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진건설 (3)
몇 시간 전.
고창범은 고민에 빠졌다.
잠시 밖으로 나온 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칙칙.
“후우, 머리 깨지겠네.”
김현성과의 대화.
섣불리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럴듯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17살 고등학생의 말을 믿고 무턱대고 나설 수는 없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지 않은가. 순식간에 담배를 거의 다 빨아들인 고창범은, 연기가 풀풀 나는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는 또 다른 담배를 물었다.
끼익.
“……저기, 손님. 여기는 금연 구역입니다만.”
카페 주인이었다.
고창범은 한눈에 보아도 양아치였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고창범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거, 심기 건드리지 말고 들어가세요. 씨발, 카페 다 부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화들짝 놀라는 카페 주인.
그는 눈치를 보더니 슬며시 가게로 들어갔다.
고창범.
그는 생긴 대로 사는 인간이었다.
명진건설의 장남으로 태어나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았고, 대산 바닥에서 건드려서는 안 될 시한폭탄으로 유명했다. 김현성은 그가 올바른 인물이기에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동생을 무너트려서라도 권력을 쟁취할 만큼 적당히 썩었기에, 오히려 그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고창석과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그래도 자신의 가족을 건드리는 것은 탐탁지 않아 하는, 같잖은 의리를 타고난 사람이 바로 고창범이었다.
“창석아. 씨발, 적당히 하지 그랬냐.”
최근.
고창석의 음모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행인들이 시비를 걸었을 때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그의 불같은 성질은 분노를 참아 내지 못하고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것이 고창범이라는 인간의 특성이었다. 단순히 눈앞의 상황만을 보기에, 그는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이에 벼랑 끝에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김현성의 발언.
상당히 거슬렸다.
그는 대놓고 자신을 밑바닥이라 표현하며 깎아내렸다.
평소라면 은인이고 뭐고 자리를 엎었겠지만, 김현성은 단순히 비난 일색의 발언을 내뱉지 않았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혀에 꿀을 바른 새끼들만 곁에 두어서겠지. 김현성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잖아. 난 창석이에 비해서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무력하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 것이 분명해. 그리고 창석이는 내게 조금도 내어 주려고 하지 않을 테고. 이 상황에서, 내가 난생처음 보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의 말을 듣는 게 맞을까?’
딜레마였다.
상대가 비슷한 나이대였다면.
아니, 성인이라도 되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17살의 나이는 신뢰하기에는 어려도 너무 어렸다.
한참을 고민했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쌓여 갈 즈음, 고창범은 문득 아버지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창범아. 네가 능력이 없다면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곁에 두어라. 나이와 성별, 조건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네게 필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곁에 둔다면 넌 명진건설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수년 전.
한량처럼 살아가는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했던 그 말이, 왠지 지금은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씨발, 모르겠다.”
툭.
장초를 바닥에 버렸다.
카페로 들어선 고창범은, 자리로 돌아가서는 김현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계획을 말해 봐. 전부 듣고 판단할 테니까.”
* * *
고창범과 고창석.
다윗과 골리앗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고, 그렇기에 김현성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창범이 고창석과 같은 기반을 마련했다면 고등학생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겠지. 그것이 고창범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야. 고창범이 덜 쓰레기라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아직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심적인 공간이 존재해. 나는 그런 고창범에게 필요한 인물이 되어야만 해.’
거래였다.
능력을 내주고 대가를 받아 오는.
첫 관계를 맺는 상황에, 김현성은 차분하게 말했다.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첫 번째는 배경. 고창범 씨는 이 배경에서부터 패배했어요. 명진건설의 장남이라는 이점을 타고났으나, 고창석은 대산의 명문가와 결혼하면서 그만의 세력을 구축했어요. 고창석을 맹목적으로 밀어주는 배경의 존재로 인해, 고창석은 후계 경쟁 레이스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죠. 그렇다면 두 번째 조건은 어떨까요. 두 번째는 바로 평판. 평판에서는 승리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고개를 저었다.
명진건설의 양아치라고 불리는 자신과는 다르게, 고창석은 대외적인 평판이 아주 좋았다.
“이 두 번째 조건은 세 번째 조건과도 직결돼요. 세 번째는 능력. 외국의 명문 대학교를 졸업해서 명진건설의 실무를 보고 있는 고창석은, 이미 검증받은 개인의 능력으로 인해 명진건설 내부에서 평판이 좋을 수밖에 없겠죠. 실제로 그가 능력이 있는 인물인가는 별개의 문제예요. 후보가 두 명으로 좁혀진 상대 평가에서, 고창범 씨보다 뛰어나다면 끝난 문제니까요.”
패배가 명백했다.
세 가지 조건.
모두 패배했다.
고창범은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일단은 해결책까지는 들어 보려고 분노를 꾹꾹 억눌렀다.
결과만 달콤하다면.
입에 쓴 약을 들이켤 것이다.
고창범은 영리하지 않으나, 나름대로 소신이 있었다.
일을 벌였다면 확실하게.
참다가 시비를 건 행인들을 응급실로 보낼 만큼, 결정을 내렸기에 김현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후계자의 세 가지 조건을 차례로 뒤엎을 필요가 있어요.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첫 번째 조건인 배경. 이 배경을 뒤엎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고창범 씨가 고창석과 동일한 수준의 배경과 혼인하거나 혹은 그만한 세력을 끌어올 수는 없으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죠.”
웃었다.
그 웃음이, 고창범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고창석과 부인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 둘의 관계가 무너진다면, 고창석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배경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 * *
다시 현재.
