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타협이 불가할 때는 (5)
조금 전.
복도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때, 김시우는 곧바로 김현성을 찾아갔다.
“내가 도와줄게.”
돌아가는 상황.
뻔했다.
박진우가 처참하게 박살이 난 이후로, 감히 김현성을 우습게 보는 1학년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비가 붙었다면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천일 전체를 조종할 수 있는, 악마 선배라고 불리는 신영민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솔직히 겁이 났다.
박진우의 일이 트라우마처럼 살아났고, 집단으로 움직이는 악의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쭙잖은 마음가짐이었다면 애초에 정두철 체육관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야. 나를 위해서 3학년 교실을 찾아간 현성이를 혼자 두지 않으려면, 적어도 나만큼은 끝까지 곁을 지켜야만 해.’
지난 몇 주.
악착같이 훈련했다.
훈련이 끝날 때마다 얼굴이 엉망이 되면서도, 김시우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매일 죽을 듯이 훈련에 매진하는 김현성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곁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열의를 보였다.
무엇이든 하겠다는 김시우의 눈빛에, 김현성은 의자에 앉은 채로 담담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랑 약속했지. 무모한 싸움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지금 신영민 패거리를 혼자서 감당하겠다는 의미야?”
“그래.”
“야!”
바락, 소리를 질렀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김현성이 아무리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들, 혼자서 ‘천일 전체’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그런데 네가 나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차라리 나 혼자라면 상대는 ‘일 대 다수’라는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겠지만, 네가 개입하는 순간부터 수적 우위를 최대한 살리려고 할 거야. 그래서 안 돼. 네 전력은 그만큼 도움이 되지는 않거든.”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아닌 건 나도 알아. 하지만 해야 하잖아. 누가 나를 대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도 아니잖아.”
순간.
김시우는 말을 잃었다.
악의로 번들거리는 김현성의 눈빛에, 어떻게 만류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았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신영민을 건드린 순간부터, 아니 박진우를 쓰러트린 순간부터, 아니 박민철 패거리를 응급실에 실려 보낸 순간부터. 아니, 정체도 모를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린 알지도 못할 그때부터.
감당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내게 정말 도움이 되고 싶다면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줘. 다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네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명확한 선례를 남겨 줘.”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박진우. 그에게 복수해.”
김시우의 뇌리에, 한 이름을 박아 넣었다.
* * *
짜악-!
살벌한 소리였다.
뺨을 얻어맞은 박진우는,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김현성?
인정한다.
자신을 박살 냈을 뿐만 아니라, 천일의 선배들을 들이받은 순간부터 김현성은 자신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시 마주하기도 싫은 괴물. 그래서 지난 몇 주간 조용히 학교를 다녔던 것인데, 김현성이 아닌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물며.
그 상대가 김시우였다.
자신에게 박살이 났던, 아무것도 아닌 새끼가 지금 친구 하나를 믿고 깝죽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씨발. 이렇게 학교를 다닐 바에 너 반 죽이고 그냥 전학 간다.”
눈이 돌았다.
17살의 나이.
현실적인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그는 당장 달아오른 뺨이 더 아팠다.
확-
땅을 박찼다.
김시우와의 거리를 좁히며 손을 뻗었고, 지난 화장실 사건처럼 상대를 바닥에 내리꽂으려 했다.
그런데.
빠악!
“컥.”
복부에 엄청난 충격이 작렬했다.
김시우는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강력한 앞차기로 박진우가 달려드는 것을 저지했다.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씨름을 전공한 만큼 웬만한 충격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박진우였는데, 방금의 일격은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 내고 싶었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친구들이 보고 있었다.
천일을 떠나기 전에, 적어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증명해야만 했다.
“개새끼가!”
파팟.
훙!
주먹을 휘둘렀다.
연속해서 휘두른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페이크와 동시에 얼굴을 처박으며 상대를 붙잡으려 했다.
퍽.
빠악-!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시야를 파고드는 무릎이 얼굴을 가격했고, 피를 흩뿌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는 김시우의 강력한 로우킥이 다리를 파고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대미지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잡으면 끝낼 자신이 있었지만, 손을 뻗은 순간 상대가 멀어졌다.
확.
