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타협이 불가할 때는 (8)
한순간의 고통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긴, 상황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시선을 돌릴 정도로 천천히 신영민의 팔을 반대편으로 비틀어 버렸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비명. 어느 순간부터 잦아들던 비명은, 신영민이 흰자를 완전히 드러내고 나서야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툭.
팔을 내려놓았다.
신영민의 등 뒤로 떨어지는 살벌한 광경에, 수많은 시선이 존재하는 소각장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
“…….”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신영민의 패배 자체도 믿을 수 없었지만, 신영민에게 도달할 때까지의 상황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사건이 발발할 때만 하더라도. 흥분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복도를 내달릴 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기대하는 부분은 김현성이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였다.
절대, 절대로.
승리를 말하진 않았다.
상식적인 사고를 지닌 학생들로서는, 그 어떠한 반응도 섣불리 내비칠 수 없었다.
스윽.
김현성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연속된 싸움으로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담담한 눈빛으로 2학년들을 바라보며 말을 툭 내뱉었다.
“다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신영민은 천일 전체를 동원했기 때문에, 만약 남아 있는 학생들이 계속 해보겠다고 달려든다면 김현성으로서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학년들은 김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면서 눈을 내리깔았고, 그 누구도 먼저 이 상황을 주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끝났다.
배성호와 신영민.
두 괴물의 패배에, 2학년들의 전의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머릿수로 상황을 비벼 볼 수는 있을지라도, 김현성이 천일의 왕을 이겼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정적이 맴돌았다.
결정권자가 사라진 자리에 혼란만이 내려앉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신영민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배성호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김현성과의 정면 승부에서 완전히 박살이 났다 보니, 신영민마저 패배한 마당에 목소리를 높일 자신감이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병신들.”
김현성이 소매로 피를 벅벅 닦았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2학년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길을 열어 주었다.
저벅저벅.
겨우 1학년.
그에게 길을 열어 주는 천일의 선배들.
그 모습에 학생들은 확신했다.
‘김현성이 천일의 왕이다.’
그것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 * *
김현성이 건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아?”
김시우였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김현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담담하게 반응했다.
“너는?”
“나야 성공했지.”
“제법이네. 쉽지 않았을 텐데.”
다시 보니 김시우의 얼굴은 멀쩡했다.
박진우는 1학년 짱을 먹었을 정도로, 박민철 패거리 중에서 제일 강한 강창석도 쓰러트렸던 괴물이다. 그런데 김시우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그것은 단순히 요행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김시우라는 사람이 실제로는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였다.
지난 삶.
그때와는 달랐다.
무력하게 꺾였던 의지가 다시 살아나자, 김시우는 태권도 천재라고 불리던 시절의 모습을 되찾았다.
김시우가 말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신영민을 쓰러트린 것까지는 좋은데, 이번에는 지켜보는 시선이 너무 많아. 만약에 징계위원회가 소집된다면 네 배경을 이용한다고 해도 사건을 수습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2학년 선배들.
그들을 쓰러트린 것은 괜찮았다.
학생들의 혈기로 마무리할 수 있는 정도의 사건이었지만, 신영민에게 가한 폭력은 얘기가 달랐다.
팔을 부러트렸다.
처절한 비명이 소각장에 울려 퍼졌고, 그 모습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증언을 모두 묻어 버릴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사건이 표면 위로 떠오른 순간부터, 누군가는 김현성이 신영민의 팔을 부러트렸다는 사실을 언급할 것이다. 그것이 2학년이 되었든, 신영민의 최측근이 되었든. 아무리 사건을 외면하려는 선생들이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증언한다면 김현성의 죄를 없는 일처럼 넘길 수는 없었다.
행동에는 대가가 따른다.
팔을 부러트린 행위 자체는 인과응보였지만, 앞으로 김현성이 감당해야 할 현실에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 없어.”
김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창밖 너머로,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가 눈에 보였다.
“네가 걱정하는 문제는 ‘문제’로 지적되었을 때나 발생할 일들이야. 내가 박민철 패거리 그 쓰레기 같은 새끼들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뭔지 알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김현성의 눈동자에서 넘실거리는 악의에, 시선을 마주친 김시우가 흠칫 놀랐다.
“세상은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거야.”
* * *
김영철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팔을 부여잡은 신영민과 주변 일당의 모습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아, X 같네.”
상황은 대충 들었다.
김현성과 2학년이 시비가 붙었고, 마지막에는 신영민과의 싸움 끝에 팔을 부러트렸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진심으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김현성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건 사이코패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다른 선생들은 방관의 포지션이 가능할지 몰라도, 김영철은 이미 똥물을 전부 끼얹은 상태이지 않은가.
‘김현성의 몰락이 곧 나의 몰락이야. 김현성을 무사히 졸업시킨다면 나는 오대환과 명진건설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할 수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지난 업보를 모두 청산받을 거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동안 아득바득 살아왔는데, 이렇게 무너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끄으.”
신영민이 고통에 신음했다.
