횐 287화 Ep.286 골디 아스 왕국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옙.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 참아주시길.”
듬직한 체구의 여성이 다시 말 고삐를 붙잡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그녀를 따라 호위하듯 주변을 둘러싼 다른 여인 들도 다시 움직였다.
‘흐음.’
나는 태 어나 처음 올라타 본 말 위에서 눈알을 한 바퀴 굴려 주변을 둘러 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냐호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차에 서 굴러 떨 어 졌다.
시오린씨의 훌륭한 마법 덕분에 다친 곳은 없었고 체감상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추격 자들이 내 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추격자. 그러니까 듬직한 체구의 여성들은 멍하니 눈밭에 서 있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고 정중하게 수발들기를 자청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여인이 하나뿐인 말을 나에게 내어주고 손수 고삐를 잡 고눈밭을 걷는다.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배 가 고프거나 춥지는 않은지 등을 물으며 내 신 체의 이상 여부나 건강을 챙 겨주려고 부단히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 다.
나야 당연히 다친 곳도 없고 춥지도 않았으며 오기 전에 든든하게 점심도 챙겨 먹었기에 사실상 말을 빌려 타는 것 이외엔 모조리 괜찮다며 거절했고.
그 뒤로는 지금처럼 나를 보호하듯 둘러싸고 새하얀 눈밭을 가로질러 가 는 중이다.
‘네메아님은 근처에 계시겠지?’
바로 앞에 있어도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니 이런 새하얀풍경 속에 녹 아들어 있다면 코앞을 지나쳐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런데 이렇게 데려갈 거면 꼭 마차에서 떨어질 필요가 있었을까.’
마차에 서 떨 어 질 때만 하더 라도 뭔 가 죄 수처 럼 끌려 갈 거 라 생 각했는데 현실은 잘못건드리면 쉽게 깨져버리는 귀중품처럼 다뤄지는 중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여성들이야 전부 칼름의 신도들이니 칼름의 명령에 의문 을 가지지 않는다지만, 이게 다른 사도들의 귀 에 들어가면 충분히 의문 또는 호기심을 가질만한 상황일 것이다.
물론, 다른 사도들의 눈을 의 식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기 에 칼름이 이 렇 게 나를 정중히 대접하라고 이들에게 명령한 것이겠지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대접할 거면 왜 마차에서 뛰 어내리는 연출이 필요했냐는 거지.’
딱히 이 상황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직접 걷지 않고 말위에 올라타편 하게 가고 있는데 불만이 있을까.
그냥 순수한 호기심 일 뿐이다. 절대로 한 번에 뛰 어내리지 못하고 냐호에 게 밀어달라고 말했던 게 쪽팔리고 짜증 나서 그런 게 아니다.
따지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칼름을 만나면 한 번 물어나볼 생각이다. 딱히 칼름이 만만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당장 이 자리에 네메아님이 계셨다면 네메 아님께 물었지. 하지만 없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는 없잖은가.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그것마저도 지쳐서 포기하고 멍하니 생각을 버 린 채 말에 올라타꽤 긴 시간옮겨졌을 때였다.
“다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내리면 되 겠습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나 대신 고삐를 쥐고 걸었던 여성이 다가오더니 혹시라도 안장 발걸이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내가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단단히 내 손을붙잡아몸을 지탱해 주었다.
뽀드득.
소복하게 쌓인 눈밭에 발 도장을 찍는 건 나이를 먹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럼. 열겠습니다.”
듬직한 여성은 자세를 낮춰 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물속에 던져 놨던 통발을 들어 올리듯 팔을 뽑아냈다.
파스스슥.
그녀의 손이 위로올라오자주변에 쌓여 있던 눈들이 뒤로쓸려 내려갔다. 순식간에 아래로 이 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예.”
듬직한 여성은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 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찰칵一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더니 밖과 이어진 통로가 어느새 굳게 닫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함께 왔으나 내려오지 않은 다른 신도들이 뒤처리를 한 모양이다.
“어둡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밖과 이 어진 통로는 막혔으나 계단 위 에 촘촘히 설치되 어있는 마법등 덕 분에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덴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나저나 지하를 엄청 좋아하네.’
저번에 시론과 함께 납치당했던 장소도 지하에 땅을 파고 만든 장소였는 데 이번에도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도대체 이 정도 깊이의 땅굴을 파고 제대로된 시설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했을지 …….
발상의 전환으로 지상에다가 건설하면 여러모로 비용과 시간도 절약되고 좋을텐데.
‘뭐. 이 미지만 놓고 보면 지하에 있는 게 맞긴 하지 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몇 번 하다 보니 긴 계단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그 런데 구조가좀 내 예상을 많이 벗어나 있었다.
