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변화 (1)
이번 징계위원회를 준비하며 김영철은 이정민을 찾아갔었다.
그때만 해도 고창범의 존재를 몰랐고, 김현성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정민아. 징계위원회에서 증언해 줄 수 있겠니? 애초에 박민철이 널 건드리지 않았으면, 현성이가 박민철 패거리와 싸울 일도 없었잖아. 어렵지 않은 일이야. 그냥 네가 경험한 그대로를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머지는 이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할게.”
이정민.
이번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다.
김현성은 이정민이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섰기에, 이정민이 박민철 패거리의 행실을 폭로한다면 상황을 뒤집을 가능성이 있었다. 김영철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장이었다. 오대환 교장과 김순자가 주도하는 판을 뒤엎는 것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김현성에게 자신이 이렇게 노력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최선이었다.
김현성을 위해 이정민이 당연히 도와주리라고 예상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이정민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김영철의 부탁.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도 김현성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징계위원회가 끝난 이후가 문제였다. 박민철 패거리는 정민호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학업에 복귀할 테고, 그때부터 박민철 패거리의 괴롭힘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자신의 미래?
뻔했다.
어김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처량한 신세.
만약 김현성을 도와주었다간, 박민철 패거리는 이전보다 더욱 잔인하게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다른 친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이정민은 박민철이 처음 말을 건 순간부터 지옥에 있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자신은 살아남고 싶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이정민의 모습에, 김영철은 답답하다는 듯이 분노를 토해 냈다.
“아니. 김현성은 널 도와주겠다고 징계위원회에 끌려가고 그 난리를 피우는데, 너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해 놓고 그냥 모른 척하겠다고? 정민아. 이건 아니야. 네가 무슨 심정인지는 잘 알겠는데, 그건 너 하나만 살겠다고 김현성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어. 만약 이러다 김현성이 퇴학이라도 당하면? 너 죄책감을 견딜 수 있겠어? 막말로 너 같은 애를 다른 누가 도와주겠냐고!”
“…….”
대답은 없었다.
김영철도 살기 위해서 막말을 퍼부었으나, 공포에 질린 이정민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에라이, 씨발.”
콰앙!
책상을 걷어찼다.
김영철은 씩씩거리면서, 이정민을 내버려 두고 교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만 해도 이정민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징계위원회가 박민철 패거리 네 명의 퇴학으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 * *
이정민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신의 행동을 지적하는 말에, 그로서는 뭐라 변명할 수 없었다.
솔직히 안일하게 생각했다.
김현성은 자신을 도와준 착한 친구였기에, 감사 인사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김현성은 사나운 얼굴로 이정민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내 책임이야. 네가 맞는 모습을 보고 나섰다고는 해도, 네 명을 응급실로 보낸 일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야. 그런데 징계위원회에서 겁이 난다고 증언도 하지 않겠다던 네가 이렇게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맞는 일이야? 왜?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았어?”
징계위원회가 끝나고.
김영철은 많은 말을 했다.
앞으로 자신을 잘 봐달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그는 이정민의 비겁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고창범의 등장으로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지, 사실 유일하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존재가 김현성을 외면한 것이지 않은가. 양아치의 관점에서도 이정민은 비겁한 판단을 내렸다.
“……미, 미안해.”
이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똑같았다.
김영철에게 보인 반응처럼, 그는 겁에 질려서 변명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그의 모습.
자신의 과거가 투영되었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저항하던 김현성도 끊임없는 괴롭힘에 의지가 점점 꺾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정민과 비슷하게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뭘 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 와중에도 학업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발악해도 박민철 패거리에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싸움 실력은 무의미했다.
한두 명은 이겨도 머릿수에서 밀렸고, 어떻게 상대를 쓰러트린다고 한들 처벌은 김현성의 몫이었다.
참담한 현실.
그때의 김현성은 부정적이었다.
만약 전생에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징계위원회에 끌려갔다면 자신도 반드시 그를 위해서 학교생활을 걸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유일한 희망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이정민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 이후에 자신에게 향하는 비난의 시선은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해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정민은 비겁했다.
착하기만 했던 전생의 자신은 그런 비겁함을 눈감아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현생의 자신은 아니다.
“지랄하네. 앞으로 네가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내 앞에서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
차갑게 내뱉은 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정민은, 참담한 얼굴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소란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박민철을 쓰러트렸다고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이정민 이후에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들어와 1교시 수업을 진행하자, 김현성은 친구들이 기억하는 모습처럼 수업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적이 동반되어야만 해.’
성적.
분란의 시발점이었다.
골든 서클에서 괴롭힘의 대상을 정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자신들이 관리하는 회원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는 학생들을 추락시키기 위함이다. 전생의 괴롭힘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우수한 성적을 거둔 김현성은 눈엣가시였고, 고등학교 1학년 중간고사를 앞둔 상황에서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신영민이 박민철을 통해 김현성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이 교실, 혹은 이 학교 어딘가에 진범이 있었다.