당장에 병원으로 보내야 할 상태였지만, 신영민의 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내 말 똑바로 들어. 신영민, 너는 김현성과 싸우다가 팔이 부러진 게 아니야. 그냥 친구들끼리 장난치다가 계단에서 구른 거고, 병원에서 김현성이니 뭐니 언급하는 순간 나는 너희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을 모두 고발해 버릴 거야. 너희도 잘 알지? 너희가 쓰레기 같은 짓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김현성을 담그려면, 너희 인생도 걸어야 할 거야. 아니, 너희만 X 될 확률이 매우 높겠지.”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래도 돼요?”
“뭐?”
“그래도 선생이잖아요, 선생! 씨발, 상황이 이렇게 됐으면 학생의 안위를 챙기는 게 먼저 아니에요?”
순간.
김영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애초에 사건화시키지 않는 것.
아무리 증언할 학생들이 많다고 한들, 사건화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나서서 ‘증언’할 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한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선생들이 대놓고 편을 들어 주는 상황에서, 김현성에게 그만한 악의를 지닐 만한 학생은 눈앞에 있는 신영민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영민이나 자신이나, 그건 아주 익숙한 방식이었다.
김영철이 악귀 같은 표정을 보였다.
“야 이 씨발련아. 너도 그런 식으로 사건 많이 묻었잖아. 정민호나 이런 애들 뒤 봐 주면서 네 사건 묻어 줄 때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와서 ‘선생님’으로서의 자격을 운운한 적이 없었잖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깨를 콱 틀어쥐더니, 신영민이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살벌하게 말했다.
“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그러니까 명심해.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잘 알잖아?”
팍.
신영민을 놓아주었다.
팔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삼킨 신영민은, 아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영철을 올려다보았다.
어른이었다.
미성년자는 감당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
신영민은 그제야 알았다.
‘……이젠 끝이야.’
가해자였을 때는 몰랐던, 인생의 참담함을.
* * *
신영민의 실패.
의뢰 결과였다.
의뢰인을 통해 그 사실이 골든 서클에 알려지자, 강태구는 무릎을 꿇고 그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짜악-!
뺨이 날아갔다.
강태구의 얼굴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태구야. 이게 씨발 말이냐? 목표물은 전교에서 중간고사 1위를 하고, 용병이랍시고 데리고 온 애는 완전히 나가리 되고. 그리고 뭐? 학교를 통해서 목표물을 압박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죄, 죄송합니다.”
콱.
머리를 틀어쥐었다.
창백해진 강태구의 표정에, 중년의 사내가 살벌한 눈빛을 보였다.
“아가리 꽉 물어.”
빠악-!
빠악, 빠악, 빠악!
얼굴을 후려쳤다.
계속되는 주먹질에 몸이 축 늘어졌고, 그렇게 한참을 때리고서야 사내는 분이 풀린 모양인지 강태구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강태구는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내는 손수건으로 주먹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 내더니, 그가 옆에 있는 사내들에게 눈빛을 보내자 강태구에게 물을 끼얹었다.
촤악-!
“끄억?!”
강태구가 벌떡 일어났다.
강태구는 당장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사내에게 말했다.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사, 상황을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면, 배때기에 칼을 쑤셔라도 어떻게든…….”
“야.”
입을 다물었다.
말을 끊는 살벌한 음성은, 강태구의 심장을 강하게 억죄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면 ‘골든 서클’이라는 단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겠지. 우리의 존재 의미는 학교 폭력이라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의뢰인들의 만족도를 충족시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이 학교 저 학교에서 조폭들이 할 법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면,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에 의뢰인들의 정체가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그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부여하는 ‘그분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고.”
“죄, 죄송…….”
빠악-!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 마지막 일격에, 강태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병신 같은 새끼. 한 번 더 믿어 주려고 했는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사내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이름은 정찬수.
골든 서클의 브로커로서, 지방을 담당하는 강태구와는 다르게 ‘서울’을 담당하는 진짜 브로커였다.
정찬수가 눈짓을 보냈다.
사내들이 강태구를 치웠고, 정찬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료를 살폈다.
팔락.
“확실히 태구가 애를 먹을 만한 새끼야. 조금 괴롭혔다고 학년 전체를 들이받고, 명진건설을 끌어들여 선생 전부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특히 강태구가 말한 대산 카르텔. 서울의 영향력이 먹히지 않는 존재라면, 배경의 압박으로 의뢰를 성공시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겠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찬수는 이보다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골든 서클의 2차 경고는 브로커의 교체, 담당 브로커를 처벌하고 그 역할을 정찬수가 이어서 받았다.
조금 전.
의뢰인이 연락했다.
김현성의 승승장구에 의뢰인은 상당한 분노를 표출했고, 계속 이딴 식으로 진행된다면 골든 서클의 무능력함을 폭로하겠다고 말했다. 그건 상당히 곤란한 문제였다. 골든 서클이 계속해서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밀 유지와 백 프로의 의뢰 성공률 덕분이었다.
그런데 오점이 생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찬수가 강태구를 직접 찾아온 이유는, 더는 실패라는 결과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현성.”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미안함이 앞섰다.
나름대로 살아 보겠다고 발악한 행보는 대단했지만, 정찬수는 자신의 성공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일 뿐. 이런 녀석들을 처리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웃음을 보였다.
천일?
대산 카르텔?
김현성의 무력?
그딴 것들은 무의미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하루.
악의(惡意)는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