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37화 (37/130)

8. 타협이 불가할 때는 (7)

대산의 한 건물.

대산일수라는 허름한 간판을 내건 그곳에, 한 사내가 심드렁한 얼굴로 발을 들였다.

끼익-

“어서 오……. 어라? 명진건설의 장남이나 되는 분이,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대산일수의 주인.

사채업자 조용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 말든, 고창범은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바로 상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탁.

착상에 발을 올려놓으며 조용만에게 말했다.

“앉아.”

“……아, 예.”

그렇게 마주 앉은 상황.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조용만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고창범과 자신이 이렇게 마주 앉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상대는 지역 유지 끝판왕인 명진 건설의 장남이다. 자신은 상대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정도의 신분 격차가 존재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고창범은 그런 조용만의 반응에, 상대를 내려다보는 눈빛을 보였다.

“요새 건설업에 자금을 대 준다면서. 부동산이 호황기로 넘어오는 추세니, 이쪽에 대 주는 자금만큼 확실한 보상은 없겠지. 그래서 말인데, 명진건설에서 너희의 자금을 좀 받아 줄 수도 있는데.”

“저, 정말입니까?”

“왜. 내가 빈말할 것 같아?”

고창범의 발언.

엄청난 제안이었다.

명진건설에 자금을 대 준다는 것은, 개개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자금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명진건설을 상대로 과도한 이자를 물릴 수는 없다. 하지만 켜켜이 쌓여 가는 거대한 자금을 개개인에게 모두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보니, 명진건설과 같은 믿음직스러운 파트너는 대산일수의 안전망이 되어 줄 것이다.

조용만은 군침이 흘렸다.

더구나 명진건설과 인연을 맺었다는 소문은, 좁디좁은 대산에서의 평판도 상승시켜 줄 것이 분명했다.

“최근에 대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자잘한 공사 몇 개에 너희의 이름을 올려 줄 수도 있어. 그리고 당연히, 일면식도 없는 너를 찾아온 이유는 네게 그만한 ‘대가’를 바라고 있다는 의미겠지.”

“말씀만 하십시오. 명진건설과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습니다.”

조용만이 의지를 불태웠다.

고창범이 웃었다.

말 몇 마디에 빌빌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그는 더더욱 회장의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조건은 간단해. 내게 계약서 하나만 넘겨줘. 이름이 아마 신민철이라고 했던가.”

“신민철이요?”

조용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신민철이라는 이름은 바로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정말 소소한 규모의 일반 채무자였다.

그런데 대체 왜 명진건설의 장남 정도 되는 인물이 ‘일반 채무자’의 계약서를 요구한단 말인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신민철의 계약서.

그것을 바라는 존재는 고창범이 아니었으니까.

고창범은 얼굴 가득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대산일수로 보낸 앳된 목소리를 떠올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반 채무자의 계약서를 원하는 거니까. 아마 신민철의 아들이 신영민이라고 했던가. 그 계약서 하나면,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게 될 거야.”

* * *

통화기 너머.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그 목소리에, 신영민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야 이 새끼야!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절대, 절대 김현성이라는 애를 건드리지 마. 네가 만약 김현성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순간, 사채업자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할 거라고. 그러니까…….]

“씨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씨발? 씨이발? 이 새끼가 진짜 오냐오냐해 줬더니 아비한테 욕을 해? 이런 개호로새끼야. 다리 몽둥이 부서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집으로 튀어와. 허튼짓하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라고!]

역했다.

현실이 너무 역해서, 신영민은 더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김현성, 너 진짜…….’

단 하나의 가설.

확실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협박을 내뱉었던 김현성이 개수작을 부렸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치가 떨릴 정도로 비열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학교는 순수하게 힘으로 서열을 결정하는, 나름대로 공정한 공간인데 김현성이 암묵적인 규율을 완전히 박살을 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갔다.

사채업자니 뭐니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영민아, 안녕. 난 고창범이라고 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신영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우리 현성이에게 제대로 찍힌 것 같은데, 앞으로 네게 벌어질 일들을 말해 줄게. 일단 네 아비의 도박 빚 때문에 집을 날리게 될 거야.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집을 보고 나면, 아 이제 정말 내 몸 하나 눕힐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빚은 고스란히 네게 전가될 거야. 인터넷에서는 ‘상속 포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떠들지만, 지방의 사채업자들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거야. 법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끝까지 너를 괴롭힐 테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넌 X 됐다는 거야.]

소름이 돋았다.

이건 정말 악의였다.

순수하게 신영민의 파멸을 바라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서 들려왔다.

[물론 살아갈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야. 어떻게든 인간처럼 살고 싶으면, 김현성을 찾아가서 개처럼 맞아. 최선을 다하는 척하면서도, 우리 현성이 얼굴에 상처 하나 내지 말고 일방적으로 맞으라고. 존나 얻어터지는 것만이 네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방법이야.]

“……너무 비겁한 거 아니에요?”

[비겁? 그래서 뭐? 이 새끼 븅신이네. 싸우는 일에 비겁하고 말고가 어딨어. 이기면 장땡이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명심해. 난 빈말 안 한다.]

툭.

그렇게 끊긴 통화.

신영민은 넋을 잃은 채로, 한동안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각장이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 신영민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보였다.

위층 창문.

소각장 주변.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천일의 짱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그들은 기대감으로 가득한 시선을 보였다.

‘……진짜 X 같네.’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화를 내든 말든, 고창범이 뭐라고 말하든 말든 김현성을 이 자리에서 찢어발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골든 서클과의 관계는 엄연히 대가성이기에, 돈 몇 푼을 받자고 집안과 인생을 말아먹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과였다. 그동안 자신에게 얻어맞던 친구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배경에서 밀린 순간부터 신영민의 승리는 보장받을 수 없었다.

