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9화 (9/130)

2. 명진건설 (4)

고창석의 일.

언뜻 보면 기회였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그의 평판을 깎아내린다면, 고창범에게도 분명히 기회가 생길 것이다.

고창범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성의 계획을 듣고, 그는 신나서 동조했다.

“옳거니! 창석이의 더러운 여자 문제를 들쑤셔서 와이프 집안을 떨어져 나가게 만들자는 거지. 아주 좋은 방법이야. 아버지에게 창석이 같은 녀석이야말로 고씨 가문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존재라고 비난한다면, 아버지도 후계자로서의 고창석에게 큰 의문을 가지게 되겠지.”

“아니요.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이 계획을 진행하자면서.”

고창범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말처럼.

배경을 제거하는 전략임에는 분명하나, 그것을 빌미로 고창석을 깎아내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시절.

병실의 규율과는 다르게 하루 내내 TV를 틀어 놓는 간병인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김현성은 세상의 많은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온갖 사건 사고. 누가 음주운전을 했다느니, 누가 무엇을 폭로했다느니, 온전히 청력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그 기억들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중.

고명진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문제없이 은퇴했던 그는, 한 기자의 회고록(回顧錄)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기자로서 살아가던 시절, 제가 조사했던 유명 인사 중에는 특이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예로 들면 명진건설의 초대 회장이었던 고명진 회장. 사람들은 멍청한 두 아들의 경쟁으로 인해 명진건설이 망할 뻔했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그와 다릅니다. 고명진 회장은 두 아들의 경쟁 방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더러운 짓을 저질러도 그는 개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리하는 쪽을 후계자로 택할 생각이었습니다. 애초에 어떻게든 가족 경영으로 이끌어 가려던 고명진 회장이 리스크를 감당한 일인 것이죠. 만약 고창석이 악질적인 방법으로라도 승리했다면, 고창범이 그 사실을 알고 영리하게 대응했다면. 전문 경영인을 내세운 현재의 명진건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재밌는 이슈였다.

단순히 고명진 회장이 생각보다 무서운 인물이라는 말로 끝나는, 아주 잠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김현성의 머릿속에 뿌리를 내렸다. 복수를 행하는 일련의 계획에서, 명진건설은 고명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요한 포인트였다.

‘고명진 회장은 고창석이 여자를 만나는 것도, 고창범을 무너트리기 위해 악의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방관했다는 것은 그의 성향을 의미해.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어떻게든 안고 가려던 두 아들을 버린 것도 그런 성향에 의한 결과물이겠지. 그렇다면 바람이 밝혀진 상황에서 고창범이 대놓고 비난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일까?’

아니다.

그건 현명하지 않다.

고창범의 평판은 그대로인데, 고창석을 비난하는 모습만으로는 고명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

회장 자리에 어울리는 태도.

고창범이 그런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은 어떨까.

고창석의 가치가 떨어져 내릴 때, 고창범의 새로운 모습은 분명히 어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현성이 말했다.

“지금부터의 계획은…….”

대화는 길었다.

세세하게 계획을 말해 주었다.

말할 때의 태도와 표정, 그리고 어떤 말을 할 것인가도.

처음 계획을 전달받을 때만 하더라도 긴가민가했던 고창범이었지만, 예상처럼 흘러가는 상황에 지금으로서는 김현성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떨어질 평판도 없는 그였다. 계획이 실패한다면 김현성을 확실하게 보복할 생각으로, 일단 계획했던 그대로의 멘트를 내뱉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명진건설의 장남인 제가 문제를 일으킨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제 위치를 생각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창석이의 일은 제가 한 번 더 꾸짖도록 하겠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고창범은 쾌재를 불렀다.

‘통했다.’

확실했다.

아버지의 저 표정은.

분명히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 * *

고창범의 태도.

고명진으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잘못을 저질러도 인정하지 않던 장남인데, 이번에는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도 변명하지 않았다.

‘……설마 변했다는 건가.’

장남.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렵게 낳은 첫째를 정말 사랑했던 고명진은, 능력이 조금 모자랄지라도 명진건설을 통째로 물려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죽으면 모두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외형적으로 자신을 너무나도 닮은 고창범이 명진건설을 잘 이끌어 준다면, 회장이기 전에 아비로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너무나도 큰 사랑을 주었기 때문일까.

능력도 없는 주제에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시간이 갈수록 장남에 대한 실망감만 커졌다.

그리고 오늘.

고창범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변명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동생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창범이의 사건은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평소의 창범이라면, 상대의 잘못을 운운하면서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겠지. 명진건설의 후계자로서 애초에 그러한 사건에 휘말렸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아이가 아니야. 게다가 창석이의 사건을 비난하지 않았다. 겨우 그런 고자질과 비난으로는, 명진건설의 회장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건가.’

만약.

비난을 통해 고창석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면, 오히려 자비로운 태도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와이프와 불화가 생겼다고는 하나 고창석의 입지는 견고한 상태고, 개인의 능력과 평판을 비교했을 때 고창석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겨우 그를 비난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자질과 비난은 회장인 자신에게 고창석을 같이 손가락질하자고 요청하는 것과 같기에, 후계자 경쟁 구도에서 고창범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발을 뺐다.