긴 복도나 계단형 통로 같은 걸 예상했으나, 실상은 사람 셋이 겨우 설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문이 하나붙어 있는 게 전부였다.
“이곳부터는 혼자가셔야 합니다.”
“•••그렇군요.”
듬직한 여성이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총 세계의 방이 있습니다. 첫 번째와두 번째는 따로 주의를 드릴 게 없으 나 세 번째 방에 들어가시 면 중심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안에 서 주셔야 합니 다.”
“마법진이요?”
“예. 아, 이상한 건 아닙니다. 조금 더 은밀한 공간으로 이동시 켜주는 역할 을 하는 마법진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여기서 더 은밀한 곳으로 이동시킨다니.도대체 어디까지 땅을 파둔 걸까.
“마법진의 중심에 서시면 잠시 후 진이 발동할 겁니다. 발동 후 약간의 어지럼증 및 구토감을 느낄 수 있으니 이해해 주시길.”
“그 정도야 뭐….”
“그러면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니, 음… 예. 감사합니다.”
나는 과할 정도로 예를 차리는 듬직한 여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다 음, 덩그러니 설치되 어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저절로 닫혔다.
눈앞에 나타난 풍경 이 크게 이상한 게 아니 었기 에 나는 닫힌 문을 등지고 앞으로 걸었다.
“목욕탕이 네.”
평범하게 옷을 벗어두는 옷장이 있고 앞에는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투명한 유리문이 존재했다. 그 너머로는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찬 공간이 있었고.
“좋긴 한데 이왕이면 같이 즐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칼름의 배 치 순서 에 약간의 아쉬 움을 토로하며 옷을 벗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오……마실 것도 있네.”
거대한욕탕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선반.
그 위에는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겨 있는 유리병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맑은 하늘색의 액체가 담긴 병을 쥐었다.
“심지어 시원하네.”
칼름이 날위해 아주 준비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나는 뭔지 모를 음료가 담긴 병을 쥐고 욕탕에 들어가 앉았다.
“물 온도도 딱 좋고.”
편하게 등을 기대며 이 뭔지 모를 호기심을 유발하는 색을 가진 음료를 가 볍게 입에 머금었다.
“푸흡…!!
그리고 뱉었다.
“……뭔가기억날듯말듯하더니.”
생각 없이 케르낙스에게 섹스어필을 시도했던 날, 케르낙스와 함께 풍요 신의 신전을 찾아가 구매했던 블루와인.
풍요신의 신전에서만 구매 할 수 있는 특산품 같은 것으로 여자가 남자의 잔에 이 걸 따르고 남자가 마시 면 사랑을 받아들이 겠다는 의 미 가 있다고 했 던 것같다.
“아니. 사교도가 이런 걸 가지고 있어도되는 거야?”
좀 더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그런 것들을 가져다 놔야지 어떻게 반대 세력 의 특산품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쥐고 있던 병을 욕탕 밖에 내 려두며 선반 위를 바라봤다.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내용물이 담긴 유리병들.
저거 전부 다른 신전에서 파는 것들은 아니겠지?緒
나중에 칼름에게 물어봐야겠다.
“끙.입맛만 버렸네.”
혀에 남아 있는 미묘하게 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잔여물을 뱉으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혼자서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역시 욕탕에는 껴 안을 수 있는 연인과 함께 하 는 편이 더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니 얼른 칼름을 만나 좆질을 시원하게 해준 다음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욕탕에서 나온 나는 정확히 들어왔던 유리문의 맞은편에 위치, 크기, 모양 까지 똑같이 생긴 문으로 다가갔다.
“수건이랑…… 가운인가?”
미리 준비되 어 있던 수건으로 몸을 꼼꼼히 닦은 후, 옷걸이에 걸린 새하얀 가운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앞섬이 풀어지지 않도록 끈으로 잘동여맨 다음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는 세 번째 방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특별한 것 없는 작은 방 하나.
마치 몰링타에 있는지하실을 축소해 놓은것 같은분위기의 방이었다.
나는 하얀색으로 바닥에 그려져 있는 복잡한 문양을 구경하다가 문뜩 그 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하나때문에 여길 만든 건가?’
엄청난수고를 들여서 깊숙이 땅을 팠다. 그런데 고작 만든 게 탈의실 하 나, 욕탕 하나,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나 때문에 만든 거 맞는 거 같은데.’
뭐 랄까. 나를 위해 이렇게나 신경 쓰고 투자해 줬다는 건 고맙지만, 부담 스러운 것도사실이었기에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라고 말해둬야할 것같다.
“어디 보자… 이쯤서면되겠지?”
