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44화 (44/130)

10. 선의의 나비효과 (2)

고창범의 삶은 항상 빠르게 지나갔다.

친구들과 매일 놀러 다니다 보니 학창 시절이 끝났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술을 마시고 생판 모르는 여자랑 침대에서 일어나는 하루를 보내다 30대를 맞이했다. 어떻게 살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즐거웠을 뿐이고, 그 과정에 고생이라고 할 만한 어려움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공사판에서 말단으로 일할 때도, 119를 애타게 기다리는 지금도.

너무나도 생소한 상황에, 고창범은 험악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신고받고 곧바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빨리 밟으라고 해! 과태료든 뭐든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참 단순했다.

결단을 내린 이상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자신의 결단으로 나중에 어떤 대가가 돌아오든지, 일단 김현성의 계획대로 인부들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최선에는 특별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고를 당한 인부들로서는 안위가 최우선일 수밖에 없을 테니, 119가 얼른 도착할 수 있도록 관리자를 계속 다그쳤다.

쿠르르르릉.

건물 위.

위태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고창범은 짜증이 치밀었다.

“씨발, 왜 이딴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이유를 모르세요?”

“뭐?”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옆을 바라보자,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인부가 고창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설 사고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이번 사고는 명백히 건설사가 공사 일정을 촉박하게 진행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양생(養生)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거죠. 만약 인부들을 다그치지 않았다면, 양생에 충분한 시간을 부여했더라면. 이런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괜찮은가 해서요. 들어 보니 건설사 장남인 것 같은데, 이 사고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고창범도 눈치가 있다.

인부가 자신에게 적대적임을 알았다.

공격적인 말투도 말투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자체가 호의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뺨부터 후렸을지도 모른다.

개망나니처럼 살아온 인생에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머리 구조는 평소와는 달랐다.

인부를 우선시하라.

인부의 편을 들어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하게 김현성의 뜻을 받들어, 그에 맞는 언행이 자신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고창범이 말했다.

“그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잖아.”

“……예?”

“문제가 생기든 말든, 일단 사람 목숨을 구하는 게 먼저 아니야? 그딴 헛소리 지껄일 시간 있으면 119에 전화 한 통이라도 더 넣어. 원래 공무원은 단체로 지랄해 줘야 서두르는 법이거든.”

고개를 돌렸다.

다시 건물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였다.

그 모습을 누가 바라보든 말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고창범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일까.

삐용삐용-

삐용삐용-

멀리서,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발 빠르게 조치한 덕분에,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인부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관리자가 다가와 말했다.

“사고로 추락한 인부가 총 여덟이었는데, 모두 문제없이 구출해서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그래도 당장 목숨이 위험해 보이는 인부는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결단을 빠르게 내려 주신 덕분에, 문제를 잘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관리자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인부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바로 감당해야 하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몇몇 인터넷 언론사들이 저희 사건을 확인하고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대산의 지역 신문들이야 명진건설과의 관계가 있어 먼저 확인 전화를 보내왔지만, 인터넷 언론사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걔들은 자극적인 소재로 조회 수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인 족속들이라, 이미 명진건설의 ‘안전 문제’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문제는 이미 기사의 물꼬가 트여 버린 상황이라, 추가 기사를 막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우려했던 문제였다.

원래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들, 미리 언론사에 손을 써서 신랄한 비난은 최대한 자제시켰다. 원래 한글이라는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명백하게 명진건설의 잘못이라고 해도, 적당히 순화해서 표현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분노는 잠시 들끓었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곳은 대산이다.

서울이 아닌 지방.

인터넷 기사가 몇 개 나갈 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사안이었다.

고창범이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어떻게 하지?”

“예? 방법이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방법은 개뿔. 그냥 눈앞에 인부들이 위험하니까,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119를 부른 거지 뭐.”

“아…….”

관리자가 암담한 표정을 보였다.

고창범의 실수.

그는 로열패밀리라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지는 않겠지만, 관리자인 자신은 고창범의 죄를 그대로 뒤집어쓸 가능성이 매우 컸다. 절망적이었다. 명진건설의 장남이 개망나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순간 그의 정의감을 믿고 119에 전화를 걸었던 자신의 판단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창범은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

호출이었다.

공사장의 상황이 아버지에게 전달되었고, 그 현장을 진두지휘한 고창범을 불러들이려 했다.

고창범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호출에 응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아니다.

책임을 질 생각이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툭.

전화가 끊겼다.

고창범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면서,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탈칵.

“어, 현성아.”

* * *

오랜만의 호출이었다.

고명진 회장.

그리고 고창범과 고창석.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고창석이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형, 혹시 제정신이야?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일을 이렇게 처리해?”

툭.

무언가를 던졌다.

기사를 캡처한 화면이었다.