고창석이 다급하게 차를 몰았다.
와이프가 한성 오피스텔에 들이닥쳤다는 한 통의 전화에, 그는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의 와이프.
김지혜와의 혼인은 사랑이 결여되었다.
물론 김지혜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고창석은 조건을 보고 그녀를 선택했다.
김지혜의 집안.
검사 출신의 아버지를 둔 그녀의 집안은 대산 바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고, 실제로 고창석이 실무를 보는 과정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다. 계산대로였다. 학업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장남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배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지혜는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외모는 평범하나, 그녀의 집안이라면 자신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리라 믿었다.
일사천리였다.
이제 고지가 코앞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자신의 스폰녀가 와이프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와이프가 스폰녀의 존재를 알면 모든 게 끝이야. 장인어른이 내게 말했었지. 사위인 내가 어떤 일을 저질러도 앞으로 자신은 내 편을 들어 주겠지만, 지혜 눈에 눈물이 나오는 순간 그때는 끝이라고.’
애가 탔다.
장인어른은 그리 깨끗한 인물이 아니었다.
적당히 썩었다.
검사 출신이면서도 대산에 건물을 하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살 생각이 없는 고창석으로서는 최고의 장인어른이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여자 문제를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결혼 전에 여자를 수도 없이 갈아치우던 그의 욕구는 참을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와이프인 김지혜의 외모가 평범했기에, 그는 업소를 몰래 오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만난 업소녀.
웬만한 연예인 뺨을 치는 외모에 그녀를 스폰하게 되었고, 김지혜에게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따로 오피스텔을 구해 주었다. 완벽했다. 집에서만큼은 와이프에게 충실하다면, 지금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들켜 버렸다.
신호가 막힐 때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냥 액셀을 밟아 버리고 싶었다.
‘일단 지혜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을 거야. 오피스텔에 도착하면 내가 잠시 시간을 버는 사이에, 어떻게든 여자를 밖으로 빼돌려야만 해. 어차피 오피스텔의 명의는 차명(借名)이고, 대충 직원들 숙소라고 둘러댄다면 지혜도 어쩔 방법은 없겠지. 확신과 의심은 다른 문제니까. 내가 늦지 않게 도착해야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할 여지라도 있어.’
전화가 온 시점.
아직 오피스텔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곳에 대기하는 직원이 김지혜를 발견했고, 스폰녀는 빠르게 문을 잠그면서 버티는 것을 택했다.
기회가 있었다.
상황을 수습할 기회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오피스텔에 도착한 그는, 제발 일어나지 않길 바라던 참담한 광경을 마주하고 말았다.
“……아아.”
바닥에 널브러진 도어락.
그리고 활짝 열린 문.
그 안을 확인하자, 고창석의 와이프인 김지혜가 한 여성의 머리를 붙잡고 뺨을 날려 대고 있었다.
짜악, 짜악!
“야 이 개년아. 감히 남의 남편과 놀아나?!”
끝났다.
고창석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 * *
다음 날.
명진건설의 두 아들.
고창범과 고창석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싸늘하게 굳은 고명진의 표정에, 고창석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본인의 잘못을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쯧쯧, 한심한 새끼.”
고명진이 시선을 돌렸다.
나름대로 사람 구실을 하는 자식이라고 생각했건만, 바람 문제로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바깥사돈에게는 연락드렸다. 내 아들이 크게 실수했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하게 다그칠 테니 이혼까지는 가지 말자고. 그래도 바깥사돈이 대산에서의 평판을 생각해서 내 말을 따라 주기로 했지만, 당분간은 별거하면서 네가 어떻게 사죄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은 개뿔. 남자 새끼가 아랫도리를 잘못 놀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이 아비가 신신당부했을 텐데. 계집질이나 하고 다닐 거면, 차라리 네 형인 창범이처럼 병신같이 노총각으로 살았어야지!”
할 말이 없었다.
다소 센 어휘를 구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고창석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휴, 자식 농사 다 망했구나.”
고명진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사돈 집안.
하나뿐인 딸을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집이다.
변명도 할 수 없게 불륜 사실을 걸려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이전처럼 맹목적으로 고창석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한심했다. 차라리 들키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후계자를 결정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스스로의 기회를 망치는 고창석의 모습은 한심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비서에 의하면, 고창범 또한 최근에 사고를 쳤다고 들었다.
“그리고 고창범. 넌 뭔데 경찰서를 들락거려?”
진실은 알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며, 고창범이 일방적으로 휘말린 일이라는 것을.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문제지만, 고창석의 문제가 터지니 고창범 또한 괜히 탐탁지 않게 보였다. 고씨 가문의 장남이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고명진은 후계자 문제로 머리 아플 일이 없었을 것이다.
화가 났다.
회의감도 들었다.
자신이 아비로서 똑바로 살지 못했으니, 두 아들이 이 모양 이 꼴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평소처럼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바락바락 우겨 대겠지. 그리고 본인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뿐인 동생이 추락하는 것을 즐거워할 테고. 명진건설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구나.’
그런데.
평소와 똑같은 반응을 예상하던 고명진은, 진심으로 반성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고창범을 발견했다.
이 상황.
김현성이 예상한 시나리오였다.
고창범은 떨리는 마음을 삼키며, 최대한 죄송스럽다는 목소리로 계획한 멘트를 읊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역시 네 잘못을…… 응?”
순간.
고명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성하는 태도.
그건, 고명진으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