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12화 (12/130)

3. 혼란의 징계위원회 (3)

며칠 전.

김현성의 요구에, 고창범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예상 밖이었다.

자신에게 접근해 물질적인 것들을 요구할 줄 알았건만, 뜬금없이 튀어나온 후견인이라는 단어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새삼 김현성의 나이가 보였다. 17살이면 아직 어른이 필요한 나이이기는 하지만, 어른을 뛰어넘는 심계(深計)를 지닌 아이가 후견인을 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왜지? 차라리 돈을 달라고 했으면 간단하게 보상받을 수 있을 텐데.”

“앞으로 제가 하려는 일에 고창범 씨의 재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단순히 재력만 필요했다면, 제게는 다른 대안들이 있었어요.”

방법은 많았다.

미래 지식.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병실에 누워 수도 없이 계획을 되새겼을 때, 단순히 재력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의 중심에 있다. 재력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갖춘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그만한 위치에 올라갈 필요가 있었다.

고창범.

중요한 퍼즐이다.

먼 미래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갔지만, 현생의 고창범은 완전히 다른 존재여야만 한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이 학교에서 많은 사고를 칠 생각이에요. 어린아이들이 흔하게 저지르는 학교 폭력 정도가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만큼 큰 사건들을요. 그때마다 고창범 씨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명진건설 장남이라는 위치, 그리고 막대한 재력. 고창범 씨가 갖춘 조건들이라면, 적어도 이 대산 바닥에서는 확실히 먹히겠죠.”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전생이 떠올랐다.

수도 없이 되새겼던 지옥 같은 순간에, 김현성이 살의를 보였다.

“저는 고창범 씨와의 관계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요. 만약 고창범 씨가 제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다면, 제가 만족할 만큼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 자리에서 약속드릴게요. 저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창범 씨를 명진건설 회장 자리에 올려 주겠다고. 나아가, 그 이상의 권력과 재력을 양손에 쥐여 주겠노라고. 그래야 제가 누구를 상대하든 고창범 씨가 당당해질 수 있겠죠.”

고창범이 씰룩, 웃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어린아이의 헛소리라고 흘려들을 수 있겠지만, 고창범은 이미 김현성의 능력을 일부나마 확인했다.

그는 진짜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고창석을 상대로 보여 주었던 성과가.

김현성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고창범이 말했다.

“현성아.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라.”

김현성의 부탁.

무능력한 고창범이 유일하게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학창 시절, 이 대산 바닥에서 날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 내가 학교에서 온갖 개지랄을 떨면서도 어떻게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겠어? 난 명진건설의 후광을 활용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야. 나만 믿어. 내가 뒤를 봐주는 김현성이가 무슨 사고를 치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 * *

다시 현재.

고창범이 보란 듯이 명함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툭.

“보세요. 내가 누구인지. 사실 웬만해서는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정도를 모르시네. 현성이는 제가 정말 사랑하는 동생입니다.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사고를 칠 아이가 아닌데, 징계위원회를 소집한다기에 제가 참석하겠다고 현성이를 직접 설득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

현성이.

단어에 힘을 주었다.

특별한 관계임을 부각하면서, 고창범은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명함을 툭툭 건드렸다.

“사실 명진건설의 이름으로 천일 고등학교를 지원할 계획이었습니다. 천일은 대산의 명문이고, 우리 현성이가 학교를 잘 다녔으면 하는 마음에 제 나름대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실망스럽네요. 천일이, 이렇게까지 조잡하고 보잘것없는 학교인 줄 몰랐습니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협박이라니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김순자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으나, 명진건설이 언급되는 순간부터 김순자는 정신이 없었다.

“교육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학생들이 올바른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체 우리 현성이가 처벌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학교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주먹을 들었다고 처벌할 생각이라면, 왜 그 이전에 폭력이 만연한 때에 천일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까? 확실하게 해명하십시오. 만약 그냥 몰랐다는 이유로, 학교 폭력을 주도했던 정민호의 부모가 돈이 많다는 이유로 흐지부지 넘어간 것이라면 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제 모든 것을 동원할 것입니다.”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김현성을 처벌한다면.

명진건설의 배경을 동원하겠다고 경고했다.

협박성 발언은 지적받아 마땅한 부분이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고창범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창범은 시종일관 명확한 의사를 드러냈다.

“제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글러 먹은 녀석들과는 단 10원도 거래하지 말라고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명진건설을 이끌게 된다면, 우리 현성이에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과는 거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협박으로 받아들이셔도 좋습니다. 이건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지나온 과거가 명백하게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말해 주는데, 두 귀를 막고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제 기준에서 돈을 받아 처먹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궤변이었다.

사건에 집중해야 하는데, 고창범은 적극적으로 본질을 흐리며 선악의 구도를 나누었다.

상대는 악이고.

김현성은 선이다.

