 강풍이었음에도 조금도 식당 안을 어지럽히거나 위협하지 않는 신비로운 바람.
“이건?”
“가만히 있으면 된다.”
“네에?”
“바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
……또 사기 치는 거 아니겠지?
여명은 다시금 짜게 식은 시선을 보내며 황룡에게….
화아악!
“…어?”
그러나 여명은 황룡에게 불만을 내뱉는 것을 곧장 중단하며 생경한 체험을 해야만 했다.
바람이 그를 뒤덮을수록.
‘이게 무슨 기억이야?’
자신은 겪지도 않은 ‘기억’과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여.
꿈을 꾸는 사람처럼 여명의 눈은 점점 몽롱하게 감겨갔다.
………
………
………
할짝할짝.
“구왕.”
“……응?”
축축하게 변해가는 뺨.
여명은 일순 눈을 뜨며 끔뻑였고. 여전히 자신의 볼을 축축하게 물들이는 어느 ‘붉은색 털 뭉치’를 향해 시선을 줘야만 했다.
“…너어?”
“구왕!”
“……?”
어디서 많이 본 안면, 아니 견면(犬面)이다.
“…천마?”
“구왕?”
‘아직 자신은 천마가 아닌데, 왜 천마라고 부르지?’라며 천마를 닮은 강아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나 여명은 천마에게 무언가를 대응할 새도 없이.
“대모님! 깨어나셨어요!”
“저랑 놀아요!”
“…?”
…어느 남녀의 형상을 동시에 취한, 마치 쌍둥이와 같은 어린 남녀에게 덮쳐져야 했고. 당혹스럽게 입을 벌리며 현기증마저….
“-그래? 놀고 싶다고? 흐음, 그럼 백이랑 용이랑 한번 놀아볼까?”
[???]
그러나 의도한 것과 달리 여명의 입에서 나온 것은 평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낯설지만…. 아니 정정하자면 낯선 것이 분명한데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답지 않은 다정하고도 여성스러운, …또 정정해서 여성 그 자체인 음성이 남들에겐 안도감을 줄 테지만. 자신에게 곤혹스러움을 안긴다.
[아니, 내 입에서 왜 여자 목소리가…?]
여명은 곤혹스러움에 아연실색하며 멍해지려 했으나, 그(그녀)에게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여명은 이어지는 다음 상황에 비명을 내질러야만 했다.
“내가 왔소, 초희.”
“아, 당신 왔어요?”
[다, 당신?]
이게 무슨 끔찍한 대사란 말인가?
하지만 끔찍한 것은 이제 시작이란 것처럼 여명의 몸은 멋대로 움직이며 자신을 다정하게 부른 상대에게.
와락!
“보고 싶었어요.”
“나 또한 마찬가지요.”
[……커헉!]
힘껏 안기며 애정을 부렸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게 말이다.
아주 정상적인 성 정체성과 여성 취향도 확고한 여명은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고.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허나 빌어먹게도 그는 현재 제 몸을 뜻대로 움직이거나 감정 또한 조절하는 것이 불가했다.
그저.
“후후.”
[화, 황룡!?!! 이이이…, 개자식아-!!!]
차라리 황룡해로 또 떨구면 떨굴 것이지, 어디 이런…!
[왜 내가 여자냐고!!]
미친 소리 같지만. 그는 TS가 돼있었다.
그것도.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구려.”
…상당히 예쁜 절세미녀가 말이다.
쪼옥.
[끄아아아악!!]
허나 절세미녀가 된 첫 경험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소름 돋는 소리와 생생한 촉감에 여명은 기어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지옥이 여기 있었음이다.
tmi후기.
-여명의 전생은 제법 미녀였으며. 조선 출신 궁녀이고 이름은 초희다.
-스포지만, 고종 시절 때 궁녀이며. 미국으로 이민 가던 중 어떠한 사건으로 중원삼국에 갔다고 보면 된다.
-여명은 현재 황룡의 바람으로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떠올릴 뿐이지,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또한 불행스럽게도 여명의 전생 시절 장르는 이세계 로판, 아니 로맨스 무협이었다. 그렇기에 기억을 떠올리는 내내 상당히 괴로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