김현성의 성적을 시기 질투하고, 어떻게든 추락시켜서 자신이 더 높은 성적을 차지하려는 존재.
몇몇 의심이 가는 인물이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앞으로도 현재의 포지션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여전히 눈엣가시처럼 보일 정도로 최상위 성적을 유지한다면, 골든 서클은 의뢰를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때가.
기회였다.
모조리 바닥에 처박을 것이다.
골든 서클에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릴 것이다.
‘내 궁극적인 목적은 대산을 평정하고 강남으로 진출하는 거야. 그리고 강남에서도 골든 서클이 내 존재를 경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의 성적이 필요해. 의뢰인들이 분노하며 그들을 다그치게 할 압도적인 성적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전생.
김현성의 성적은 전국에서 놀았다.
그래서 마지막 수능을 앞두고 옥상에서 떨어졌던 것이고, 지금 공부하는 내용은 머릿속에 각인되었을 정도로 완벽하게 이해한 부분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김현성은 방심하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이번에는 전국 수준을 넘어서 아예 최고의 자리에 오르길 바랐다.
곧.
중간고사였다.
자신의 성적이 밝혀지는 순간, 대산에는 엄청난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설명하는 내용은 중간고사에서…….”
선생님의 설명.
몇몇 학생들은 지루하다며 꾸벅꾸벅 조는 시간에, 김현성은 독기에 찬 눈빛으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점심시간.
점심을 먹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그때, 학교 옥상에서 한 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후우.”
“영민아.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박민철 패거리가 퇴학당하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잖아.”
“그렇긴 하지.”
툭.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이미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여러 개 쌓여 있었지만, 신영민이라고 불린 소년은 담배 하나를 더 입에 물었다.
칙칙.
“참 X 같네. 별거 아닌 문제라고 생각해서 의뢰를 덥석 받아들였는데, 일이 아주 제대로 꼬여 버렸어. 골든 서클 그 새끼들이 문제야. 의뢰할 때만 하더라도 분명히 아무런 배경도 없는 녀석이라면서 단가를 후려치더니,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까 명진건설 장남을 후견인으로 둔 녀석이었잖아. 이러면 대산에서 배경을 들이밀어서 김현성을 찍어 누를 방법은 없어.”
“……그렇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대산에서 명진건설을 이길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포기할 거야?”
“아니.”
연기를 깊게 빨았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 의뢰로 받은 선수금은 오백만 원.
이미 전부 사용해 버렸다.
나중에 성공 비용으로 천만 원을 추가적으로 받기로 했기에, 신영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돈을 전부 쟁취할 생각이었다. 물론 상황이 복잡하기는 했다. 박민철 패거리를 홀로 응급실에 보낼 만큼 무지막지한 녀석이라면, 괴롭힘으로 성적을 깎아내리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생인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영민이 말했다.
“의뢰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어.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면, 차라리 의뢰 조건이 달라진 것을 빌미로 더 좋은 대가를 받아 낼 수 있겠지. 뭐 개 같기는 해도 나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고등학생 수준이야 뻔하잖아. 겨우 고등학생 하나를 처리하는 일로 수천만 원을 땡길 수 있는 일이면, 우리로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해야 할 문제지.”
방법은 간단했다.
정공법.
학교 폭력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다.
아무리 배경을 끌어들인다고 한들, 당장 곁에 있는 친구들의 괴롭힘은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신영민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 1학년 짱이 누구야? 걔보고 당장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해.”
* * *
학교가 끝났다.
정적인 하루였다.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다시 수업을 듣고.
반복되는 상황에 김현성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김현성과 친하게 지내 왔던 친구들은 모범생이라고 할 만한 부류였기에, 박민철 패거리 사건 이후로 김현성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하루아침에 달라진 김현성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김현성은 보통 이상의 잔인한 면모를 보였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친구들과의 일상적인 현실을 그리워하기에는, 김현성의 내부에서 들끓는 분노가 너무나도 컸다.
오늘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새로운 목적지가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 공부만큼이나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 있어. 바로 내 개인의 힘. 눈앞에 맞닥트린 상황에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한다면, 내가 갖춘 모든 조건은 무의미해. 어린 고등학생들의 세상에서 눈앞의 폭력은 절대적이니까. 그리고 골든 서클의 의뢰를 받은 사람이 신영민이 확실하다면, 지금의 내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어.’
이미.
밑그림은 그린 상태였다.
개인의 힘을 갖추기 위해서, 김현성은 대산 출신의 한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걸음을 옮겼다.
우뚝.
그리고 도착한 장소.
색이 바랜 간판을 올려 보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정두철 체육관]
정두철.
종합 격투기 선수이면서, 대한민국 최초로 UFC(Ultimate Fight Club)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존재.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름.
그가 바로 김현성이 바라는 또 다른 퍼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