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선의의 나비효과 (3)
고창범의 발언.
비상식적이었다.
실무에 완전히 무지하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발언에, 고창석이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쳤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전부 무너트리고 새로 시작하자고? 하- 진짜 돌아 버리겠네. 아무리 고졸이라지만, 적어도 명진건설의 장남으로서 상식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절호의 기회였다.
고창범은 지금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가 하는 이 건설업은 장난감으로 건물을 짓는 그런 일이 아니야. 건물을 하나 올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뒤얽혀있다고. 그래, 책임을 우리가 온전히 떠안는 일이라면 새로 시작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공사비 대부분이, 은행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
“안다는 사람이 그런 말이 나와? 우리는 시간이 돈이야.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은행에 갚아야 할 이자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예정된 완공일에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 그때, 우리가 생각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자 부담을 그대로 떠안아야 해. 그래서 공사를 서두르는 거고, 그래서 현장에서의 사고를 그딴 식으로 처리하면 안 되는 거야. 형이 정의감이랍시고 한 행동 때문에, 우리는 공사 일정이 미뤄질 거고 분양 대상자들은 망설임이 생길 테니까.”
고창석이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형을 사납게 바라보며,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만약 공사를 새로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동안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소모된 비용을 땅바닥에 버리게 될 거고, 철거비뿐만 아니라 공사 일정이 길어짐에 따라 추가적인 금전 압박에 이자 비용도 감당해야만 해. 우리가 왜. 돈을 벌자고 건물을 올리는 우리가 어째서 그런 손실을 감당해야 하지? 겨우 한 동짜리 아파트를 올리는 데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어, 있어.”
“미친 새끼가 진짜.”
고창석이 발끈했다.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그를 바라보며, 고창범은 침착한 눈빛을 보였다.
이미 사전 논의는 끝났다.
김현성과의 통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얘기할지, 자신이 밀고 나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고창범은 단순했다.
동생의 말은 상식적이었지만, 결단을 내렸으니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난 오히려 겨우 한 동짜리 아파트니까 새로 짓자고 말하는 거야. 네 말처럼 이 판단으로 엄청난 손실이 생기겠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사람들의 신뢰야. 최근 들어 TV에서 틈만 나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뭔지 알아? 아무리 부동산 호황기가 찾아왔다지만, 공사판에서의 안전 문제와 건설사들의 이기적인 태도가 계속 지적되고 있어. 언제 그 문제가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타설 사고가 일어난 아파트 공사를 강행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분양이 나겠지. 그게 새로 짓는 것보다는 손실이 덜할 거고.”
“그렇지. 미분양은 날 수밖에 없어. 타설 사고가 한 층에서만 발생했다고 해도, 집 한 채가 전부인 사람들로서는 다른 층은 안전하다고 믿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창석아. 명진건설이 어떻게 지금의 평판을 얻을 수 있었을까? 지방에서 그래도 건물을 양심적으로 짓는다는 평판 덕분에 매번 완공 전에 분양을 끝냈고, 단 한 번도 미분양이 난 적이 없었어. 우리가 이번에 겪어야 할 손실은 단순히 미분양으로 인한 손해가 아니라, 드디어 완판 행진이 깨졌다는 결과야.”
아버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 소신껏 밀고 나갔다.
“우리는 이 대산 바닥에서 하루 이틀만 일하고 끝날 기업이 아니야. 앞으로 더 큰 공사를 도맡기 위해서는, 우리의 평판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그러니까 멀리 보고 공사를 엎어 버리자는 거야. 아직 손실이 조금이라도 덜할 때, 겨우 한 동짜리 공사일 때. 우리가 금전적인 손실을 감당하면서까지 먼저 사죄하고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당장은 사람들이 몰라볼지라도 그 결과는 사라지지 않아. 그게, 우리 명진건설의 근간이 될 거고.”
“……진짜 이상주의자야 뭐야.”
고창석이 질린다는 표정을 보였다.
고창범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란 감정이 들었다. 그가 아는 고창범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소신이고 뭐고 매일같이 놀기 바빴던 사람인데, 이상주의일지라도 이상을 앞세운 논리는 명확한 명분이 존재했다.
결국.
결정권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명진건설의 회장인 고명진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 명진건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결정될 테니까.
두 아들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일까.
설전을 지켜보던 고명진이,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장남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체크메이트(Checkmate).
고명진의 말에, 고창석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 * *
고명진이 말했다.
“이 아비는 말이다. 이번 사건을 듣고 가장 분노했던 부분이, 항상 완벽한 결과물을 추구했던 우리 명진건설이 겨우 타설 사고와 같은 기본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거다. 집이란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안전이 최우선이며, 다른 복잡한 이해관계는 그 이후에 생각할 문제다.”
얼굴 가득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픈 손가락인 줄만 알았던 장남의 변화에, 고명진은 진심으로 웃음이 나는 걸 감추지 못했다.
“부동산 호황기다 뭐다 하면서 명진건설에도 수많은 일거리가 들어왔고, 그 때문에 공사 일정이 매우 촉박하다고는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런데도 매번 안전을 최우선하라고 말했지만, 처음 겪는 호황기에 밑에 있는 관리자들로서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겠지. 이해는 한다. 그들이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하지만, 명진건설의 간판을 달고서는 절대 저지르지 말아야 할 실수였다.”
스윽.
걸음을 옮겼다.
책상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꺼내더니, 모두에게 보란 듯이 툭 던졌다.
“이게……?”
“공사 제안서다.”
“공사 제안서요?”