명진건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기사에, 고창석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 그래, 아주 좋은 일이지. 인부들이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니 형의 정의감은 충분히 충족되었겠지만, 우리 회사는? 명진건설은? 이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손실이 얼마인 줄 알아? 인부들의 배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안전 문제로 공사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질 거고, 우리 아파트에 입주하기로 한 사람들은 이딴 아파트에 들어와도 되는지 의심부터 할 거라고. 그러다 미분양이 뜬다? 그때는 끝이야.”

형의 실수.

고창범에게는 기회였다.

먹이를 포착한 하이에나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상처를 물어뜯었다.

“진짜 공사판 말단으로 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신을 차린 줄 알았더니. 에휴, 진짜 말을 말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어떤 부류인 줄 알아? 손아귀에 알량한 권력을 쥐고 있는데, 책임감은 쥐뿔도 없으면서 무지한 사람들이야. 어? 형 같은 사람들이 정말 위험하다고. 형은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벌였겠지만, 우리 같은 실무자들은 지금부터 그 일을 수습해야 한다고.”

단어 하나하나.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책임감이 없고 무지한 사람.

고창범의 존재를 깎아내리면서, 본인은 명진건설과 한 몸이며 실무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강조했다.

회사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은 없었다.

만약 대규모 공사였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심각했겠지만, 다행히도 이번 공사는 한 동짜리 아파트를 올리는 공사였다. 물론 그래도 피해액이 적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고창석에게 있어 고창범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용도로 이 정도의 손실이면, 충분히 수지타산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고창범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고창석이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데도, 아버지를 향한 상태로 고개를 푹 숙였다.

고명진 회장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째 아들의 고성에도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고창범을 바라보았다.

“그래, 소식은 들었다. 인부들을 구하겠다고 대산 전체를 들쑤셨다고? 119뿐만 아니라 112에도 신고한 덕분에, 인터넷 기자들이 소식을 금방 알아챘다던데. 그래서, 넌 이 상황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차가운 목소리였다.

고창범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고창범은 조금 전에 있었던 통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 * *

김현성의 계획.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진건설은 엄연히 기업인데, 어째서 인부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란 말인가.

기업의 구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 한 명 한 명 신경 쓰면서 챙겨 주어 봤자,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인부들의 만족도는 회사 매출을 극적으로 상승시켜 주지 않는다. 빠른 공사와 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물. 특히 지금과 같은 시장 상황에는, 인력을 갈아 넣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회사를 위한 일이었다.

전화기 너머.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창범 씨가 생각하기에 고명진 회장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돈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인가요, 아니면 돈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완벽한 결과물만 추구하는 장인인가요?]

“……글쎄.”

정답이 번뜩 떠오르지 않았다.

고명진 회장은 장인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장사꾼이기 때문에 지금의 명진건설을 이룰 수 있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제가 생각하는 고명진 회장님은 장사꾼과 장인의 모습을 둘 다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굳이 한쪽을 결정하라고 말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거예요. 사람들이 참 재미있는 게, 장인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본인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장인이 뛰어난 실력을 갖출수록,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각할수록. 장인들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인의 가치에 걸맞은 충분한 보상을 부여받기를 원해요.]

이번 사고.

전생에도 존재했다.

그때 명진건설은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는데, 그 이야기가 고명진 회장에게 흘러 들어가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이 아니다. 겨우 타설 사고 같은, 정말 황당한 실수로 명진의 퀄리티를 낮추었다는 것이 고명진 회장을 분노하게 했다.

한 인터뷰에서.

고명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는 우리를 멍청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타설 사고를 은폐하고 직접 세상에 다시 밝혔습니다. 그건 자부심의 문제입니다. 요새 짝퉁 시계 시장이 참 많이 발달했다죠? 짝퉁과 진짜는 외관상으로는 크게 구분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계를 착용하는 본인의 마음가짐입니다. 짝퉁을 낀 사람과 진짜를 낀 사람은 그 당당함과 자신감에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저는 떳떳해지고 싶었을 뿐입니다. 명진건설이 진짜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사람들 앞에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길 바랐습니다.”

전문 경영인.

타설 사고.

고명진의 성향을 드러냈다.

그는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이지만, 결국에는 아들들을 버리고 전문 경영인을 고용할 정도로 본인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런 사람이 바라는 후계자는 어떤 존재일까? 단순하게 회사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이익을 챙기며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일까?

충분한 대가는.

완벽한 결과물에 대한 보상이었다.

장사꾼이기 때문에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게 아니라,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에 걸맞은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 했다.

김현성이 말했다.

[만약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고명진 회장님은 분명히 분노하실 거예요. 본인의 자부심을 깎아내리는 일이기에, 사건을 은폐하기보다는 드러내서 해결하려고 하시겠죠.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으세요.]

잠깐의 침묵.

아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고창범에게, 확고한 어투로 못을 박았다.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말고,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세요.]

* * *

그리고 지금.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쳤다.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에, 고창범은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이 혹시 잘못된 길일지라도.

“이번 공사. 전부 무너트리고 새로 시작하시죠.”

고창범은 한번 내린 결단에 의문을 지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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