횐 298화 Ep.297 골디 아스 왕국
촛불이 사라지면서 완벽히 어둠에 물든 제단.
그 어둑한 중심에서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붉은 빛이 흉흉하게 일렁거린다.
‘빌어먹을 년.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붉은빛을 지켜보고 있던 나베리우스가 얼굴을 구겼 다.
제단의 중심.
그곳에는모험가들의 손에 순순히 붙잡혀온사도 칼름-블룸이 문양의 위 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불길한 붉은빛을 내뿜는 거한이 위 대한 어둠의 어머니 누이트로부터 받은 은총을 사용해 페트미라의 사도를 세뇌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 었다.
“쯧
은총의 위력을 높여줄 각인은 완벽했다. 실제로 거한 역시 처녀의 피로 그 려진 각인이 빛을 발하자 감탄했으니 까.
각인의 힘을 빌려, 어머니. 누이트로부터 받은 은총의 힘을 몇 배로 증폭된 위력으로 다룰수 있게 된 거한은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 힘이라면, 한 시간이면 충분할 듯하군요.
한시 간.
실패와 성공을 떠나서 의식이 시작하고 끝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거한은 딱 한 시 간으로 정하고 의 식 에 들어 갔다.
거한을 혐오하는 나베 리우스였지만, 적어도 그 혐오스러운 거한이 말을 허투루 내뱉는 작자가 아니라는 건 그도 인정하는 바였기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짜증이 났다.
‘순간적으로증폭된 힘에 취하기라도했던 모양이지. 병신 같은 년.’
지금 의식을 치르고 있는 대상은 무려 페트미라의 사도 중 하나이다.
아무리 힘 이 늘어 났다지 만 고작 한 시 간으로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부터 가 오만이 라는 소리 다.
적어도 나베리우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붙잡혀온 이유를모르겠단 말이지.’
알테리온으로 만든 수갑을 간단히 제거하고 방 안에 남겨두었던 은총까 지 소멸시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고작해 야 모험 가 나부랭 이들 손에 간단히 붙잡혀 이곳까지 끌려 오다니.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시간을 끌기 위함 같은데.’
모험가들이 말하길, 사도를 사로잡은 복도를 빈틈없이 뒤졌으나 사내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거한을 통해 보고해왔다.
나베리우스는 기본적으로 모험가라는 족속을 신뢰하지 않는다. 돈에 눈 이 멀어 언제 옆에 있는 동료, 또는 의뢰 인을 칼로 찌르고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은 파렴 치 한 족속. 그게 나베 리 우스가 생 각하는 모험 가들이 었다.
그러나 이번 일에 가담 중인 모험가들에 한해서 나베리우스는 따로 트집 을 잡지 않았다.
그녀들은 ‘사내’라는. 여자라면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미끼를 쫓아 날카 로운 바늘을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는 잡은 물고기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 역시 반드시 얻고 싶은 게 있었고, 이곳에서의 일이 밖으로흘러나 가면 곤란해지는 건 오히려 그녀들 자신이었기에 귀찮다고 설렁설렁 움직이 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 나 나베 리 우스는 몰랐다. 그가 생 각한 것보다 모험 가라는 족속이 훨 씬 글러 먹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또한, 춥고 먹고살기 바쁜 그녀들에게 무한 한 술과 따뜻한 안식 처 가 주어 지 면 어 떻 게 되 는지 를 말이 다.
우우웅一!!
제단의 중심에 일렁이던 붉은빛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나베리우스는 어둠속에서 넘실거리며 춤추듯 움직이는 붉은빛을 지켜보 며 생각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소환했던 사내는 이미 이 곳에 없다고 생 각하는게 맞겠지.’
그는 보호해야 할 대상을 내버려 두고 순순히 이곳으로 붙잡혀왔을 거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소환된 사내를 내버려 두고 우리에게 온 것이라면 … ….’
