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수확의 계절 (1)
19살.
그리 긴 인생은 아니지만, 신영민은 단언컨대 오늘을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멍하니 석고보드 천장을 바라보던 신영민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
암담했다.
김현성을 찢어발기겠다고 찾아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김현성과 제대로 맞붙는 순간 기억이 끊겨 버렸다. 턱이 얼얼한 것을 보아 제대로 당한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팔을 부러트리던 김현성의 악귀 같은 모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끝났다.
천일의 왕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신영민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현실적인 문제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불행 중 다행히도 팔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종합 격투기를 수련하며 다치는 일이 적지 않다 보니, 팔이 부러지기는 했어도 수술까지는 필요 없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렇게 깁스를 한 상태로 평소처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막막한 감정이 들었다.
머릿속을 장악하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첫 번째는 강태구.
‘왜 연락이 되지 않는 거지?’
이틀 전.
[의뢰 종료]라는 문자를 끝으로, 강태구에게 아무리 전화와 문자를 보내도 연락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골든 서클의 처벌이었다. 그래서 병실에 누워 있는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는데, 강태구는 이번 일과 관련해서 그 어떠한 연락도 보내오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차라리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미지의 무언가는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두 번째는 김현성.
그로부터 받은 한 통의 문자에, 신영민은 정말 오랫동안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딱 한 번만 물을게. 의뢰인의 정체를 말해. 그럼, 너는 여기서 끝내 줄 테니까.]
심장이 서늘해졌다.
이렇게까지 해 놓고 여기서 끝내 주겠다는 말은, 의뢰인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면 아직 자신에게 복수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두려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김현성이라는 사람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신영민으로서는 절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포식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
의지가 꺾였다.
김현성을 인정하면서부터, 신영민은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할 최선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정말 의뢰인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진심을 담은 구구절절한 문자를 보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탁.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아팠다.
곧 퇴원해야 하는 상황에,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신영민은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 * *
다음 날.
신영민은 퇴원을 진행했다.
병원비도 직접 다 계산한 그는, 현실의 찬바람을 맞으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진짜 꼰대 새끼. 별 지랄은 다 해 놓고, 아들이 아프다는데 어떻게 병문안 한번 오질 않냐.”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거지 같아도 집은 집이다.
돌아갈 곳은 집밖에 없기에, 버스를 타고 한참 걸어서야 익숙한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축 아파트.
신영민의 집 사정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섰는데,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집 안.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가구랄 것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박살이 나 있었고,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쿰쿰한 냄새에 소주병들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사고 회로가 완전히 정지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발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방에서 나오더니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런 후레새끼야!”
퍽!
아버지였다.
신민철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지만, 신영민은 뻔히 보이는 주먹에 맞아 줄 생각이 없었다.
붙잡은 팔목에서 노쇠한 세월이 느껴졌다.
신민철은 한참 동안 발버둥을 쳤고, 결국에는 먹히지 않는 현실에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끄억, 끄억. 내가 전화로 분명히 말했잖아. 그 김현성이라는 애를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대산 일수에서 그렇게만 한다면 분명히 기일을 준다고 했는데, 왜 그걸 네가 전부 망쳐 버리냐고!”
펑펑 울었다.
50이 넘은 아저씨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영민아. 신영민! 그동안 개망나니처럼 살았어도 선이라는 게 있어야지. 네가 사는 이 집, 냉장고를 열면 있는 반찬들. 그게 그냥 생기는 줄 알아? 끄윽, 끄윽. 이 병신 새끼야. 이 아비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어. 그런데 그걸, 책임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네 녀석이 완전히 끝내 버린 거라고!”
그제야 알았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나약한 모습.
자존심이 강해 쏟아 내지 못했던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며, 신영민은 드디어 성인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우린 끝났어. 완전히 끝나 버렸다고!”
엉망이 된 집.
오열하는 아버지.
원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 아들.
이게 바로 학교를 벗어난, 신영민이라는 인간의 현실이었다.
* * *
상황은 이랬다.
고창범.
그가 대산 일수의 계약서를 사들였고, 대출 기간 만료로 인해 담보로 설정한 구축 아파트를 경매로 내보내겠다고 통보했다. 그 과정에서 대산 일수의 떡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고창범과 무관한 일인 것처럼 집을 뒤엎으며, 허튼수작을 부릴 경우 재밌는 일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
그것이 지난 며칠간의 상황이었다.
신영민이 병실에서 머리를 싸매는 동안, 그의 집안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말았다.
결국.
방법이 없었다.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던 신영민조차도, 현실의 영역에 발을 들이자 자신도 모르게 김현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털썩.
“……미안해.”
무릎을 꿇었다.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진짜 잘못했어. 네 경고를 알아듣고 애들을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골든 서클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선을 넘어 버렸어. 마음 같아서는 의뢰인의 정체를 밝히고 복수도 대신 해 주고 싶은데, 정말 나는 의뢰인이 누군지 몰라. 골든 서클이 원래 그런 집단인 건 너도 잘 알잖아. 확실한 대가를 받는 대신에, 의뢰인의 신분을 보장해 주면서 의뢰를 무조건 성공시키는 게 바로 골든 서클이야.”