빠악-!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귀신에게 농락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거리를 좁혔다 싶으면 상대와의 거리가 그만큼 멀어졌다.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화장실과 복도.
애초에 조건이 달랐다.
좁디좁은 화장실에서는 태권도의 이점을 살릴 수 없었지만, 복도에서는 무턱대고 달려드는 박진우에게 당해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를 대비해 그동안 악착같이 훈련했다. 언제고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을 알았기에, 김시우는 혼자서 박진우와의 싸움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확-.
뻔한 움직임이었다.
잡으면 끝낼 수 있다는 정말 안일한 판단에, 박진우를 주시하는 김시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한 발, 두 발.’
거리를 벌렸다.
일정한 거리.
그러다.
‘반 발.’
의도적으로 상대를 유도했다.
박진우는 드디어 손에 닿을 것 같은 상황에,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트리며 손을 크게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휘릭.
빠악-!
김시우의 발차기가 그대로 머리에 작렬했다.
* * *
그 시각.
빠악-!
툭.
벌써 네 명째였다.
멱살을 틀어쥐고 얼굴을 날려 버린 김현성은, 상대가 힘을 잃자 멱살을 놓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다음.”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처음 김창현이 나설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김현성에게 그럴듯한 계획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싸우는 도중에 선생님을 불러들인다든가. 절대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이 많은 인원을 상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씨발.”
5번째 상대가 나섰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머릿수로 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김창현이 나선 순간부터, 일대일로 제압하지 않는다면 비열하다는 평가를 듣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의도적이었어.’
배성호가 슬쩍 위를 살폈다.
천일의 학생들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현성이 정말 2학년 전부를 상대할 의도라면, 사실상 저들의 시선은 수적 우위를 억제하는 장치였다. 영리한 녀석이었다. 선생들을 동원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기에, 일부러 본인에게 최대한 유리한 판을 만들어 수적 우위를 살리는 선택지를 강제로 억제했다.
물론.
반드시 정정당당할 필요는 없었다.
시선을 외면하고 밀어붙여도 되지만, 배성호의 알량한 자존심은 그런 상황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영민 선배는 곧 졸업이야. 골든 서클과 더불어 천일을 내가 물려받게 될 텐데, 김현성과 같은 선례를 허락한다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겠지. 개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확실하게 일대일의 승부에서 김현성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겠지.’
그때였다.
빡.
푸확.
피가 튀었다.
턱을 얻어맞고 튕겨 나가는 머리에, 사람들은 5번째 상대마저 패배했음을 알았다.
거기까지였다.
“그만.”
김현성을 반드시 쓰러트려야만 한다면.
신영민의 뒤를 이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면.
“내가 상대하지.”
배성호로서는 더는, 이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다.
* * *
복잡한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체력이 빠진 김현성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는 천일의 학생들은 ‘김현성의 패배’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무려 5명이나, 어쩌면 그 이상을 쓰러트린 1학년의 패기를 인정할 것이며, 배성호는 매번 김현성과 비교를 당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승리를 떠나서, 배성호는 김현성의 패배가 자신의 존재를 치켜세워 주기를 바랐다.
“솔직히 말해서 네게 악감정은 없어. 그런데, 정말 혼자서 우릴 전부 이기겠다는 생각은 좀 같잖잖아.”
괴물 고릴라.
배성호.
그가 거대한 체격을 드러냈다.
김현성도 나름대로 다부진 몸을 자랑하지만, 배성호를 마주했을 때는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배성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하자고.”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배성호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학생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바위만 한 주먹이 그대로 김현성의 얼굴을 향했다.
훙-!
“헉.”
“흐읍.”
위에서 신음을 흘렸다.
배성호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김현성은 피하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처참하게 박살이 나는 김현성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의외의 광경이 펼쳐졌다. 김현성의 얼굴이 거칠게 돌아가는 순간, 김현성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은 채로 스프링이 튕기듯 주먹을 휘둘렀다.
빠악-!
한 대를 맞고.
한 대를 돌려주었다.
배성호의 얼굴에서도 피가 튀었고, 의외의 전개에 배성호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이 새끼가!”
빠악!
위에서 내리꽂았다.
웬만하면 단번에 기절할 공격이건만, 김현성은 이번에도 정면에서 배성호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 냈다.
