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전생일록(前生日錄)(1)
식당은 난리가 났다.
갑작스레 기절한 사람처럼 멍해진 여명이었고. 아무리 얘기를 걸어도 반응이 없으니 어찌 이것이 큰일이 아닐까!
북궁린과 설기는 패닉에 빠진 채 연신 여명을 부여잡고 꺼이꺼이거렸고. 미곡왕은 이리될 줄 알았다며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저 망할 영감 같으니! 설명이나 좀 할 것이지!’
그의 세계에 존재하는 자동차를 운전한다면 말 그대로 깜빡이도 안 넣을 노망난 영감탱이가 아닐 수 없으리.
후우!
미곡왕은 화딱지가 났지만. 어른스레 두 어린 것들을 진정시켜주기로 했다.
저러다 탈이 나면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속상해할 테니.
“진정해라, 그는 멀쩡하니.”
“하, 하지만…!”
“월월!”
“하여튼 말은 더럽게 안 듣는구나.”
딱 한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이지만. 미곡왕은 직감적으로 저 어린 것들이 얘기가 통할 상태가 아님을 직감했다.
‘어쩔 수가 없구나.’
제 취향은 아니지만.
따악.
강압적으로 구는 수밖에.
털썩….
“머, 머엉….”
“…건방진 녀석. 어디서 다잉 메시지를 남기더냐.”
그녀가 가볍게 꼬리를 튕기자 북궁린과 설기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혼절했고. 설기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범인은 ㅇ…ㅕ]라는 웃기지도 않은 메시지를 남겼다.
미곡왕은 고개를 저으며 설기의 꼬리 부근에 딱밤을 날렸다.
요망한 짓을 한 대가라는 듯이.
그리고는.
“-설명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혹 본녀가 신수가 아니라고 한들, 다 늙은 용 한 마리는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터.”
“…여전히 예의가 없는 계집이로다.”
황룡은 녹차를 마시며 코웃음 쳤으나, 그녀의 협박이 마냥 허언이 아니었다.
비록 과거의 죄업 때문에 신수의 위(位)를 얻지 못하는 중이지만. 영물이 된 지 100년도 안 되어 영수가 되고. 이후 신수마저 무시할 수 없는 격을 갖추게 된 그녀였다.
통상 천 년은 걸려야 할 일을 이토록 짧게 단축시킨 것이니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허나 어린 것이 주체 못 할 힘을 얻은 탓일까?
기어이 요녀(妖女)가 되어 무수한 죄를 저지른 미곡왕이었고. 결국 동시대를 산 ‘백록’이 신수가 되었을 때도 신수가 되지 못하며, 여전히 영수로만 남아 있으니.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녀를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언젠가 미곡왕이 자신의 죄업을 모두 청산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천호들의 우두머리인 왕모낭랑(王母娘娘), 즉 서왕모와 같은 영격을 얻을 것이 확신되었으니.
그런 만큼 그녀의 협박은 마냥 무시할 것이 못 되었고. 황룡조차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했다.
도리어 동격의 존재로 여기는 게 당연했지.
“너를 무시할 마음은 없다. 다만 나는 입으로 떠드는 재주가 없으니 나의 방식대로 답변을 준 것뿐이다.”
“설명은 해주었어야지!”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다.”
“이……! 진짜 사생결단을 내볼 테냐!”
콰직!
“…아프군.”
기어이 극대노한 그녀가 황룡의 손을 깨물었고. 황룡은 손이 깨물린 그 상태에서 무덤덤하게 반응하며 생각보다 너그럽게 화를 받아주었다.
…어쩌면 귀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를 테지만.
황룡은 아픔이 느껴지는 손을 무시한 채 여전히 몽롱한 상태에 사내를 쳐다보았다.
과연.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하군.”
콰직!
“…아프다니까.”
………
………
………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제법 엄청난 생동감을 준다는 4dx영화를 넘어 그 영화 안으로 들어가 직접 체험하는 느낌 아닌 느낌.
어느 순간부터 제3자의 시선으로 관조하며 여명은 자신이 보는 영화가 어떠한 상태인지 결론 내렸다.
[…이거 아주 뒤죽박죽이네.]
아주 개판이라고.
육체적 괴리감이 팍팍 느껴지는 행복과 정신적인 고통이 적절히 섞인 더러운 영화를 피눈물로 이겨내고, 여명은 가까스로 이 영화가 누군가의 ‘기억’이란 것을 인지했다.
[으음, 굳이 말하자면, ‘회상’이려나?]
그것도 지나치게 또렷하여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인 것처럼 생생하다 못해 리얼리티가 넘친다.
그래서 더욱 끔찍하기도 했고.
[어휴, 진짜 ‘난’ 뭐 하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가 깨달은 건 마냥 자신이 겪은 현상의 정체뿐만이 아니었다.
이 영화의 주체이자 주인공이 다름 아닌, [나]
그러니까….
[이 여자가 나름 동일 인물이란 거지.]
전생의 자각(自覺).
아마 고명한 학자들이 듣는다면 뒷목을 부여잡고 어디서 개소리냐며 뭐라 했을 테지만. 여명이 겪은 현상은 틀림없는 전생이었다.
