횐 76화 Ep.76 이세계 블랙기업 스미스
—병사들을 움직여라.
수정 구슬에 서 흘러 나온 그 말 한마디 에 집무실의 분위 기 가 한순간에 얼 어붙었다.
케르낙스의 손은 멈췄으며 수정 구슬을 들고 있던 행정관님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 역시 등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통신이 좋지 않은 것인가? 행정관.
“……아닙니다. 영주님. 정확히 전달받았습니다.”
행정관님은굳은 얼굴로 영주님의 물음에 대답했다.
수정 구슬이 은은하게 빛을 반짝였다.
—그렇다는군.그런데 어째서 대답이 없는 거지? 케르낙스.
“……죄송합니다.”
케르낙스가 쥐고 있던 깃팬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 구슬을 향해 허 리를 숙였다.
며칠 전, 벨라니스님 이 왔을 때도 그러했는데 케르낙스도 이곳 사람들은 대상이 직접 앞에 있지 않음에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점이 나에게는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내 가 언제 나에 게 사과하라 했지 엩 내 가 원하는 대 답은 그게 아니 라는 걸 잘알텐데.
수정 구슬을 통해 흘러나온 영주님의 물음에 집무실의 공기가 다시 한번 더 얼어붙었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케르낙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케르낙스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영주님 . 몰링타를 지 키고 있는 병력은 도시를 지 키 기 위한 수비군입 니 다. 거 기 다 대 다수가 도시의 치 안 유지 를 위 한 목적으로 훈련을 받은 인원
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이끌고 도시 밖을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케르낙스.
내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수정 구슬을 통해 흘러나온 영주님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버린 집무실 의 공기보다훨씬 더 차갑고 무거웠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입술을 잘근 씹은 케 르낙스가 결국 앞으로 나와 수정 구슬을 들고 있는 행정관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오린 자작령에 있는 바젤란까지 이번 달이 끝나기 전에 도착하도록. 바젤란에 도착하면 비오린 자작의 차녀가 지휘를 하고 있을 거다. 세부적인 내용은도착해서 자작의 차녀에게 듣도록해라.
“……알겠습니다.”
—케르낙스.병의 지휘권은오롯이 너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마라.그리고 행정관.
“네.영주님』
—케르낙스가 돌아올 때까지 몰링타에 남아 있도록.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수정 구슬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점차 약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범 한 수정 구슬이 되 었다.
행정관님은 수정 구슬을 다시 품속에 넣으셨고 케르낙스는 자리에서 일 어났다.
“……시발. 자기는 글렀네.”
내 허벅지에 누워있던 시론이 몸을 일으켰다.
살짝 피곤해 보이면서도 또렷한 눈동자를 보아하니 상당히 오래전부터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다.
셋 중에서 가장 먼저 움직 인 것은 케 르낙스였다.
“일단... 병사들을 소집해야할 것 같아서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네.그게 좋을것 같네요.”
“그럼.
케 르낙스가 행 정관님 께 살짝 고개 를 숙인 다음 집무실을 떠 났다.
“하아…. 젠장. 야. 나도 언니한테 알리러 간다. 우리 씹새 잘 챙겨라.”
기에나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시론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순식 간에 집 무실에 는 나와 행 정관님 . 그리 고 병풍과 다를 바가 없는 기 에 나씨만이 남게 됐다.
행정관님은굳어 있던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조금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해서 저도 당황해 버렸네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 냐면 나도 존나 당황하고 있는 중이 니 말이 다.
행정관님 이 내 얼굴을 조금 빤히 바라보시더니 쓰게 웃으며 말을 이 었다.
“너무 그렇게 심각한표정 하실 필요는 없어요.”
“심각…?”
“네.지금 얼굴이 무척 굳어 있으시네요.”
오우.”
나는 잘모르겠는데 행정관님이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조금굳어 있기 는 한모양이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뺨을 조물조물 만지 작거려 힘 이 들어간 얼굴 근육을 풀어주었다.
