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변화 (4)
김현성을 떠나보내고.
체육관 문을 닫은 정두철은, 맨바닥에 앉아 안주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벌컥.
단번에 들이켰다.
벌써 한 병을 비운 상태였지만, 취기가 올라오기는커녕 취하는 느낌조차 없었다.
“……두철아. 넌 정말 최악이구나.”
조금 전.
그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김현성을 극한으로 몰아붙였지만, 정말 우습게도 김현성이 쓰러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정말 쓰러진다면 1억을 받지 못할 테니까. 이성과 감성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에, 끝까지 버텨 낸 김현성을 바라보며 정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분노와 안도.
상반되는 감정이었다.
김현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버텨 냈지만, 사실 정말 쓰러트릴 의도라면 그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속인 거겠지. 김현성이 내가 정한 기준만 넘어선다면, 그나마 돈에 팔려 가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나는 처음부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던 거야.’
물론.
김현성의 의지에 놀랐다.
그래서 더욱 강도를 세게 가져갔지만, 그렇다고 1억에 마음이 빼앗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휴대폰 화면이 정두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현성은 내일까지 1억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겨우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그의 계좌에는 1억이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입금자 고창범 100,000,000원]
1억.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은 UFC 챔피언 정도 되면 정말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다르다.
몸 상태에 따라 1년에 1~2번밖에 경기를 치르지 못하는 종합 격투기의 특성상, 챔피언을 준비하기까지의 금전적인 지출을 모두 지급하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챔피언들은 사정이 나았다. 그 아래 단계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파이트머니를 받았으며, 대부분 격투기 단체가 벌어들이는 구조에 몇몇 선수들은 정식으로 항의하기까지 했다.
만약에 타이틀전을 몇 번 더 치렀다면.
정두철은 이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의 빚을 갚고 막 돈을 벌어들이려는 찰나에, 하필이면 약물 사건이 터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1억의 의미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가계부를 계산하는 아내에게, 자신을 만나 고생만 하는 아내에게 그래도 몇 년간은 편안함을 안길 수 있는 그런 금액이었다.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김현성을 가르치는 일.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안다면 신랄하게 비난하겠지만, 사실 어쩌면 이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 1억이 아니었다면, 나는 브로커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며칠 전.
새로운 격투 단체의 브로커가 특별한 제안을 해 왔다.
UFC 챔피언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경기를 뛰어 달라는 것인데, 전성기의 기량을 보여 주기 위해 약물 사용을 강요했다. 심각하게 고민했다. 파이트머니가 수천만 원에 달했기에, 어차피 더러워진 몸이라면 다시 한번 약물을 사용해도 괜찮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이 힘들 뿐이다.
두 번은 상황의 문제.
약물 사용을 그렇게 후회하고도, 정두철은 하루하루 무너지는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약물을 지적하는 김현성의 말에 과도하게 발끈했는지도 모른다.
전생에 그는 브로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격투 단체에서 경기를 뛰었고, 또다시 약물 사용이 발각되면서 선수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김무열의 발굴은 그 이후의 일. 정두철이 살아온 삶을 알기에, 김현성은 거리낌 없이 제안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존재였다.
한참 술을 들이켜던 정두철이, 브로커에게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그 제안은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돈이 있다면.
브로커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1억이면 충분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탈선이야. 이걸 끝으로, 더는 돈에 팔려 가는 일은 없어.”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고.
앞으로 후배들을 가르칠 것이다.
자신과 똑같은 노선을 밟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말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실력 있는 후배들을.
* * *
김현성의 집이 발칵 뒤집혔다.
손자를 기다리며 밥상을 다시 준비하던 할머니는, 김현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아이고, 내 새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김현성의 얼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얼굴 전체가 퉁퉁 부었고, 옷 곳곳에 핏자국이 보였다.
할머니의 반응을 예상해서 찜질방이라도 들르려고 했지만, 거울을 한번 확인하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건 어떻게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고, 김현성의 몸 상태를 살피던 할머니가 분노한 듯 소리쳤다.
“언 놈이야. 어떤 개자식이 우리 새끼를 이렇게 만들었어? 말만 해. 이 할미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괜찮아요, 할머니.”
“괜찮기는! 이 몰골이 뭐가 괜찮아!”
할머니는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치는 할머니의 모습에, 김현성은 왠지 모르게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
어릴 때는 할머니가 참 독하다고 생각했다.
먹는 것 하나, 입는 것 하나 허투루 생각하는 법이 없는 분이었고, 매일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미운 적도 많았다. 그랬던 할머니가 김현성이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는 아끼지 않았다. 비싸다는 서울 병원에 입원시켰고, 치료에 필요하다면 적금을 해지하면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잘 만들어 왔던 집안이, 김현성 단 한 명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자신으로 인해 고생했다니.
울컥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자, 할머니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사내새끼가 울긴 왜 울어!”
결국.
학교에서 가볍게 치고받은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할머니는 상대편을 찾아가서 엎어 버리겠다고 말했지만, 김현성이 한 시간이 넘도록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동생인 김현진은 늦은 저녁까지 학원에 다니는 상황. 할머니와 먼저 밥을 먹기 시작한 김현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혹시 청약 통장 있지?”
“당연히 있지. 매달 10만 원씩, 벌써 십수 년을 넣었어.”
“이번에 명진건설에서 아파트 청약을 진행한다던데 한번 넣어 봐. 혹시 모르잖아. 당첨될지도.”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약 통장.
