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선의의 나비효과 (4)
김은숙이 눈을 끔뻑였다.
설명으로도 충분히 들었고, 계약서로도 내용을 확인했지만, 도무지 이게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다시 설명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이 자리.
명진건설의 장남, 공사 책임자, 사내 변호사가 있었다.
그들은 김은숙의 부탁에도 전혀 싫은 티를 내지 않았고, 고창범의 눈짓에 사내 변호사가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타설 사고는 전적으로 건설사인 저희 명진건설의 책임입니다. 만약 무리한 공사 일정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절대 남편분이 경험하신 끔찍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가 어떤 말로 사죄해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저희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책임을 통감하고, 앞으로 발생할 현실적인 문제를 같이 해결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수술비와 치료비는 물론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은 산재 보험으로 처리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보상의 명목으로 5억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두 다리의 보상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세 아이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보상금을 주시는 건가요?”
“예, 당연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편분을 현장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특별 채용하겠습니다. 현장이 아니더라도 현장의 경험이 필요한 자리는 존재합니다. 보상금과는 별개의 의미이며, 남편분이 명진건설을 위해 헌신한 세월을 저희는 절대 외면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
눈물이 핑 돌았다.
예상하지 못했다.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보겠다고 지저분한 실랑이를 벌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건설사에서 먼저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해 줄 줄은 몰랐다. 김은숙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아직 저 말이 모두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써 눈물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오빠?”
옆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한참이나 계약서를 바라보던 오빠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김은숙을 바라보았다.
“전부 사실인데……?”
“정말?”
“그래, 다 사실이야. 명진건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어. 정말, 정말 고마운 분들이라고!”
그때부터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김은숙이 눈물을 터트리자, 그녀의 오빠도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김은숙을 꽉 안아 주었다.
힘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그 막막한 현실에 김은숙 남매는 지난 며칠 동안 지옥에서 살았다. 명진건설의 보상으로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편의 잃은 다리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은 진심으로 그들을 기쁘게 했다.
가장은 다리를 잃었고.
세 아이는 무럭무럭 크고 있었다.
명진건설의 선의는, 앞으로 감당해야 할 현실이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희망을 부여했다.
펑펑 우는 두 남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고창범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 * *
고된 하루였다.
온종일 피해자들과의 시간을 보낸 고창범은, 병원에서 나와 담배를 하나 물었다.
“하아-.”
그는 지독한 골초다.
하루에 보통 2갑은 피울 정도로 담배를 달고 살았는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자리이니만큼 아침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단 한 개비도 피지 않았다. 그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그게 단순한 금단 현상인 줄 알았는데, 담배로 속을 달래고도 미칠 것 같은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 버리겠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바로 옆에는 공사 책임자가 있었는데, 담배도 피우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그를 바라보며 툭 물었다.
“야.”
“예, 말씀하십시오.”
“너는 건설 일이 뭐라고 생각하냐.”
“……글쎄요. 그냥 건물을 짓는 일 아니겠습니까.”
책임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나이 50이나 먹었지만, 상대가 명진건설의 장남이니만큼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창범이 피식, 웃었다.
익숙했다.
명진건설의 장남으로 살아가며, 나이를 제법 먹은 어른들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그래서 제멋대로 살았다. 학교든, 사회든. 어느 공간에서든 자신은 포식자였다. 그나마 서울에서 놀 때는 자신보다 상위 포식자들이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연기에, 고창범은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말이야. 이 건설업이 그냥 돈벌이라고만 생각해 왔어. 건물을 짓고, 건물을 팔고. 아주 단순한 시스템이라고. 그런데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고. 창석이가 우리 일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면서 금전적인 문제를 말했지만, 나는 그 녀석과는 생각이 달라. 명진건설에서 일하는 인부들. 그들은 우리가 아니면 생계를 해결할 수 없어. 우리의 집을 사는 소비자들. 그들은 평생을 일해서, 우리가 만든 집 한 채를 보물처럼 생각하면서 살아.”
보상금으로 내준 5억?
큰돈이다.
하지만 고창범에게는, 마음먹으면 언제든 쓸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돈에 불과했다.
“내가 그동안 회장의 자리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봐. 내가 내뱉는 말, 내 판단에 따라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이 달려 있어. 내가 공사 일정을 빠르게 앞당기라고 말한다면, 내 명령을 받은 공사 관리자의 재촉으로 오늘과 같은 사고가 발생하겠지. 그리고, 누군가는 가장을 잃은 슬픔에 빠질 거고. 씨발, 복잡하다 복잡해. 나는 그냥 잘 먹고 잘살고 싶었을 뿐인데.”
김현성을 만나고.
고창범은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진심으로 회장의 자리를 탐내면서부터,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완전히 변했다.
예전 같아서는.
망나니처럼 살아서는.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없었다.
그동안은 책임이 결여된 쾌락을 즐겼다면, 앞으로 하는 모든 일에는 생각이라는 것이 조금 필요했다.