그러나 이미 한 번 실패를 겪은 나베리우스는 변수라는 건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나타난다는 걸. 그렇기에 변수라고 부른다는 걸 몸소 체험했 기에 쉽사리 단정 짓지 않았다.
‘정말그런 생각으로 온 거라면?’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의식에 짜증과 불만을 느끼고 있던 나베리우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는 붉은빛이 춤추고 있는 제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을 채 천천히 위대한 밤의 어머니에게 받은 은총을 발현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쪽의 전력을 파악했다? 아니, 아니다. 그게 아니야.’
나베리우스의 그림자가 조금씩 덩치를 부풀려 나간다.
그는 이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을 쏘아대는 붉은 점을 노려보 며 침을 삼켰다.
‘처음부터 이쪽의 전력 따윈 조금도신경 쓰지 않은 거다…….’
어떤 준비를 했고 누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능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기에 제 발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아니… 우리가 초대했다는표현이 옳겠군.’
멀쩡히 있던 상대를 자신들이 붙잡아왔으니, 그게 초대가 아니면 무엇이 란말인가.
‘젠장.처음부터 꺼림직하다고생각했는데 …… 가는곳마다 지랄들이군.’
나베 리우스는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 면 제단의 뒤에 마련된 탈출구 를 향해 곧바로 몸을 날릴 생각을 하며 천천히 긴장감을 끓어 올렸다.
느슨해져 있던 그의 근육이 조금씩 조여들어 자리를 잡기 시작한순간.
“흐아아아아압—!!”
제단의 중심에 서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던 거한이 괴성을 내뱉으며 박수 를 쳤다.
나베리우스는 곧바로 공격할 준비를 갖추며 붉은빛이 사라진 제단을 노 려봤다.
“…….”
“…….”
무겁게 내리깔리는침묵.
나베 리 우스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 려 조금이 라도 수상한 움직 임을 보이 지는 않을까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 나 나베 리우스가 은총을 사용하는 일은 벌어 지 지 않았다.
“후우
거한의 한숨에 침묵이 깨졌다.
나베리우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공했나?”
“•••예.도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오래걸렸으나 결국에는 성공해 냈답니다.”
“•••꾈그렇군.”
그는은연중에 아쉽다는 감정을 내비치며 아래에 준비해 두었던 촛불에 불을 붙였다.
마법등을 거한이 전부 깨버리는 바람에 지금 이 제단을 밝힐 수 있는 수단 이 고작 이 작은 촛불뿐이라는 사실에 나베리우스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드러났다.
“성공은 했지만, 명령이 어디까지 먹혀들지는 모르겠군요. 저 대신 좀 알아 봐주세요.”
“뭐 엩 내 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 네년이 할 일은 마지 막까지 네년 이 다책임지고마무리 지어라.”
나베리우스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거한을 올려다보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구겼다.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
그 빛의 범위로 거한이 들어왔다. 그제야 나베리우스는 거한의 얼굴을 제 대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흥.쉬운 것처럼 떠들더니 꼴이 말이 아니구나.”
나베리우스는 땀에 흠뻑 젖고 핼쑥하게 변한 거한을 올려다보며 한쪽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에도 거한은 개의치 않고, 지쳤으나 평온한 얼굴로 말했 다.
“지하에 두었던 신도와모험가들에게 심어두었던 은총이 모조리 사라졌 습니다.”
뭐?”
은총이 사라졌다는 소리에 비웃음 짓고 있단 나베리우스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의식 도중에 일어난 일이라 따로 대처할 수가 없어 방치할 수밖에 없었어 요.촘촘히 연결되어 있던 은총의 일부가잘려 나가는 기분이었죠.실제로 잘 려나가버렸고요.”
“•••꾈.”
나베 리우스는 고개를 옆으로 내 빼 바닥에 누워 있는 칼름을 잠깐 노려보 다가 다시 거한을 올려보며 말했다.
“괴물 같은 년.”