친한 은행 직원이 말해 줘서 가입한 게 십수 년 전인데, 그걸 사용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말이 청약이지 할머니에게 그것은 적금 통장이나 다름없었다. 손자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청약을 해지해서 등록금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청약에 당첨돼도 문제가 된다고 하던데.”
“그건 멋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요새는 대출이 잘 나와서, 이 빌라만 팔아도 잔금을 치르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정 감당하기 힘들면, 분양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도 되고.”
복잡한 말이었다.
할머니가 놀란 표정을 보였다.
“우리 손자가 언제부터 부동산 박사가 됐지?”
“박사는 무슨.”
김현성이 웃었다.
이번 삶.
단순히 복수만을 바라지 않았다.
하나뿐인 할머니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풍족하게 살기를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정두철처럼 1억을 그냥 주고 싶었지만, 조건 없이 거금을 건네준다면 할머니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일 것이 분명했다. 청약은 그럴듯한 핑계. 할머니의 이름으로 청약을 넣는 순간, 고창범은 알아서 당첨자의 이름에 할머니를 올려 줄 것이다.
김현성이 말했다.
“청약 꼭 넣어. 제발 잊어버리지 말고.”
국을 한 숟가락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따사로운 눈길에, 김현성은 울컥거리는 감정을 국과 함께 삼켜 냈다.
* * *
다음 날.
학교를 마친 김현성은 곧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정두철은 약속대로 훈련을 진행했고, 아직 초심자인 김현성을 위해 체력 단련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싸움이든, 스포츠든.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은 체력이 밑바탕 되어야만 한다. 주먹 몇 번 휘두르고 헉헉거릴 체력이라면, 뭘 가르치든 의미가 없다는 뜻이지. 김현성. 네가 그렇게 간절하다면 지금부터 악착같이 버텨라. 도중에 낙오되면, 난 그 이상은 가르치지 않을 테니까.”
정두철의 발언.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김현성의 수준에 맞게 눈높이를 낮추었지만, 그가 준비한 체력 단련 프로그램은 프로 선수들을 위한 것이었다. 가벼운 줄넘기부터 시작해서 스텝 밟기, 러닝머신, 덤벨 운동 등등 갖가지 운동으로 김현성을 몰아붙였다. 첫날이라서 대충할 법도 하지만, 정두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에 2시간. 단 2시간만 버텨라.”
말이 2시간이지, 그건 정말 끝나지 않는 지옥이었다.
김현성은 운동도 곧잘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만능으로 불렸는데, 체육 실기에서 항상 1등을 하던 김현성조차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나왔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박민철 패거리와 싸웠을 때보다도 더 극한으로 몰아가는 상황에, 김현성의 눈빛이 독기로 물들었다.
해내야만 했다.
신영민.
수년간 종합 격투기를 수련한 그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테고, 이따위 체력 훈련도 버텨 내지 못한다면 신영민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신영민은 최종 목표도 아니다. 천일을 넘어 강남에 진출해야 하는 김현성으로서는, 첫발을 내딛는 지금이 매우 중요했다.
강해지기 위한 준비.
고창범이든, 김영철이든 아무리 배경을 잘 갖추었다고 한들, 힘에서 밀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악에 받쳤다.
정두철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김현성은 땀을 비처럼 쏟아 내면서도 조금의 불만도 표출하지 않았다. 정두철은 김무열을 탄생시킨 존재다. 그의 가르침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훈련을 이행했다.
먼 훗날.
정두철은 자신을 가르친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학교 폭력 그 이상을 저지를 자신을 정두철이 가르쳤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는 약물 사건처럼 주변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정두철은 어차피 자신이 아니었다면 다시 약물에 손을 댈 사람이었고, 자신으로 인한 문제는 1억으로 충분히 보상했다.
딱 거기까지.
얻을 것만 얻을 생각이었다.
김현성은 남의 인생을 돌볼 만큼, 이번 삶에 인간적인 감정은 그리 남아 있지 않았다.
* * *
첫 훈련.
정두철은 김현성을 바라보며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2시간을 전부 버틴다고?’
말은 강하게 했지만, 사실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김현성이 쓰러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현성은 끝까지 버텼다.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화장실로 뛰어가서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면서도,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훈련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확실히 김현성에게는 반드시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정두철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했다.
‘확실히 재능이 있어. 이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프로 선수로 데뷔할지라도 성공할 수 있겠지.’
탐이 났다.
만약 일반 제자로 들어왔다면.
프로 선수로서 김현성의 미래를 진지하게 그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래로 맺어진 관계였기에, 괜히 어쭙잖은 생각으로 김현성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 받은 만큼 해 줄게. 학교에서는, 네 나이대에서는 그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게 만들어 주지.’
지도자로서의 길.
그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래서 체육관을 차렸던 것이고, 최근에 현역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일반적인 지도자들은 정석적인 방법을 말해 주는 반면, 정두철의 경우에는 일방적이지 않은 경험들까지 모두 섭렵했다.
약을 사용하는 선수들.
그런 약쟁이들까지 무릎 꿇릴 파괴적인 방법들.
흙탕물에 발을 들였기에, 본인이 더러워질지언정 정두철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전생.
3년 후의 정두철은 김무열을 만났다.
그에게 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후회로 점철된 가르침에 김무열은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당당하게 UFC 챔피언이 되었다. 김무열은 미디어에 말했다. 자신이 정두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고, 그 덕분에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강해질 수 있었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김무열을 강해지게 만들었던 훈련법.
‘1년. 1년 안에 네가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려 주마.’
그것이 무려 3년이나 일찍, 일개 고등학생인 김현성에게 적용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