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타협이 불가할 때는 (1)
교실 안.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직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10대들이, 본인의 존재 의미를 증명받는 평가의 자리.
곧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상황에, 1학년 1반의 감독관을 맡은 박인환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지 뒤로 넘기면서 들어. 내가 감독관을 맡은 이상 부정행위가 적발되는 순간 무조건 전 과목 0점 처리다. 너희도 그동안 기를 쓰면서 공부해 왔는데, 한순간에 점수가 전부 날아가는 것은 원하지 않겠지. 그러니까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봐. 너희가 정말 노력했다면, 지금부터 진행되는 평가의 자리는 너희를 기쁘게 할 테니까. 아, 그리고 OMR 카드는 잘 확인하고.”
매번 반복되는 멘트였다.
부정행위니, OMR 카드니.
학생들은 박인환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직 확인하지 못한 시험지의 뒷면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시험지의 확인은 공평성 때문에 동시에 이루어진다.
앞자리에 있는 학생들이 단 1초라도 빨리 확인하는 것은 엄연한 이점이기에, 혹시라도 나중에 말이 나올 것을 대비해서 어느 순간 만들어진 문화였다. 천일은 대산을 대표하는 명문 고등학교. 다들 시험 성적에 대한 갈망이 있기에, 시험지를 확인하기 직전의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현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상황에, 김현성은 다른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들었다.
‘만약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내 계획은 시작도 못 하고 실패로 끝나겠지.’
골든 서클.
그들이 김현성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는 성적 때문이다.
김현성이 1학기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이를 시기 질투한 누군가가 골든 서클에 의뢰를 넣으면서 지옥은 시작되었다. 사실 굳이 성적을 갖추면서까지 그들에게 복수할 필요는 없었다. 골든 서클의 존재를 폭로하는 방법도 존재하지만, 김현성은 상대를 완벽하게 무너트리길 바랐다.
그들의 존재 의미.
그 모든 것을.
성적으로 그들의 의뢰를 방해하면서, 골든 서클을 단계적으로 파멸로 몰아넣기를 바랐다.
‘골든 서클이 지금의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의뢰를 완벽하게 성공했기 때문이야. 단순한 폭로는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내가 그들의 의뢰를 방해하면서 목적을 이루어 낸다면 골든 서클은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완전히 파멸할 수밖에 없겠지.’
성적.
반드시 필요한 퍼즐이었다.
폭력에 대항하는 힘과 배경만큼이나 중요한 퍼즐.
슥.
펜을 들었다.
때마침, 박인환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험지 모두 받았지? 지금부터 시험지를 확인해도 좋다.”
신호가 떨어졌다.
시험지를 뒤집는 순간, 빽빽하게 쓰여 있는 글귀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동안의 폭력.
그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지금이야말로, 시험지를 빠르게 확인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복수의 시작이었다.
* * *
예전에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야. 잘 생각해 봐. 판타지 소설에서 정말 회귀 하나 했다고 고등학교 성적을 씹어 먹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겨우 전생에 선행 학습을 했다고? 난 말이야.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성적이 나름대로 괜찮은 친구였는데, 특이하게 취미가 판타지 소설 읽기였다.
당시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화가 된 작품이 있었는데, 실패한 인생이 고등학교 시절로 회귀해서 승승장구하는 내용을 다루었다. 다들 사건에 대한 개연성을 말하는 상황에, 그 친구는 유일하게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엄격한 표정을 보였다.
“우리는 회귀를 만능이라고 생각하지만, 잘 뜯어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십수 년이 지난 상황에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오는 거야.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고등학교 과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거고, 조금 기억이 난다고 해도 그건 살아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없어. 흐릿한 기억이겠지. 그런데 잠깐 벼락치기를 한다고 해서 전국에서 1위를 한다? 캬- 말은 쉽다, 쉬워.”
“그래도 회귀 전에 이미 풀어 본 문제니까 기억할 수도 있잖아.”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사실 그런 전제면 개연성은 무의미해. 아니, 당장 며칠 전에 있던 일도 가물가물한 게 사람인데, 수십 년 전의 시험 문제를 전부 기억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이런 논쟁을 할 필요가 없지. 문제는 일반적인 사람의 범주야. 단순히 머리가 뛰어난 정도라면 분명히 다른 인간들처럼 망각할 수밖에 없고, 결국에 전생이라는 선행 학습을 기반으로 다시 공부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강점이지만…….”
친구가 웃었다.
“전생에 빡대가리였던 존재는 절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전국 1등은 불가능해. 고등학교 단계에서 전국 1위를 다투는 애들은, 웬만한 회귀자들 씹어 먹을 재능들이잖아. 고로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것은 단순히 회귀만이 아니야.”
시선이 집중되었다.
한참 헛소리를 할 나이였다.