상대가 병실에 실려 갔지만, 악을 처벌한 것은 올바른 대응이다.

만약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명진건설과는 거래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명진건설.

대산을 대표하는 기업.

그들과는 차마 틀어질 수 없기에,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할 만큼 적당히 썩은 사람들로서는 김순자가 분노하든 말든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단번에 반전되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김순자의 사람들은 단 한 사람에게 문제를 전가할 수밖에 없었다.

오대환.

이 분위기를 뒤엎을 사람은, 천일의 교장인 그밖에 없었다.

* * *

집중되는 시선.

오대환이 당황했다.

김순자는 눈으로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그 또한 섣불리 말을 내뱉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명진건설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김현성이 명진의 장남을 후견인으로 두었지?’

매년.

새로운 학생들이 입학할 때마다, 오대환은 집요할 정도로 학생들의 배경을 파악했다.

만약 재력가의 자식이라면 어떻게든 단물을 뽑아낼 의도였고, 그렇게 정민호의 부모님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현성은 관심에서 벗어났다. 학교의 평균 성적을 위해서는 필요한 존재이나, 부모님도 없이 할머니와 사는 김현성에게 물질적으로 빼먹을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명진건설이라니.

그와 관련한 한 줄의 정보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이 징계위원회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다.

‘명진건설의 장남은 대놓고 김현성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 만약 정민호를 보호하겠다고 정민호의 손을 들어 준다면, 나는 앞으로 명진건설과는 아무런 인연을 만들어 갈 수 없겠지. 아니, 명진의 반대편이라는 이유로 이 대산 바닥에서 엄청나게 배척받을 것이 분명해.’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벼랑 끝이었다.

불안해하던 오대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민호를 버린다면?’

전율이 일었다.

단 하나의 전제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엄청난 기회야. 고창범은 김현성 때문에 천일을 지원할 생각이었다고 말했어. 만약 대산을 등에 업는다면, 천일이 전국구 명문으로 거듭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정민호의 부모님, 명진건설.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을까. 당장은 배신자라고 돌을 맞을지라도, 천일의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건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야.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천일이 권력을 움켜쥔다면 돌을 던질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고.’

표정이 바뀌었다.

결심이 섰다.

사람들의 시선에, 오대환이 말했다.

“고창범 씨가 분노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학기 초부터 정민호를 중심으로 학교 폭력이 만연하다는 사실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정민호 어머니. 지금은 발언할 차례가 아니십니다. 저는 지금 누군가의 잘잘못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며, 저는 모든 사실을 종합해서 징계위원회의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들도 알았다.

오대환이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을.

김순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상황을 해결하려 했지만, 오대환은 결정을 내린 이상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김현성 학생은 제가 인정하는 천일 최고의 우등생입니다. 그러니 김현성 학생의 입장을 들어 보고 이번 일을 결정하시죠.”

발언권을 넘겼다.

확 바뀐 분위기.

지금부터는 김현성이 나설 차례였다.

* * *

참 재밌는 상황이었다.

전생.

지금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그때의 오대환과 김영철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난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들이야말로 내가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야. 만약 저들이 나를 위해 가해자들이 잘못했다고 말했다면. 그들을 처벌하고 나를 보호해 주었다면, 나는 처참하게 죽지 않았겠지.’

기쁘지 않았다.

분노가 들끓었다.

태도를 바꾸는 그들의 모습은, 김현성에게 회귀의 목적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김현성이 말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 친구들은 박민철 패거리가 학교 폭력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선생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아는 박민철은 그럴 아이가 아니다. 친구들끼리 장난하다가 그런 것 아니냐. 사내답게 문제를 해결해라. 가끔은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나서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그분들은 학교 폭력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조심하라는 말뿐인 경고로 오히려 폭력에 불을 붙였습니다. 예, 저는 정민호를 때렸습니다. 박민철 패거리를 응급실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째서 제가 행한 단 한 번의 폭력으로 징계위원회가 열린 겁니까? 그동안 친구들의 얼굴에 멍이 들어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학교가, 어째서 학교 폭력에 대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까?”

17살.

어린아이의 호소가 아니었다.

사납게 말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폭력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옥상에서 떨어졌어도, 학교는 언제나 그렇듯 힘이 있는 학생들의 편을 들었을 겁니다.”

전생이 그랬다.

식물인간.

병실에 누워 있던 김현성은, 가해 학생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졸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실이었다.

유전무죄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

불변의 진리다.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면, 김현성은 지금부터 권력자로서 불변의 진리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저는 제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구구절절하게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정민호를 비롯한 그 패거리의 처벌입니다. 그들을 확실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을 공론화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 입장이고, 제 뜻입니다.”

정민호를 보았다.

놀란 눈의 정민호에게, 강조하듯 사납게 말했다.

“확실한 처벌만이 이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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