“조금 괜찮습니까?”
“하하, 네.그리고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그리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랍니다.”
누굴 걱정했다기보다는 그저 너무 깜짝 놀라서 정신이 없는 거지만… 정신이 조금 차분해지자 슬슬케르낙스와 병사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행정관님을 빤히 바라봤다.
“비록 몰링 타에 서는 경 비 대 장이 라고 불리 곤 있지 만, 케르낙스경 은 엄 연 히 영주님의 아래에서 견습 기사의 수료를 마치고 영주님께 인정받은 필로 리아 백작가의 어엿한 정식 기사입니다.”
“……케르낙스가 기사였습니까?”
내 질문에 행정관님이 가볍게 웃으셨다.
“네. 아주 훌륭한 기사랍니다. 그런 케르낙스의 아래에서 훈련받은 병 사들이라면 단언컨대 어딜 내놓아도분명 제 몫을 충분히 하는 이들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 다.
“그건•••꾈:’
나는 행정관님의 믿음 찬 대답에 긍정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케르낙스도 병사들도 평소 행실이 그리 똑 부러지는 건 아니 었기 때문이 다.
틈만 나면 상관을 놀려먹고 농땡이를 부린다거나, 길거리의 노점 근처에 서 잡담을 하거나 순찰 도중에도 나를 발견하면 호다닥 뛰 어와 조잘조잘 케르낙스와 어떤지에 대해 묻거나 한다.
분명 평소의 모습만보면 전혀 미덥지 못했다.
그러나 벨라니스님께서 다녀가시고마족령과의 휴전 소식이 알려진 후의 병사들의 모습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심 란한 마음으로 행 정관님 께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일이겠죠?”
“저도 듣고 온 것이 없어서 뭐라 확답은 못 드리겠지 만, 현 상황을 생각해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영지 전과 관련이 있을 듯하네요.”
“영지… 전이요?”
행정관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오린 자작의 영지는우리 왕국 안에서도 상당히 부유한쪽에 속한답니 다. 거기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비오린가의 장녀의 성격이 매우 좋지 않고 다 른 영지에서 이런저런 잡음을 많이 일으켰다는 걸 언제 접했던 적이 있거든 요.”
지구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기는 하다.
부모를 등에 업은 자식이 부모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사건 같은 건.
..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 영지전이라는 건 왕…의 허락이 떨어져야지 만 가능한 것 아닙 니까?”
“네. 폐하의 허가와 함께 왕족이 파견한 감독관의 주관 아래에서 진행할 수 있죠.”
“그, 사람이 여럿 다치는문제인데 위에서 쉽게 허용을 해주는 겁니까?”
조금 순화해서 다친다라고 표현했지 만, 영지전이 다. 전쟁이다.
절대로 무조건 사람이 죽는 일이 었다.
다른 왕국과의 전쟁도 아닌, 같은 왕국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을 왕이 라는 작자가 그리 쉽 게 허 가해 줄 거 라는 생 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행정관님의 입을 통해 나온 대답은 그런 내 생각을 간단히 부숴버 렸다.
“쉽 게 허용하고 안 하고를 떠 나서 폐하를 포함한 왕족들이 귀 족들의 분 란을 조장하고 다툼을 바라고 있답니 다.”
“•••꾈예?”
“사막 출신인 스미스님께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 왕국을 포함해 다른 왕국들도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다시 한번 내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왕이 분란을 조장한다니.
“뭐,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가장 큰 건 내부에 고여 썩은 부위를 도려내기 위함이랍니다. 거의 백 년 가까이 힘을 비축한귀족들의 존재는왕족에게 상 당히 거슬릴 테니까요.”
“그, 그러다 다른 왕국에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
“시간은국경을 책임지는대영주들이 벌어줄 테고, 그사이에 다시 귀족들 을 규합하면 그만이니 까요. 무엇보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게 타국을 침범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답니다. 그 러지 않는다면 모든 왕국으로부터 공격받고 그대로 쪼개져 버리거든요.”