김현성이 아는 미래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고명진 회장은 인터뷰에서 장인 정신만을 드러냈지만, 그 이면에는 장사꾼의 기질이 분명히 존재했다.
“대산시에서 대산에 충분한 주거 공간 확보를 위해 제안해 온 것이다. 규모는 약 5천 세대. 그동안 기업이랍시고 진행해 왔던 일 중에는 가장 큰 규모이며, 이번 공사에 필요한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게 대산시의 입장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안전 문제를 일으킨 건설사 이름에 명진건설이 올라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산시와 우리 명진건설이 아무리 우호적인 관계라지만, 우리의 이 거래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겠지.”
그 말에.
고창석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5천 세대 규모의 공사라면, 아파트 한 동짜리는 포기하면서 평판을 관리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걸 형이 예상했을까?
절대 아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고창범의 표정만 보더라도, 고창범은 이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아다리가 제대로 걸렸다는 의미였다. 고창석이 애써 표정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그때, 고명진은 고창범에게 다가가더니 그를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창범아. 난 네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으니 결국 나를 닮는구나.”
“……아버지.”
“그래, 잘 생각했다. 명진건설은 기업이되, 집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업이다. 내가 밑바닥에서부터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믿음을 충분한 보상으로 되돌려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처럼만 하거라. 지금의 그 마음을 네 근간으로 삼고 열심히 발전해 나간다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의 따뜻한 말에.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에.
고창범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고양감이 들었다.
“넌 내 뒤를 잇게 될 거야.”
* * *
탁.
회장실 문을 닫았을 때.
고창범은 지난번처럼 기뻐서 날뛰지 않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지만, 처음으로 후계를 직접 언급한 상황에 강한 욕구가 피어올랐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처음이다.
아버지의 기대를 받아 본 것이.
고창범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더니, 고창석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김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탈칵.
[어떻게 됐어요?]
“네 말대로야. 공사를 새로 하자고 말했더니…….”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했고, 어떤 반응이 돌아왔는지.
지금의 결과는 모두 김현성이 도와준 덕분이었기에, 그에게 티끌도 숨길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이래.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뭘 해야 할까? 아버지는 지금처럼만 하라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번 일에 5천 세대 공사 건이 걸려 있는 건 의외네요. 확실한 건 고명진 회장님은 타설 사고가 오히려 명진건설의 평판을 드높이는 반등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원래 돈이라는 건 어설프게 쓰면 욕을 먹는 법이지만, 제대로 쓴다면 충분한 값어치를 하죠. 그러니, 돈을 한번 제대로 써 보시죠.]
“돈을?”
고창범은 문득.
자신이 정말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성은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김현성과 같이 유능한 인물들을 반드시 곁에 두어야 했다.
[이번 사고에는 두 부류의 피해자가 있어요. 첫 번째 부류는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서 이미 계약금을 넣은 사람들. 그들은 미뤄진 기간만큼 분양 가격에 대한 보상을 해 주고, 안전 문제도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크게 불만을 지니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번 사고의 확실한 사후 처리는 두 번째 부류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겠죠.]
“그게 누군데?”
[사고 피해자들. 타설 사고로 인해 몸이 다친 사람들.]
전화기 너머.
언제나 그렇듯, 김현성은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전부 해결해 주세요. 명진건설의 소속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 * *
이번 사고.
총 여덟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일곱 명은 경상에서 끝났지만, 한 명은 중상을 입어 그대로 수술대에 올랐다.
“……아무래도 두 다리를 절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흑!”
의사의 말.
아내 김은숙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느 가정이 그렇듯, 김은숙의 집안은 남편이 벌어 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자식을 셋이나 두다 보니 집안 사정은 매번 빠듯했지만, 김은숙은 가정주부로서 성실하게 일하며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왔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시간이 조금 남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일반적인 가정이었다.
나름대로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왔던 그녀에게, 남편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은 절망을 의미했다.
‘여보, 우리 이제 어떻게 살아요.’
밤새 울었다.
막막한 현실에 울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현장 기술자인 남편이 두 다리를 절단한다는 것은, 현장에서 일하는 그의 생명이 사실상 끝났다는 의미였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나마 기댈 수 있는 희망은 건설사에서 충분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인데, 건설업에 종사하는 그녀의 오빠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은숙아.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아마 건설사들은 절대 보상을 제대로 해 주려고 하지 않을 거야. 걔들은 보상해 주다 보면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라, 적당히 체면치레하는 정도에서 끝내겠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 네 남편의 두 다리 값을 제대로 받으려면, 얼이 빠진 얼굴로 있어서는 안 돼. 너만 단단하게 버티면 이 오빠가 같이 도와줄게.”
건설사들의 악행.
익히 들어 왔다.
명진건설뿐만 아니라, 원래 건설 업계에서는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예를 들어 영구적인 장애를 얻으면 사람은 평생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데, 건설사들은 단순하게 계산을 끝내 몇천만 원을 던져 주고 끝내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그것도 양반이었다. 몇몇 건설사들은 아예 책임을 회피하고, 최소한의 금전적인 보상도 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김은숙은 많은 것은 바라지 않았다.
상식적인 보상.
가장을 잃은 가정이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정말 상식적인 수준의 보상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음 날.
명진건설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에, 김은숙은 오빠를 대동하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은숙아, 긴장하지 말자. 이제 네가 가장이야. 절대 흔들리면 안 돼.’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빠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보니,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김은숙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광경을 마주했다.
“죄송합니다! 명진건설을 대표해서 이번 사고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고창범.
그를 필두로, 명진건설의 사람들이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