정말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두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친구가 말했다.
“정말 악착같이 살아왔던 전생의 노력. 거기에 머리도 똑똑해야만 작가가 끄적이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부합하지 않겠어? 그런 조건도 갖추지 못했는데 전국 1위를 논하는 건 솔직히 오바지.”
* * *
OMR 카드에 모든 답을 기록했을 때.
뚝, 뚝.
시험지 위로 눈물이 번졌다.
아직 시험은 한창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문제를 풀기 바빴는데, 김현성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씨발.”
이번 시험.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매일 체육관에서 먹은 것을 전부 게워 낼 정도로 악착같이 훈련하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밤새도록 공부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십수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지루한 시험 문제들과 씨름하며 앉아 있는 것도 말처럼 쉽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도 참았다.
해야만 했다.
지금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한들,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시절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안일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전생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기에, 조금의 노력만 들이더라도 이번 생의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물론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지만, 김현성은 자신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복수에 조금의 변수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안일함에 좋지 못한 결과를 마주한다면, 그때의 현실은 정말 감당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밤.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했고,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전부 기억이 나. 문제들의 답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이 난다고.’
생소한 기분이었다.
시험지에 빽빽하게 적혀 있는 모든 문제가, 김현성의 머릿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공부의 성과가 아니다.
그냥 기억이 났을 뿐이다.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시험 문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진짜 X같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은.
김현성이라는 사람은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회귀의 주인공들처럼 어른으로서 살다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김현성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실상 인생이 끝나 버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공부했기에, 식물인간으로서 살아가며 고등학교 시절을 수도 없이 후회했기에. 전생의 기억들은 머릿속에 낙인처럼 남고 말았다. 단순히 문제를 풀 정도의 지식이 아니라, 문제를 비롯한 답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참담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은 기분에, 김현성은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았다.
‘절대 잊으면 안 돼. 내가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나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족속들과 그 세력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악의(惡意)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었음을.’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김시우와 같은 과거의 인연들을 만나며, 최근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마음을 좋게 먹는다면 사실 모두가 다치지 않는 이상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정말 같잖은 생명체였다. 십수 년을 절망하고도 망각해 버리는 그 안일한 감정에, 김현성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치밀었다.
누군가의 의뢰.
누군가의 악의.
그것뿐이다.
겨우 그것으로 인해, 자신은 나락으로 빠졌다.
그러니까.
‘난 그래도 돼.’
머릿속의 계획.
들끓는 악의.
역겨움을 삼켜 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훗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자신의 악의는 반드시 현실이 될 것이다.
* * *
시험이 모두 끝났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학생들은, 연례행사처럼 가채점을 진행했다.
“1번에 3번.”
“예쓰.”
“오!”
“2번에 4번.”
“아-.”
“오오오오!”
아주 난리였다.
정답에 부합하는 학생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는 반면, 예상 답안과 다른 경우에는 얼굴을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학생들의 일희일비(一喜一悲)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 한 번의 시험으로 학생의 존재 의미를 평가받기에,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그렇게 가채점이 모두 끝났다.
그런데 홀로 동떨어져 가만히 앉아 있는 김현성의 모습에, 한 여학생이 다가와 물었다.
“현성아. 넌 채점 안 해?”
“안 해.”
“왜?”
“그냥.”
“그래? 그럼 내가 대신 해 줄게!”
이름이 오혜지였던가.
150 후반의 아담한 키에 상당히 예쁘장하고 귀여운 외모였다.
학기 초기만 해도 십수 명이 고백했을 정도로 상당히 인기가 많았는데, 성격도 밝아서 전생의 김현성과도 나쁘지 않게 지냈다. 물론 그뿐이었다면 오혜지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현성이 오혜지를 기억하는 이유는, 1학년 인기녀인 그녀가 자신에게 고백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거절.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에, 오혜지와 연애하면서까지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었다.
오혜지는 특유의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시험지를 가져가더니, 바로 옆에 앉아서 빠르게 채점을 시작했다.
“1번에 3번, 역시.”
“2번에 4번, 굿.”
“3번에 1번…….”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한 호감 때문은 아니었다.
오혜지가 다가오면서 집중되는 남학생들의 시선에, 그녀의 인기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계속되는 채점.
처음에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김현성의 훌륭한 성적에 웃음을 보이던 오혜지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1학년 1반.
단언컨대 반 1등은 김현성이다.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지만, 만약 전교의 범위로 확장한다면 김현성보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충분히 있었다. 그것이 바로 천일의 레벨이었다. 대산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친구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김현성은 1등을 할 수 없었고, 전국적인 범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중에야 그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전생에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채점을 모두 끝낸 오혜지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충격적인 목소리로 말을 툭 내뱉었다.
“혀, 현성이 전 과목 백 점인데?”
그 순간.
1반 친구들은 본인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