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철옹성(鐵甕城) (1)
고창범의 일.
김현성으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다.
이번 계획으로 의도했던 그림은, 고명진 회장의 핏줄임을 확실하게 어필하여 명진건설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 강남 대참사가 고창범의 업적을 부각할 것임은 알았지만, 그게 오종혁과 같은 새로운 미래를 낳을 줄은 몰랐다.
나비효과였다.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가, 자신의 계획처럼만은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시를 증명했다.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무조건 옳다고 믿어서는 안 돼. 고명진 회장은 분명히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장인 정신을 들먹이며 재공사를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애초에 손해를 보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물론 장인 정신이 없었다면 재공사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이면의 진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해.’
5천 세대 공사 건.
김현성의 기억으로는 미래에 진행될 일이다.
표면적인 사실에 따르면, 명진건설이 이번 사건으로 명성을 얻어 공사를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고 들었다. 누군가는 뭐가 다르냐고 물을 수도 있다. 재공사라는 대응으로 대산시의 신뢰를 얻었든, 공사를 확실하게 따기 위해서 재공사라는 결단을 내렸든. 결과는 똑같지 않은가.
하지만 과정이 다른 것도 다른 것이었다.
전자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면, 후자는 사실 계산기만 두드리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조금 전.
고창범으로부터 상무 취임과 관련한 문자를 받았다.
‘다행히도 진실을 모른 것이 우리에게는 득이 되었어. 5천 세대 공사 건을 알고서 결정했다면 고창범의 업적이 평가 절하되었겠지만, 그걸 모르면서도 명진건설의 가치를 따랐던 것이 고명진 회장에게는 확실한 어필이 되었겠지. 상무의 직책은 앞으로의 계획에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만, 나는 계획을 착실하게 진행하되 조금 더 철저하게 변수를 계산할 필요가 있어. 단 한 번의 실패도 내겐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앞에서는 한참 수업이 진행 중이었지만, 복잡하게 뒤얽힌 머릿속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틀어진 계획은 없었다.
원래라면 이번에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5천 세대 공사 건에 개입할 명분을 확보할 생각이었는데, 고명진 회장이 먼저 제안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긍정적인 변수였다. 그것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는, 김현성 본인의 판단에 달렸다.
그때였다.
부아아아앙-!
시끄러운 엔진음이 들렸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을 향했고, 김현성도 그들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새빨간 스포츠카.
대산에서 저렇게 요란하게 등장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문자로는 별말 없었는데. 학교에는 웬일이지?’
고창범은 역시나.
양반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 * *
끼익.
고창범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제집 안방인 것처럼 상석을 차지한 그는, 콧대가 높아진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오대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별다를 일이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번에 ‘상무’님이 해내신 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재공사가 쉬운 결정이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 과감한 결단을 내리실 수 있는 겁니까? 덕분에 같은 대산 시민으로서 제가 다 뿌듯합니다. 명진건설은 대산의 자랑이지 않습니까?”
“크흐흐.”
고창범이 실없이 웃었다.
오대환의 아부가 듣기 좋기도 했지만, 상대의 노골적인 반응이 상당히 웃겼다.
상무님이라니.
상무이사에 취임한 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늙은 너구리는 어디에서 벌써 들은 모양이었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전보다 더 굽신거리는 자세. 고창범이라는 동아줄이 튼튼하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그는 고창범을 위해 간과 쓸개를 전부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창범이 말했다.
“사실 이렇게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 현성이를 잘 돌봐 주었다는 말을 들어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왔습니다.”
“아닙니다. 교육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표현해야 아는 것이지 않습니까? 저는 교장 선생님께 우리 현성이를 부탁했고, 이번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현성이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교장 선생님이 제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는 의미겠죠. 사람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그런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선물이요……?”
오대환이 순진한 표정을 보였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들뜬 표정을 보이면서도, 애써 그 선물이 무엇인지 먼저 묻지는 않았다.
“천일 고등학교의 체육 시설이 많이 낡았다고 들었습니다. 이거 참 비통한 일이지 않습니까? 대산의 자라나는 새싹들이, 그것도 명문 천일의 학생들이 낡은 체육 시설을 이용해야 한다니요. 명진건설에서 마침 대산시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시의 협조를 얻어서 새로운 체육관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수영장이 딸린 멋들어진 최신식 수영장으로.”
“헉.”
오대환의 눈빛이 변했다.
새로운 체육관.
수영장.
그야말로 명문의 기본 조건이었다.
잘나가는 학교들은 체육관부터 다른 법인데, 늘 아쉬웠던 부분을 해결해 준다는 말에 오대환은 당장에라도 고창범과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속물적인 관계를 살아왔던 오대환으로서는, 고창범을 상대로 지금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오대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앞으로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오대환을 믿어 주십시오. 우리 현성이에 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 천일이. 현성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습니다.”