“확실히 내가 아빠를 닮긴 했나 봐.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만큼은 잘살았으면 좋겠거든. 명진건설의 인부들이든, 우리 집을 분양받은 사람들이든.”
“……좋은 말이네요.”
책임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오늘의 일이, 고창범의 그 말이.
그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때였다.
병원의 문이 열리더니, 행정 직원으로 보이는 인물이 표정을 찌푸렸다.
“아니,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어떻게 해요? 당장 끄세요. 여기 병원인 거 몰라요?”
당연한 요구였다.
여기는 병원이다.
아픈 사람들이 오는 장소에서, 흡연 구역도 아닌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은 상식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그런데.
“씨발, 안 꺼져? 방금까지 감성 딱 좋았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아니…….”
“꺼지라고. 병원 다 때려 부수기 전에.”
책임자의 미소가 쏙 들어갔다.
역시는 역시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 * *
명진건설 사건.
그건 스쳐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했다.
지방의 건설사, 그것도 사망자 한 명 없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진건설의 선의도, 명진건설의 과감한 결단도.
특별히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산에 사는 사람들이야 역시 명진건설이라면서, 실수도 확실하게 책임지는 건설사라면 믿고 맡겨도 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지만, 그러한 평판이 아파트 한 동을 새로 짓는 손실을 메워 주는 유의미한 결과는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고창범이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에, 분양 예정자들도 새롭게 건물을 올리는 일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강남의 아파트 현장, 타설 사고로 인부 다섯 명 사망!]
한 줄의 기사.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무려 다섯 명이 사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사의 조회 수는 빠르게 상승했고, 곧바로 후속 기사를 통해 사건의 경위가 밝혀졌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촉박한 공사 일정에 타설을 서두르다가 양생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건 사고는 공사판에서 비일비재한 문제다. 특히 공사 대금이 최소 백억 이상에서 시작하는 강남의 경우, 건설사들이 일정을 과도하게 재촉하면서 사고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의 증언도 추가되었다.
[이건 절대 인부들이 전부 사망할 사건이 아니었어. 사고가 일어났으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구조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건설사에서 상부에 보고부터 하겠다고 늦장 대응을 하다가 골든 타임을 놓쳐 버렸다고. 현장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알 거야. 사건 사고가 벌어지면 건설사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사람 생명보다 공사를 더 우선시하는 현장의 현실을.]
TV에 나오는 사건 사고들.
평소의 사람들은 가볍게 욕하고 넘어갔던 문제들이다.
그런데 다섯 명이라는 간과할 수 없는 사망자가 발생하자, 갑작스럽게 사람들의 반응이 들끓기 시작했다.
[건설 현장,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건설 현장의 안전 문제, 이대로 괜찮은가.]
[무리한 공사 일정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
속속들이 보도되는 기사.
더는 단순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지며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어느 순간 전국 전체로 번져 나갔다.
* * *
건설 현장의 안전 문제.
사회적인 이슈로 거론되었다.
특히 상승하는 집값에 맞춰, 그간 꾹꾹 억눌렀던 분노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아무리 공사가 중요하다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게 말이 되냐고!]
[건설사들 진짜 제대로 처벌해야 해. 전국적으로 건설 현장에서 하루에 몇 명의 사람이 다치고 죽는 줄 알아? 이건 웬만한 전쟁터 저리 가라야. 특히 부동산 호황기가 찾아오면서, 여기저기서 건물을 올리겠다고 지랄하면서 사람들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사건 현장을 보면, 안전장치가 제대로 마련된 곳이 없다니까?]
[이번 일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처벌만이, 건설 현장의 인부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난리였다.
대한민국은 냄비의 성향이 강하다.
금방 열기가 사그라진다는 의미지만, 한번 타오를 때는 정말 무섭게 타오른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방송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부동산과 건설 현장의 안전 문제이니, 그와 관련해서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시사 프로의 PD 안철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집중한 부분은 단순히 사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건설 현장 사고로 가족이 다친 피해자를 찾았다.
“강남 사건의 피해자들은 배제해. 지금 추모 분위기가 대단해서, 괜히 직접적인 피해자들을 불러들였다가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강남 사건처럼 건설 현장의 사고이면서, 건설사의 늦장 대응과 비협조적인 태도를 증명할 수 있는 인물. 어떻게든 그런 인물을 데리고 와.”
백방으로 찾았다.
그렇게 수소문을 한 끝에, 그들은 한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촬영이 진행되었다.
시사 프로의 MC는, 진중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증인이자 피해자인 남성을 바라보았다.
“본인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메라가 집중되었다.
안철현 PD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피해자 남성의 입을 바라보았다.
부담감이 컸다.
피해자 남성은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고민이 많았지만, 그는 반드시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제 이름은 오종혁이며, 모 인천 현장에서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피해자의 아들입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나운 얼굴로 병원을 나섰던 인물.
그리고 명진건설 사건에서, 고창범에게 타설 사고에 대해 말했던 젊은 인부가 바로 오종혁이었다.
그것은 김현성도 예상하지 못한.
나비의 날갯짓이,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