둥그런 원형의 중심에 두 발을 딱붙이고 섰다.
‘공간이동 같은거려나.’
소설이나 게임에서 보면 텔레포트 같은 마법은 마법사들의 기본 소양처 럼 등장하고는 했다. 하지만 현실은 대륙에서 이름난 대마법사쯤 되 어야지 시도나 해 볼 법한, 동화책 속에서나 사용 가능한 마법이 었다.
그렇기에 조금 설렜다.
공간을 이동한다는 과연 어떤 느낌이고 어떤 기분일까.
“후우.괜히 긴장….”
쿠우우웅一!!
엩!”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방 전체를 덮쳤다. 딛고 선 지면이 흔들려 균형을 잃을뻔했으며 천장에선 작은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려 몸을 더럽혔다.
“무슨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알려주는 굉음에 원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파아아앗一!!
바닥으로부터 강렬한빛이 터져 나왔다.
“긋?!”
눈을 뜨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밟고 선 문양에서 터져 나온 빛은 순식 간에 나와 함께 좁은 공간을 집 어삼켰다.
**
님.”
“•••미스……
“스미스님!!”
엩,,
굉장히 귀에 익은 소녀의 목소리에 눈이 뜨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칙칙한배경의 천장이었다.
‘몸은……괜찮은거 같고.’
!.
.
머 리 가 어 지 럽 지도 않았고 구토감을 느끼 지 도 않았다. 손발 모두 제 대 로 붙어 있었고 움직이는 것도 생 각대로 잘 움직 인다.
그제 야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좁아터졌던 방에 서 있었는데 환한 빛에 삼켜지고 정신을 차렸더니 어디 굉장히 칙칙한 색으로 물든 신혼부부의 침실 같은 곳에 와 있었다.
“스미스님!!”
아까부터 내 이름을 부르던 낯익은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나를 불러 왔다. 그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아아, 스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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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해 보이는 검은색 프릴을 잔뜩 달고 있는 침대에 누워 고개만 힘겹게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소녀.
“스, 스미스님! 저예요! 저!!”
“칼름…?
“맞아요!! 역시 스미스님!!”
내가이름을 불러주자 칼름이 감동받은표정을 지으며 기뻐했다.
나는 기뻐하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지기 전 칼름의 모습은 아르델라를 어중간하게 따라한모습이었다. 페트미라 신에게 받은 권능을 이용했음에도 새하얗게 물들었어야 할 머리 칼은 색 이 빠진 회 색 이 한계 였고 얼굴과 몸도 소녀 시 절의 아르델라를 카피 하려 했던 것처럼 앳된 모습이 굉장히 강했었다.
그러나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칼름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 어트린 장난기 많아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진짜모습이야?”
“네? 아, 네. 이게 제 진짜얼굴이에요.”
“그렇구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러자 칼름이 당황한 얼굴 로 나에게 다급히 말했다.
“아, 아직 성장중이에요!! 더, 더 커질 수 있어요!!”
“……나아무말도안했는데.”
“그, 그으….”
칼름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겨우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의 귀 여운 칼름의 가슴을 한 번 더 눈에 담으며 그녀에 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칼름은 현재 침대에 누워 있다. 이상한 사슬 수갑에 사지가 결박당한 상태 로말이다.
아!!”
내 물음에 칼름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다 시 다급한 얼굴로 나를 향해 말했다.
“스,스미스님!! 일단, 저, 저 좀도와주세요!!”
나는 수갑에 묶여 허우적거리고 있는 칼름을 향해 물었다.
“이 런 상황에 선 보통 내 가 나쁜 놈이 어 야 하지 않나?”
“•••꾈네?”
칼름이 당황한 얼굴로 눈을 껌 뻑 였다.
“아니. 그, 뭐 냐. 이런 상황극은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긴 한데 보통 그렇게 결박되어 있으면 내가 나쁜 놈이고 널 강제로 따먹으려 한다.뭐 이런 흐름이 어야하지 않나…….”
“아……아……!!”
내 대답에 칼름이 드디어 깨달았다는듯이 크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치 ? 내 말이 맞一”
“상황극아니거든요?!”
칼름이 빼액 ! 소리 질렀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얼굴에서 다급함이 물씬 느껴졌기에 나는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칙칙한색으로도배되어 있는 침실.
무슨변태 같은취향의 침대에 결박되어 있는칼름.
흰 가운 하나 덜렁 걸친 나.
‘이게 상황극이 아니라고…?’
나는 씩씩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칼름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네!!”
“지금 이 상황이.”
“진짜라는 거죠!!”
“……진짜?”
“진짜!!”
“음…….”
칼름의 강렬한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갑……괜찮네.’
나중에 꼭 써먹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