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철옹성(鐵甕城) (4)
몇 시간 전.
배성호는 체육관을 나와 골목길로 들어갔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고,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존나 아프네.”
얼굴이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온전한 곳이 없었고,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고통이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처럼 생기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는 김현성에게 얻어맞는 내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에 그 누가 가만히 맞고 싶겠는가. 문득 바라본 하늘은 빙글빙글 돌았고, 목에서 끓는 가래침을 뱉을 때면 붉은 핏물이 뒤섞여 나왔다.
비참했다.
살면서 이토록 초라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큭, 크큭.”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확인하자, 웃음의 이유가 나왔다.
[입금 5,000,000원]
일방적인 구타가 끝나고.
김현성은 계좌번호를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용돈으로 써. 그걸 어떻게 할지는 네 마음이고, 넌 내일 내 개가 된 기념으로 장학대상으로 선발될 거야.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잊지 마. 네가 네 본분에 충실하면, 난 오대환과 김영철이 헥헥거리는 것처럼 좋은 주인이 되어 줄 거야. 그런데 네 본분을 잊고 선을 넘는다면.”
그때의 그 얼굴은.
“날 물어뜯은 개새끼를 반드시 찢어 죽여 줄게.”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생소한 공포였다.
신영민은 말 그대로 폭력에 의한 공포였다면, 김현성을 상대하면서는 심적으로도 완전히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김현성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신영민과 박민철 패거리가 소년원에 끌려간 것처럼, 그의 말을 어기는 순간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삶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다.
‘이게 진짜 맞는 일일까?’
개.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다.
꼬리를 흔들라고, 때려도 감히 이빨을 드러내지 말라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백만 원이라는 숫자를 바라볼 때면, 이상하게 고통이 사그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어차피 골든 서클에 들어갔으면 온갖 더러운 꼴을 봤을 거야. 차라리 잘된 일이지. 김현성을 따른다면 즉각적으로 보상도 나오고, 천일에서 더는 핍박받지 않을 테니까. 나같이 몸만 믿고 사는 새끼가, 이 이상의 대우를 어디서 받겠어?’
계산기를 충분히 두드렸다.
진심으로 우러나온 충성심이 아니다.
이것은 거래일 뿐이며, 자신의 자존심을 내던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답이 없는 인생이라면.
탈칵.
[어, 성호야. 무슨 일이야?]
“잠깐 보자. 할 얘기가 있어.”
배성호는 뭐든 할 때까지 해 보고 싶었다.
* * *
빠악-!
3학년 선배의 얼굴이 날아갔다.
나름대로 싸움을 잘하기로 유명한 선배였는데, 배성호의 솥뚜껑만 한 주먹을 버텨 내지는 못했다.
콰당!
“……끄으.”
“퉷.”
배성호가 쓰러진 선배에게 침을 뱉었다.
3학년 선배는 심음을 삼킬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공포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방금 쓰러진 선배가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배성호에게 반발한다고 세 명의 선배가 덤벼들었다가, 모두 똑같이 바닥을 나뒹굴고 처참한 몰골을 보였다.
배성호가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3학년 이 씨발 새끼들아. 네가 너희보다 싸움을 못해서 그동안 굽신거린 줄 알아? 그건 다 신영민 때문이야. 신영민 그 괴물 같은 새끼 눈치를 보느라고 맞춰 주었던 거지, 신영민 빼면 너희 다 병신이라고. 알아?”
슥.
시선을 돌렸다.
하나하나 시선을 마주치자, 다들 황급히 눈을 내리깔기 바빴다.
“아직도 이의 있는 사람?”
없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싸움으로 명성을 떨친 선배들도 나가떨어지는 마당에, 감히 배성호에게 대항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2학년끼리는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배성호와 같이 도착한 2학년 실세들은 아무런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3학년과 배성호의 싸움으로 번졌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다들 암묵적으로 불만이 없음을 드러냈다.
“그럼 이제 특별한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이중에서는 감히 김현성의 말에 토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을게. 명심해. 우리는 단순히 김현성에게 굴복한 게 아니라, 그를 정말 하늘처럼 모실 거야. 그가 명령을 내린다면 명령을 따르고, 그가 우리의 뺨을 때리려고 한다면 얼굴을 내주고, 천일에서 김현성을 적대하는 새끼가 있으면 우리 선에서 정리하게 될 거야.”
콱.
“끄으.”
3학년 선배의 머리칼을 잡았다.
서열 정리를 위해서는.
확실한 임팩트가 필요했다.
빠악.
빠악, 빠악, 빠악!
얼굴을 내리쳤다.
한 대 한 대 얻어맞을 때마다 형태가 변해 가는 얼굴에, 배성호의 눈빛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만약 그 누구라도 천일의 규율을 어기는 모습을 보인다면, 내가 약속하는데 진짜 죽을 줄 알아.”
스륵.
툭.
선배를 놓아주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선배의 모습에, 이 자리에 모인 천일의 학생들은 안색이 다들 창백해졌다. 배성호는 절대 경고만 할 사람이 아니었다. 신영민에게 계획을 말하고 정말 징계위원회를 각오할 정도로, 그는 어떤 판단을 내렸다면 실행에 옮길 만큼의 광기를 보유했다.
여기까지가 딱 좋았다.
채찍을 충분히 날렸으니 이제는 당근이 필요한 차례.