어찌 확신하느냐고 묻는다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다는 거지.]
기억이, 혹은 감정이 가르쳐준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그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는 과정일 뿐이란 걸.
그저 너무 깊은 곳에 있던 것이기에 이질감과 같은 어색함이 있지만. 이 또한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해지리라.
[…살다 살다 별의별 일을 다 겪는구나.]
득도한 것도 아니고. 설마 이런 식으로 전생의 존재를 확인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며 여명은 쓰게 웃었다.
다만.
[흥미롭긴 더럽게 흥미롭네.]
아무리 드라마가 고구마가 넘치고. 뜬금없는 전개 때문에 욕을 한들, 흥미진진함 때문에 끝까지 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여명 또한 자신의 전생을 관람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러니 막장 드라마 시청률이 높지.]
어느 순간부터 시청자의 시점으로 구경꾼이 된 여명이었다.
그 정도로 여인의 생애는 치열하고도 흥미진진했기에.
* * *
‘초희’란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
나이는 지학(15세)밖에 되지 않은 꽃다운 소녀였고. 조선의 명운이 다해가는 시점에 궁에 들어온 나인이었다.
- 초희라고 하옵니다! 뭐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초희는 뭐든 열심히 하는 소녀였다.
태어났을 적 부모가 가난으로 죽고. 가난을 물려받아 굶어가던 소녀였으나, 결코 긍정적 사고관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소녀.
타고나기를 마음이 강한 것일지도 모르는 소녀는 빼어난 외모 덕분에 어느 양반가에 입양되어 신분이 제법 높아졌고. 집안 덕분에 쉽게 나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모가 워낙 곱상해서 그런지 그녀를 괴롭히는 이들은 많았고. 같은 동기들조차 그녀가 천출임을 알고 무시하거나 괴롭히기 일쑤였다.
- …괜찮아, 이럴 수도 있지, 뭐!
그러나 초희는 꿋꿋했다.
설사 휘더라도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와 같은 심성. 또한 남들보다 성숙한 인격이 초희를 둘러싼 가혹한 상황을 버티게 해준 것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녀를 버티게 해준 건.
-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식도를 쥘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 아!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 스승이라 하지 말라고 했지 않더냐.
- 헤헤, 그래도 저에겐 하나뿐인 스승님인걸요.
- …거참, 넉살 하나는 정말 최고로구나.
요리.
그녀는 요리가 그 무엇보다 좋았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며. 성장도 보인다.
누군가와 어울리거나 친해지는 것은 잘 못 해도, 요리와 노력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희에게 요리는 모든 것이 되어갔다.
초희는 비록 궁궐의 삶이 고되더라도 요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한데.
…이거, 아무리 봐도 상황이 좀….
초희는 어릴 적부터 고단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이토록 잘 큰 것에는 운도 운이겠지만. 타고난 직감 덕분도 있었다.
사실상 이 직감 덕분에 여러 번 살았고. 입양도 되고 궁궐까지 입성한 것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초희는 궁궐에 도는 불온한 공기를 감지했다.
어쩌면 궁궐만이 아닌, 조선 전체를 감싼 불온함이었고. 초희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 미리견(미국)으로 가자.
당시 가치관으론 이질적일 수도 있지만. 초희는 사고가 유연하면서도 개방적인 여인이었다.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옅다 보면 되리라.
어쩌면 백성의 가난과 고난조차 구하려 하지 않는 조선에 경멸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권력자의 추잡함과 다른 이들의 악심(惡心)에도 민감하여 조선이란 국가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그녀는 확신했다.
- 자고로 위부터 아래까지 썩어빠진 나라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선견지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뛰어난 직감을 기반으로 초희는 조선에서 빠져나왔다.
다른 이들에게도 같이 가보자 넌지시 말해보았지만. 도리어 초희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오히려 추포하려 했던 탓에 초희는 도망자처럼 배를 타야 했고. 당초의 결심처럼 미리견을 향해 가기로 했다.
여타의 나라도 많았지만. 초희는 미리견이란 나라에 이끌림을 우직하게 느끼며 다른 나라는 머릿속에 넣지도 않았다.
한데…….
콰아아아!
- …나라 버리고 왔다고 용왕님이 노하셨나 봐.
바다와 하늘이 분노하여 흔들리니 인간 따위가 감히 어찌 견딜 수 있으랴.
초희는 의식을 잃으며 그대로 바다로 빠져야 했고. 그런 그녀가 생애 허무함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는.
- ……어라?
그녀는 육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육지대륙의 이름이 ‘중원삼국’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안 건 달포 후의 일이었다.
* * *
[처음에는 미리견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색목인들이 많다는 것치고 이상하게 검은 머리를 가진 이들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전 미리견이 아니라, 청나라로 온 줄 알았죠. 실제로 그곳의 백성들도 여기가 ‘대륙’이라고 했으니까요.]
[…….]
[이래서 사람 뒷말을 들어봐야 한다니까요, 후후. 왜 ‘중원삼국’이란 이름을 안 들어서 사람을 창피하게 하는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요, 후후!]