은총이 잘려 나가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나베리우스는 이미 몇 시간 전 에 직접 겪어 보았다.그건 도저히 인간이 버틸 수 있는고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거한은그고통을견딜 뿐만아니라그와중에 의식까지 이 어나간 것이다.
“매 번 말씀드리 지 만 저는 년 이 아니 라 놈입 니 다. 그보다 저 는 모험 가들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볼게요. 아니면, 당신이 내려가시겠어요?”
“……쯧. 빨리 꺼져라.”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수 없는상황에서 고기 방패의 역할밖에 해내지 못하는모험가 들을 데리고 탐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한은 고개를 한 번 끄떡 이고는 무거운 석벽을 밀어 제단을 나갔다.
열린 틈을 통해 스며들어오는 은은한 마법등의 빛.
나베리우스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석벽의 틈을 닫아버렸다.
그는 손에 든 촛불의 작인 빛을 따라 조금씩 제 단의 중심 으로 걸어 갔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각인 위에 누워 있는 작은 소녀.
“일어나라.”
나베리우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감겨 있던 소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상체를 일으킨 뒤, 바닥을 짚고 자리 에 서 일어 났다.
음침해 보이는 보랏빛 머리칼.
동그란 눈.
오똑한 콧날과 작은 입술.
그는 자신보다 작은 키를 가진 소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름은?”
“칼름
“페트미라의 사도가맞나?”
“•••예에.”
나베리우스는 획득한 일기장의 정보를 토대로 칼름에게 질문을 던지며 일기장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했다.
‘조금 다른부분이 있지만대강 다맞군.’
초점 없는 눈동자.
거한의 은총에 당한 대상이 보이는 특징 중 하나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 역시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그러나 나베리우스 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혹시 지금 상황도 연기라면?
상대는 사도다. 그것도 가장 세 력 이 큰 집 단의 .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소리였다.
‘하지만네년이 신도인 이상확인할방법은있다.’
아무리 연기를 뛰 어나게 하더라도 신을 모시는 신도라면 죽는 한이 있더 라도 저지를 수 없는 언행.
“ 따라 해 라. 페 트미 라는 창녀 다.”
모시는 신을 모독하는 행위 .
일반 신도라면 몰매를 맞아 마땅한 짓이며, 자신과 눈앞의 소녀쯤 되는 자 들이 신을 모독하는 것은 그간의 삶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페트미라는…….”
칼름의 입이 열렸다.
나베리우스는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냐에 따라 곧바로 행동할 수 있도 록자세를 잡았다.
살짝 벌어진 상태로움직이지 않는 작은 입술.
‘역시……!!’
이상할 정도로 긴 침묵에 나베리우스가 은총을 발현하려던 바로 그 순간.
“창녀다.”
“……
칼름의 발아래에 모여든 검은 기운들이 멈칫했다.
나베 리우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칼름을 노려보며 다시 한번 그녀 에 게 명 령했다.
“제 대 로 말해 라. 페트미 라는 창녀 라고.”
.....
“페트미라는 창녀다……
“다시.”
“페트미라는 창녀다….”
“한번더.”
“페트미라는 창녀다.”
a 으 „
나베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름의 발아래에 모여들었던 검은 기운도 사라졌다.
“역시 나다. 내 도움이 있었기에 페트미라의 사도를세뇌시킬 수 있었다.”
그는 언제 나처럼 짧게 나마 자신을 칭찬하는 시 간을 가졌다.
“이 젠 의 문들을 해 결할 시 간이로군.”
나베리우스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순순히 붙잡힌 거냐?”
어째서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고 붙잡힌 것인가.
나베리우스는 그 점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동시에 여자 특유의 자만심에 취한 대가를 치르게 된 그녀를 비웃어줄 준비를 했다.
“자,어서 말해라.”
“붙잡힌 목적…….”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다음 이 어질 말을 기 다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 간이 지난후, 칼름의 작은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