애써 웃었다.

그럴듯하게 맞으라고 했으니, 김현성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선생들을 부르려면 미리 불러.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늦었을 테니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타닥.

빠르게 달려들었다.

일단 연기를 해야 하다 보니, 그럴듯하게 상대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 피해?’

김현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칠게 달려들면 피하거나 반격하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그 어떠한 반응도 없는 모습에 신영민으로서는 자세가 꼬일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고창범의 요구대로라면 김현성은 보장받는 승리를 바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연기에 동조해야만 한다.

찰나의 순간.

신영민은 현실에 굴복했다.

정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를 때리지 못하고 허공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짜악-!

뺨이 날아갔다.

신영민은 얼굴을 얻어맞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고, 김현성은 방어를 도외시한 채 다가오더니 추가로 신영민의 뺨을 날려 버렸다. 정신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이 모양새가 일반적인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영민은 차마 김현성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김현성이 신영민의 머리칼을 틀어쥐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차례 후려쳤다.

짜악!

짜악, 짜악-!

“여기 오기 전에 넌 협박 전화를 받았겠지. 그럴듯하게 져 달라는 협박 전화를.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 이기면 의미가 있겠어? 너랑 진짜로 싸워서 처참하게 짓밟든, 아니면 내 배경이 대산에서 얼마나 강력한지를 완벽하게 증명하든. 둘 중 하나는 얻어야 내게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직전의 상황.

배성호를 쓰러트리며, 김현성은 이미 스스로를 증명해 냈다.

그 누구도 김현성의 실력에 의문을 지니지 않는 상황에, 신영민이라는 존재를 심판대에 올렸다.

실력이든.

배경이든.

신영민의 무력한 모습은 의미가 있었다.

악마 선배라고 불리는 존재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모습에, 김현성의 배경이 ‘진짜 권력’이라는 사실을 증명받는 이 순간에 친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동안 현실 감각이 없었다. 배성호가 내뱉은 전략처럼 머릿속의 상상이, 진짜 권력을 상대로도 통할 수 있다는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고로.

현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일부러 판을 만들어, 김현성은 신영민을 인형처럼 휘두르며 그의 뺨을 계속해서 날려 댔다.

짜악-!

코피가 터졌다.

실핏줄도 터져, 신영민은 마치 피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새빨간 눈빛을 보였다.

“하나만 해, 하나만. 병신처럼 완벽하게 무릎을 꿇든, 아니면 인생을 걸고 자존심이라도 챙기든.”

그 말에.

신영민의 눈빛이 변했다.

“개씨발 새끼가!”

빠악-!

얻어맞고만 있던 그가, 드디어 김현성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 * *

만약 둘만 있었다면.

관중들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라면.

신영민은 참았을지도 모른다.

현실에 완벽하게 무릎을 꿇기에는, 혈기왕성한 19살의 나이는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빠악-!

피가 튀었다.

뒤로 밀려나는 김현성의 모습에, 신영민이 살벌한 눈빛을 보였다.

“씨발, 이판사판이야. 너 죽이고 그냥 인생 X 되지 뭐.”

땅을 박찼다.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상황에도, 김현성의 눈동자는 정확히 신영민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예상대로야.’

신영민의 반응?

예상 범주에 있었다.

이미 명진건설을 운운하며 협박을 내뱉었는데도,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천일을 움직인 사람이 바로 신영민이다. 감정에 충실하고 불안정한 존재. 그가 끝까지 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창범을 동원한 이유는 완벽한 승리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배경과 실력.

둘 다.

신영민을 쓰러트림으로써, 김현성은 자신을 지켜보는 천일의 학생들에게 명확히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아직이야.’

상대의 발을 보았다.

지난 훈련.

김현성은 수도 없이 신영민과의 싸움을 되새겼다.

신영민은 배성호처럼 정면에서 들이받는다고 해서 승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보니,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명확한 전략이 필요했다. 우습게도 ‘종합 격투기’를 수련했다는 사실은 신영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두철이 신영민의 경기 영상들을 가져왔고, 몇 가지 특이점을 찾아냈다.

흥분할 때의 안면 노출.

진심으로 끝내고자 할 때의 큰 보폭.

여러 특이점이 머릿속에서 뒤얽혔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특이점이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었고, 시간이 순간 느리게 흘렀다.

훅!

주먹을 뻗었다.

김현성을 끝내고자 하는.

악랄한 악의를 지닌 주먹.

김현성은 겨우 반발 물러나는 것으로 주먹을 피하더니, 수도 없이 훈련했던 단 한 번의 반격을 시도했다.

“상대가 들어오는 순간을 노린 어퍼컷. 그건 그 누구도 버티지 못해.”

빠악-!

“?!!”

주먹이 작렬했다.

간발의 차이로 신영민의 주먹을 흘려보내더니, 김현성이 정확히 신영민의 턱을 강타했다.

비틀.

균형이 무너졌다.

신영민이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콰당!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명진건설의 배경이 얼마나 무서운지보다, 단번에 나가떨어진 신영민의 모습이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학교다.

그리고 신영민은 무려 3년 동안 이곳을 군림해 온 왕.

그의 무력한 패배에, 흥미 어린 시선을 보내던 친구들조차도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끄, 끄으…….”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신영민은 숨을 헐떡였고,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눈은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꽉.

김현성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신영민의 몸이 떨렸다.

정식이 아득한 와중에도, 그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힘겹게 말했다.

“……미, 미안. 제, 제발 그만해.”

김현성이 웃었다.

하늘을 바라보자, 자신의 삶이 종지부를 찍었을 때처럼 푸르른 세상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빠득.

빠드드드드득.

“크아아아아아아악!”

김현성은 그대로, 신영민의 팔을 비틀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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