[…….]
[아, 얘기를 듣는 것보다 보는 게 더 확실하겠네요. 계속 같이 봐요.]
[…예에.]
[그래도 이 구간은 좀 지루하니까…, 아 여기서부터 보면 되겠네요.]
[…동영상 스트리밍도 아니고.]
[편리하죠, 그쵸~?]
[…….]
차마 부정은 못 하겠다.
* * *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마냥 어리기만 했던 초희는 앳된 티를 버리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중원삼국이란 신비한 세상은 초희를 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일단은.
- 기, 기환학사였소!?
- 우리가 잘못했으니, 제발 봐주시오….
- 살려주십시오, 신령님…!
그녀가 타고난 묘한 직감과 능력이 사실은 선골이란 신비한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골을 통해 기환술이란 걸 배우게 된 것이 초희의 첫 번째 기연이었다.
중원삼국에 떨어진 첫날 우연찮게 산속에서 만난 사람이 기환학사였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뭐, 덕분에 그녀는 저에게 숨겨진 재능과 능력을 깨우치며 무력을 가지게 되었고. 산적 같은 무뢰배를 상대로도 도망칠 재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 초희 소저! 나와 혼인해 주시오!
- ……제발 좀 가요.
…행운이지만 불행인지, 원.
기환학사란 존재가 워낙 귀한 인재로 대접받는 삼국이었고. 초희는 자신이 속한 [백록국]에서 한동안 무수한 남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녀는 미인이었고. 그녀의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 이 얼마나 탐이 났을까.
다만 심정을 이해하는 것과 달리 초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야 했다.
- 또 망했어…!
초희는 기환학사란 인재가 됐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배운 요리를 귀하게 여기며. 실력을 쌓고. 돈을 모아 노점을 내었다.
시작은 작지만, 자신의 요리가 인정받길 원하며.
하지만 그놈의 망할 구혼자들 때문에 초희의 노점은 항상 파리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 절망을 겪어야 했다.
-…나쁜 사람들.
초희가 생애 내뱉은 가장 심한 욕설이 아닐 수 없으리라.
허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 저기, 당신이 혹시 초희십니까?
- …미안하지만 기환학사를 찾는 거라면 됐네요. 아, 물론 구혼도 사양이에요. 저는….
- 그, 그런 게 아니라! 수, 숙수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근방에서 가장 실력 좋은 숙수라 들어서…. 무, 물론 이렇게 젊고 예쁜 아가씨일지는 몰랐지만.
- ……호오.
그것이 바로, 초희가 처음 만난 정상인이자. 나름 호감이 갔던 남자 사마일….
[아니, 연애 얘기는 됐어요. 그러니 사양하죠.]
[…….]
여명은 단호하게 기억을 끊었다.
가능하면 저런 거 제발 좀 안 보여줬으면 싶기도 했다.
[…나름 흥미진진한 얘긴데요?]
[그래도 됐으니까, 얼른 스토리 좀 진행하죠. 이러다 한세월 다 가겠네.]
[……너무해요.]
[너무하긴요. 아니, 애초에 양다리 걸쳤다는 얘기가 어디 자랑이긴 해요?]
[야, 양다리라니….]
[…혹시나 싶어서 그러는 건데 대체 몇 명이랑 썸을….]
[큼큼, 이, 이거는 넘어가죠, 그럼.]
[……어장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진짜 아닌데.]
어딘지 억울해 보이는 말투였으나, 여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양다리든 오다리를 걸쳤든, 전혀 궁금하지 않기에.
아무리 전생의 일일지라도 자신이 남자와 썸을 탔다는 얘기는….
[곤욕도 그런 곤욕이 없지.]
더 이상 지옥은 사양하고 싶은 그였다.
[그러니 좀 흥미진진한 얘기 좀 해봐요. 좀 핵심적인 그런 거.]
[핵심적인 거요?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다 핵심적인 건데요? 기껏 좀 인상적이란 거라고 해봐야 우리 ‘천둥이’랑 마교랑 전쟁한 것 정도?]
[…천둥이가 누구예요?]
[붉은색 강아지예요. 나중에는 홍염천마라고 불리긴 하던데, 참 귀여운 애죠.]
[…….]
[왜 그래요?]
[…천둥이가, 그 양반 이름이에요?]
[그런데요?]
[……그 얘기 좀 자세히 해봐요.]
[?]
이제야 좀 흥미진진한 썰이 나오는 것 같다며 여명은 눈을 빛내었다.
tmi후기.
-한 번 언급했던 거지만. 황룡은 바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과거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최대 1,000년 전 바람마저 소환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능력은 지금 보는 것처럼 기억을 생생히 되새김질해주는 것을 넘어, 전생의 자아를 각성할 정도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대기 중 모든 바람을 한 시간가량 없앨 수 있는데, 아주 무서운 권능이다.
-또한 추가로 말하자면, 저 시기에 중원삼국과 현대는 시간 차가 좀 나는데, 여명이 처음 중원삼국으로 온 시기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략 238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