“하하하,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고창범이 방긋 웃었다.
그는 이런 노골적인 관계가 좋았다.
대가를 주고, 호의를 받고.
공사판에서 순수한 호의를 마주했을 때보다, 고창범은 더 진심으로 활짝 웃어 보일 수 있었다.
* * *
다음 목표는 김영철이었다.
공손하게 서 있는 김영철의 모습에, 고창범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참 좋습니다. 결국, 다 잘 살기 위해 아등바등 발악하는 이 세상에서, 권력자를 위해 일하는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저도 잘 압니다. 이번에 대놓고 신영민을 처벌하면서, 김영철 선생님이 제게 뒷돈을 받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는 것을요.”
“…….”
김영철이 말을 아꼈다.
사실이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선생들이든 학생들이든 그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겁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이 학교의 교장이 선생님의 뒤를 봐주는 이상 교직 생활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갔을 때,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온 우리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가장입니다. 끽해야 3년 보고 스쳐 지나갈 인연을 챙기는 것보다, 가족에게 부족함 하나 없는 아비가 되는 것이 더 보람찬 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선이 마주쳤다.
씨익, 웃었다.
두 속물의 웃음에, 고창범은 상대의 욕망을 건드렸다.
“듣기로는 미라클에 자주 간다고 하시던데.”
“아……. 예.”
말끝을 흐렸지만, 그것은 긍정의 의미였다.
충분히 이해하는 반응이었다.
김영철은 유부남이고, 여자가 딸려 나오는 술집인 미라클의 단골이란 건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좋은 가장을 운운한 것치고는, 김영철이 얼마나 이중적인 사람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오히려 좋았다.
고창범은 쓰레기들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일로 곤란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미라클에 말해 두었으니, 오늘은 친구분들을 데리고 가서 돈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노세요. 술값은 제가 전부 계산할 거고, 우리 김영철 선생님의 몸보신을 위해 비타민 박스도 하나 챙겨 두었으니 돌아갈 때 잊지 마시고요.”
“……예?”
김영철이 눈을 끔뻑였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눈빛이었다.
그동안 쓰레기 같이 살아오긴 했어도, 고창범과 같은 부류는 처음이었다.
이곳은 엄연히 학교다.
혹시나 누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창범은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요, 돈. 지금부터 머리에 새겨 넣으세요.”
김영철의 눈빛이 변했다.
욕망으로 얼룩진 그 눈빛에.
“당신이 거래하는 사람은 돈이 좀 있는 학부모가 아니라, 명진건설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난 보상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고창범은 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
수업이 끝나고.
김현성은 고창범을 만났다.
김영철이 특별히 상담실을 비워 주었고, 고창범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고맙다.”
“예.”
“예? 뭔지도 안 물어보고 그냥 예야?”
“뻔하잖아요. 이번 일에 관해 고마운 거겠죠.”
순간.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김현성은 17살 나이에서 비롯되는 풋풋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이에 어울리는 미숙함을 보여 주었다면, 고창범은 절대 김현성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이번 일로 난 너를 완벽하게 인정했어. 고창석을 처리한 일이야 불륜 관계를 알고 있으면 사실상 해결이 쉽지만, 이번 일은 절대 그런 문제가 아니었거든. 우리 아버지의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재공사라는 결단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넌 난놈이야. 그리고 난, 네 덕분에 상무의 직책을 얻었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사실 처음에는 김현성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세가 기울어 버린 상황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김현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김현성이 필요했다.
선택이 아닌 필수.
그렇다면 김현성과의 관계를 허투루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정확히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날 회장의 자리에 올리려는 것은 그만한 권력이 필요한 일을 벌이겠다는 의미겠지. 받아들일게.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고, 내가 아무리 쓰레기 같이 살았어도 받아먹고 외면하는 경우는 없었거든. 그러니까 넌 네 위치에서, 나는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우리는 항상 ‘거래’의 관계임을 잊지 말자는 의미야.”
“그래요.”
“진짜 싱거운 애네. 그나저나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난 이제 네게 정말 진심으로, 언제든 무엇이든 간에 해 줄 의향이 있거든.”
이번 사건.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고창범의 진심 어린 눈빛에, 김현성은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제 말한 적이 있었죠. 제 목표는 서울이라고요. 앞으로 제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이 천일은 그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鐵甕城)이 되어야만 해요. 아마 제 예상대로라면, 천일에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피하지 않는 그 눈빛에, 김현성이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절 위해 돈을 얼마까지 쓸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