“아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 머리는 안타깝게도 행정관님의 말을 이해 하고 말았다.
확실히 내가 왕이라도 아래의 귀족들이 큰 힘을 비축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아주 많이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런데 비오린 자작정도 되는 이가 병력을 요청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러 곳에서 동시에 영지전을 신청받은 모양이에요.”
“……그런 것도 허락해줍니까?”
“하하, 물론 시간을 동시에 잡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쉴 틈 없이 돌릴 뿐이 죠.”
이 나라는 정말 돌아버린 게 틀림 없다.
어쩌면… 사교도 녀석들은 이 돌아버린 나라에 반역하기 위해 들고 일어 난녀석들이 아닐까?
•••라고 하기 에는 하는 짓이 너무 위험한 놈들이 기는 하다.
“결론은… 병사들이 많이 다칠 거라는 소리군요.”
“그보다 나쁜 결과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답니 다.”
행정관님은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알려주 었다.
저렇게 순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역시 한 영지의 행정관이라는 자리에 올 라 있는 사람답다고 할까.
아니, 생각해보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다들 죽음에 익숙할지도 모르겠 다.
시 론도, 아멜라 누님도 험한 모험 가 출신이 고 케 르낙스역시 내 가 모르는 과거가 있었으며….
나는 옆에서 멍하니 서 있는 기에나씨를 힐끗 보았다.
뭔 가 복잡하던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스미스님?”
“아,옙.”
기에나씨의 얼굴 덕분에 머리가 맑아진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행정 관님의 부름에 답했다.
“따로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지 만, 그럼 에도 물어보도록 할게요. 케르낙스 경과 몰링타의 병사들이 걱정되십니까?”
“당연합니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개새끼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스미스님의 걱정을 조금 덜어드리도록 할게요.”
“예? 진짭니까?”
“하하, 그럼요. 뭐 … 제 독단으로 결정해도 될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스미 스님께서 그리 걱정을 하시니 이번만큼은제가조금 욕을 먹도록 하죠.”
“아니… 어 …… 그… 뭔진 몰라도 진짜 존나 감사합니 다….”
민망하게도 나는 차마 ‘욕먹으면서 까지 도와주실필요까지는….’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에요. 사실 도와드린다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스미스님께서 얼마 나 노력하냐에 달린 일이 거든요.”
엩,,
“원래라면 스미스님께서 만드신 ‘밤의 요정’은최우선적으로 필로리아가 의 기사단에 가장 먼저 지급될 예정이랍니다. 하지만 제 독단으로 몰링타의 병사들에게 먼저 지급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뭐, 보고만 안하면 그만이 니까요.”
오?”
“이곳 몰링 타에 서 바젤란까지 는 넉 넉 잡아 보름. 이 달 말까지 도착해 야 한 다는 조건이 있더라도 일주일의 여유는 있군요. 그동안 스미스님께서 얼마 나 많이 생산하냐에 따라 병사들의 생환율이 달라지겠네요.”
행정관님은 나를 보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진심으로 그 미소가 눈부셨다.
“진짜, 진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영주님께서 아신다면… 아니, 아실 수밖에 없겠네요. 뭐. 욕좀 듣고 감봉 좀 당하겠지만, 어쩌겠어요. 당장급한 사람들이 먼저 사용하는 게 옳은 일인데. 그렇죠?”
행정관님이 모노클을 쓴 눈을 깜빡이며 나에게 윙크했다.
나는 진짜 심 장이 쿵! 하고 뛰 었다.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이에요. 하지만무리해서 건강이 악화된다거나 한 다면 . . . 곧바로 중지 하고 강제 로라도 휴식을 취 하게 만들거 라는 점 . 명 심하 도록 하세요.”
“그럼요. 절대,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만들겠다고 약 속드리겠습니다.”
행정관님이 세상순한 얼굴로 흐릿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재료로 사용될 주괴들을 보러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