이번 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인데도, 굳이 겉으로 그 사실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고창범의 표정이 보였다.

묘하게 씰룩이는 입가에, 고명진은 그제야 진실이 보였다.

‘그런 거였나. 창범이가 영리한 참모(參謀)를 두었구나.’

확실했다.

건설 바닥에서 수십 년을 구른 고명진이다.

밑바닥에서부터 회장의 자리에 오른 그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만으로 고창범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지켜봐 왔던 장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련의 상황은 그의 머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행동하면 된다고 지시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웃음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는 미심쩍어하던 일이 성공했기에, 고창범으로서는 표정을 완전히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 그리고 불안해하면서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 그것 또한 회장으로서의 자질이라 할 수 있지.’

기뻤다.

장남의 무능력함.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천지가 개벽해도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지만, 그가 능력 있는 사람을 신뢰하고 곁에 두었다는 것은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했다. 예전에 장남에게 했던 말처럼. 사람을 잘 다스리기만 하더라도,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던 장남이 회장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웃음을 삼켰다.

감정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치하할 필요는 있었다.

“얘기는 들었다. 상대가 먼저 네게 시비를 걸었다고. 그런데도 최대한 상황을 피하려고 했다지.”

그러고는 툭.

고창범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잘했다. 의연하게 대처한 네가 자랑스럽구나.”

* * *

탈칵.

회장실 문이 닫혔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고창석은, 문이 닫히자마자 표정을 단번에 바꾸었다.

“씨발, 줫 같네.”

어제 하루.

정말 최악의 하루였다.

김지혜에게 쌍욕을 들으며 뺨을 얻어맞았고, 장인어른의 차가운 눈길에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의 불호령까지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는 그의 시야에, 넋을 놓고 있는 고창범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개새끼가 한성 오피스텔의 위치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잡히기만 해 봐. 아주 갈기갈기 찢어발길 테니까.”

대놓고 저격했다.

심증이었다.

자신을 공격해서 이득을 볼 사람은 고창범밖에 없기에, 분명히 그의 소행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고창석이 뭐라고 떠들든, 고창범의 의식은 그곳에 없었다.

“잘했다. 의연하게 대처한 네가 자랑스럽구나.”

“잘했다. 의연하게 대처한…….”

“잘했다. 의연하게…….”

머릿속.

꽃밭이 펼쳐졌다.

황홀한 그 세상 속에서, 성인이 돼서는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발끝에서부터 자르르 올라오는 전율에, 고창범은 기쁜 마음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날 인정했어. 내가 의연하게 잘 대처했다고, 날 바라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고!’

짜릿했다.

사실 스스로도 본인의 결핍을 알지 못했다.

망나니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버지의 인정에 대한 갈망이 쌓여 갔는데, 오늘 하루로 완전히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구시렁거리며 떠나는 고창석의 존재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중요했고, 이 순간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일.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길 바랐다.

앞으로도 계속, 한결같이 아버지가 자신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길 열망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이 있었다.

‘김현성!’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였다.

고창범이 휴대폰을 들었다.

띠리리.

탈칵.

“아이고, 우리 예쁜 현성아. 지금 어디야? 내가 당장 그리로 갈게.”

* * *

하루.

정확히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재회의 순간에, 고창범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김현성을 바라보았다.

“네 덕분에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인정이라는 것을 받아 봤어. 그러니까 어서 말해 봐. 앞으로 내가 회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지? 네 말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군말 없이 따를게.”

태도가 완전히 변했다.

단 한 번의 증명.

그것이면 충분했다.

17살의 나이를 떠나, 놀라운 결과물을 직접 목격했으니 이제는 김현성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이번 일은 시작에 불과해요. 고창석이 와이프와 멀어졌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배경이 존재하지 않았던 고창범 씨와 똑같은 위치로 내려온 것에 불과해요. 정말 회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가지 조건에서도 승리해야겠죠. 그것들은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일단 말단으로 들어가서 실무를 배우고 있으면, 제가 적당한 때에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나보고 말단으로 들어가라고? 그건…… 에이씨, 알겠어! 네 말인데 뭔들 못 하겠어?”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예.”

고창범과 김현성.

둘의 관계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떻게든 고창범을 회장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는, 김현성에게도 그만한 보상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저와 나누었던 대화 기억하시죠? 우리의 관계는 명확한 대가성이라고요. 저는 앞으로 고창범 씨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고창범 씨는 그런 저를 위해서 제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셔야 해요.”

“말만 해. 우리 현성이를 위해서 뭔들 못 하겠어? 나 이래 봬도 의리의 고창범이라고.”

“좋네요.”

웃었다.

고창범을 택한 또 다른 이유.

적어도 고창석과는 다르게, 자신의 사람을 확실하게 챙기는 인물이었다.

김현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고창범 씨가 제 후견인(後見人)이 되어 주세요.”

명진건설.

앞으로의 복수를 위한, 가장 중요한 퍼즐을 손에 쥐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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