덜덜 떨었다.
막막했다.
퇴학, 경매 등등.
현실적인 문제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김현성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신영민은 내던진 자존심을 완전히 포기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라. 딱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뭐든 할게. 개처럼 짖으라고 하면 짖을 거고, 네가 학교에 다니면서 불편한 점이 있다면 내가 전부 정리할게. 배성호? 박진우? 그딴 새끼들 내가 전부 해결해 줄 수 있어. 널 보면 오줌을 지릴 만큼, 내가 확실하게 교육시켜 놓을게.”
“내가 왜?”
“……응?”
“내가 왜 널 용서해 줘야 하는데?”
고개를 들었다.
김현성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신영민의 귓속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어. 사람 말을 말 같게 알아듣지 않는 사람들. 네 교실을 찾아갔을 때도, 학교 밖에서 경고했을 때도 전부. 난 진심이었어. 그런데 선을 넘은 건 너야. 내 경고를 들었는데도 천일을 움직였다는 것은, 네가 현실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맞잖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냥 내가 멍청했어.”
“그래, 멍청했지. 멍청하지 않고서는, 불구덩이인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발을 들이진 않았겠지.”
몸을 숙였다.
신영민과 얼굴을 마주하더니, 그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의뢰인의 정체를 모른다는 말은 믿어 줄게. 골든 서클로서도 용병에 불과한 네게 전부를 말할 리가 없겠지. 날 찾아와서 이렇게까지 용서를 구했으니, 네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지금부터 딱 한 달. 한 달만 버텨 봐. 그 시간 동안 네 의지를 증명해 낸다면, 그 노력에 진심을 느낀 내가 용서해 줄지도 모르니까.”
“하, 한 달? 어떤 걸 버티면 되는데?”
“글쎄.”
몸을 일으켰다.
나락으로 빠진 신영민을 내려다보며, 김현성이 악귀 같은 웃음을 보였다.
“그건 알아서 경험해 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 * *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한다는 말.
신영민은 그 말을 절절히 체감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그는, 자신을 우러러보던 친구들의 눈빛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헐. 신영민이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그나저나 X 같겠네. 그동안 학교 짱이랍시고 엄청 거들먹거리고 다녔는데, 새파랗게 어린 후배한테 개털렸잖아.”
“그러게. 자존심 많이 상하겠네.”
신영민이 지나갈 때면.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그들은 힐끗거리며 신영민을 살필 뿐, 절대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참담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신영민은 천일의 왕이었고, 동급생은 물론이고 후배들도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학교라는 폐쇄적인 공간. 이곳에서 신영민의 무력은 절대적이었기에, 그 누구도 신영민의 눈 밖에 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왕좌가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상황에, 친구들은 신영민의 손아귀에 권력이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박쥐 같은 새끼들.’
분노를 억눌렀다.
현실의 영역에 발을 들인 신영민으로서는, 지금 이상으로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김현성이 말한 한 달.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이와 같은 굴욕을 감당하라는 의미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참아 낼 자신이 있었다.
벌써 10월이 다가왔다.
앞으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의 역겨움을 참아 내고 천일을 떠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응?’
같은 반 친구였다.
이름이 한명훈이라는 녀석이었는데, 공부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는 전체적으로 최악인 그런 녀석이었다. 평소라면 시선을 마주친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한명훈은 오늘따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인지, 시선을 마주치고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째려보았다.
예전이었다면 자신과 겸상도 하지 못할 애가 한명훈이다.
신영민은 당장에라도 그의 뺨을 후려갈겨 버리고 싶었지만, 김현성을 떠올리며 속으로 참을 인을 그렸다.
‘……진짜 세상 좋아졌다. 명훈이 같은 새끼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하고. 영민아, 참자. 어차피 한 달이야. 진짜 조용히 한 달을 보내고,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따서 새로운 삶을 살자.’
먼저 시선을 피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말이지, 하루가 오늘처럼 긴 날은 없었다.
꾸역꾸역 오전 수업을 끝낸 신영민은, 평소와는 다르게 홀로 점심을 먹는 생소한 경험을 했다.
밥을 욱여넣었다.
원래라면 주변에 몰려들어 왁자지껄 떠들어야 할 친구들이 멀리 있다는 사실도,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이 상황도. 그 역겨움을 모두 밥과 함께 목구멍으로 삼켜 버렸다. 상황이 이럴수록, 더욱 반발심이 들어 어떻게든 한 달을 버텨 내고 싶었다.
그때였다.
주르륵.
“……?!”
신영민이 눈을 부릅떴다.
머리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차가운 감각에, 그것이 오늘 급식으로 나온 새하얀 우유라는 사실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영민아. 현성이 말로는 이래도 된다고 하던데. 네 생각은 어때?”
신영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명훈.
그가 김현성과 똑같은 사나운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머리에 우유를 들이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