그러고는.
빠악-!
얼굴을 날려 버렸다.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설마…….’
싸움에는 체급이 절대적이다.
프로 무대도 그렇지만, 길바닥 싸움에서 체급으로 밀어붙이는 상대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렇기에 소각장을 내려다보는 학생 중 그 누구도 김현성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배성호에 비해 날렵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게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김현성은 지금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특별한 싸움의 기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괴물 고릴라를 상대로 정면에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빠악-!
빠악, 빠악, 빠악!
그때부터는 피 튀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상대의 얼굴을 날리고 그대로 내팽개칠 수도 있겠지만, 김현성의 의도를 알아챈 순간부터 배성호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서로의 얼굴이 엉망으로 변해 갔다. 아무리 단련한다고 한들, 얼굴은 가해지는 충격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김현성의 악의가 들끓었다.
강렬한 충격이 머리를 때릴 때마다, 김현성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완벽하게 계획하고, 상대를 무너트릴 판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계획을 이룰 수 없어. 망상만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현실. 고통에 익숙해져야만 해. 내가 이 과정을 통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절대 괴물 같은 그 새끼들을 무너트릴 수 없어.’
상상을 벗어나.
망상을 벗어나.
현실에 발을 들였다.
머리를 때리는 강력한 충격에 몸을 맡기며, 김현성은 현실의 잔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매번 계획처럼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구경꾼들을 불러들인다고 한들 수적 우위를 내세우는 비겁한 새끼들이 존재할 것이며, 구석에 몰려 지금같이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도 만들어질 것이다. 그때마다 완벽한 계획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믿는 것은 안일한 판단이다. 폭력은 있는 그대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한다.
빠악!
비릿한 맛이 입 안을 메웠다.
입 안이 전부 찢겨 나갔지만, 이상하게도 김현성은 그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려 10년.
정신이 마모되었다.
악의로 인해 깎이고 깎여 나간 세월은, 김현성에게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정신력을 부여했다.
정두철 또한.
혀를 내두르지 않았던가.
김현성의 강점은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지만, 애초에 고통을 받아들이는 정신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처음 만났을 때 진행되었던 스파링. 끝까지 버텨 내는 독기(毒氣)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배성호와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빠악-!
빠악, 빠악!
빠악, 빠악, 빠악!
처음에는 건재했던 얼굴이.
주먹을 주고받을수록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상대들은 이미 무너졌을 상황인데, 끝까지 밀리지 않는 김현성의 모습은 충격을 주었다.
불신이 일었다.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김현성은 진짜 미친 새끼라는 생각.
그때부터였다.
빠악!
“악!”
얼굴을 부여잡았다.
콧잔등이 무너지고 피로 범벅이 되어 버린 얼굴에, 배성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숙였다.
후속타를 잊어버렸다.
본인의 차례를 넘기는 자세에, 김현성은 다가가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빠악!
빠악, 빠악, 빠악!
수차례 얼굴을 후려쳤다.
김현성 또한 엉망이 되어 버린 얼굴로 피를 흘렸지만, 상대에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은 상대를 찢어발기겠다는 강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체급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체격이 몸을 웅크리자 아무런 강점을 발휘할 수 없었고, 배성호는 의지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사람들은 몰랐다.
이 순간을 위해.
김현성이 어떤 시간을 감당해 왔는지를.
단순히 안락한 학교생활을 바라는 사람들과는 달리, 김현성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빠악!
푸확!
피가 튀었다.
마침내 배성호가 무너졌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2학년 선배들도, 그리고 위에서 소각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일의 학생들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후욱, 후욱, 후욱.”
김현성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도박이었다.
배성호와의 정면 승부는 상당한 리스크를 부여하지만, 이와 같은 퍼포먼스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비열함을 배제하고 자신을 인정하게 만드는 자리. 신영민에게 도전할 수 있는 명확한 자격을 증명함으로써, 2학년 선배들은 더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두려움 어린 시선을 보였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있었다.
겨우 육체적인 고통 따위로는, 자신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머리를 뒤로 넘겼다.
피로 물든 얼굴에 따끔한 통증이 일었지만, 김현성은 차가운 얼굴로 2학년 선배들을 바라보았다.
“야. 그만하고 신영민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