굴다리를 떠나기 전, 배성호가 교복에 피를 벅벅 닦아 내며 말했다.
“그리고 특별히 말해 주는데, 장학금과 관련한 김현성의 소문은 모두 사실이야. 기대해도 좋아. 우리의 하늘을 열렬히 떠받들어 모시면, 신영민을 따를 때와는 다르게 확실한 보상이 있을 테니까.”
* * *
하루가 지났다.
당시 굴다리에 있었던 박진우나 다른 학생들은, 아직도 배성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성을 하늘처럼 모시자니. 진짜 소문을 믿기라도 하는 건가. 명진건설이 노골적으로 김현성과 김시우를 챙겨 준 것은 맞지만, 그래도 명령을 좀 따른다고 우리에게까지 장학금을 줄 리는 없잖아.’
막말로.
배성호가 조금 한심했다.
분명히 얼마 전만 하더라도 김현성과 대판 싸워 놓고, 헛된 소문에 이끌려 김현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말이다. 박진우는 김현성과 김시우가 싫었다. 둘에게 연속으로 패배하면서, 나름대로 1학년 중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던 자신이 학교에서 찐따처럼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학교에 나간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분명히 아침까지는 별것이 없었는데, 1교시가 끝나고 보니 알림판에 이런 게 붙어 있었다.
[명진건설 장학 대상자]
-배성호
-조재진
충격적이었다.
배성호가 마지막에 했던 말.
확실한 보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보상이 주어지는 상황에, 박진우는 입 안의 침이 모조리 말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게 진짜 사실이라고?’
정말 비상식적이었다.
생각해 보라.
대체 명진건설과 김현성이 무슨 관계이기에, 김현성이 왕좌에서 손가락만 하나 까딱거리면 그 사람을 위해 턱턱 장학금을 내놓는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조재진이라는 이름이 눈에 밟혔다. 배성호는 그렇다 치고, 조재진은 어째서 장학금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를 찾아갔다.
조재진은 딱히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김현성의 허락을 받았기에, 박진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현성이가 하라는 대로 했거든. 그래서 받은 거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도 앞으로 행실 똑바로 해. 괜히 김현성이랑 시비 붙었다가 신영민 꼴 나지 말고.”
배성호에 이어.
조재진마저 증명되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김현성은 오대환과 김영철을 대놓고 배경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명진건설의 금력(金力)을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박진우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수많은 양아치를 만났다. 운동부를 다녔다 보니 인간관계가 대부분 빡셌는데, 김현성과 같은 유형은 난생처음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김현성은 정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 누구도 본인의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천일이라는 이름의 철옹성을.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학교에 다녀야 할지 고민하는 그때, 갑작스럽게 멀리서부터 친구들이 웅성거렸다.
“김현성이다.”
“……비켜, 비켜.”
“시우도 있어.”
김현성과 김시우.
그들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고, 둘도 시비를 걸 의향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친구들이 옆으로 비켜 주었다.
박진우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 쪽으로 왔을 때는 황급히 몸을 틀어 길을 열었다.
그제야 알았다.
‘상황이 바뀌었어.’
앞으로 이곳에서는.
적어도 천일에서는.
감히 김현성에게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 * *
11월.
슬슬 찬 바람이 불었다.
골든 서클의 브로커 정찬수는, 외제 차 브랜드 마크가 박힌 운전대를 잡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 의뢰를 완수한다는 겁니까? 지금 천일의 분위기가 어떤 줄 아십니까? 김현성이 한바탕 뒤엎어 버리면서, 1학년은 물론이고 그 위의 선배들도 아무런 소리를 못 하고 있답니다. 이게 다 의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골든 서클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송이요? 추가 의뢰비까지 받아먹고 죄송이란 말이 나옵니까? 허 참. 골든 서클이 정말 일을 잘 처리한다고 해서 믿고 맡겼던 건데, 요새 우리 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내 속이 다 뒤집힙니다. 곧 기말고사인 거 아시죠? 12월이 되기 전에 인정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골든 라인 회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릴 겁니다. 골든 서클이 예전만 하지 않다는 것을요.]
정찬수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어폰 너머로 빽빽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짝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뢰인은 돈줄이자 하늘이다.
골든 라인 회원들에게는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기에, 정찬수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도록 완벽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괴롭힘이라는 게 한번 시작되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법입니다. 11월이 가기 전에 김현성을 무너트린다면, 기말고사가 찾아올 무렵에는 김현성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어 보죠.]
“예, 감사합니다.”
탈칵.
전화를 끊었다.
참 성가신 상황이었다.
서울 의뢰도 아니고 겨우 지방 의뢰다.
크게 돈이 되지 않는 의뢰인데,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찬수가 백미러를 힐끗 확인했다.
“태준아, 자신 있지?”
뒷좌석.
날카롭게 생긴 학생이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가 옆으로 째진 눈을 가리는 것 없이 드러냈고,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교복 안으로 보이는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골든 서클의 일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만에 휙휙 처리할 수가 없다. 행정적인 절차나 일을 처리할 사람을 물색하는 등, 여러 노력 끝에 정찬수는 태준이라고 부른 학생을 이 차에 태울 수 있었다.
최태준이 피식 웃었다.
“왜 뻔한 걸 물으세요. 약속이나 확실하게 지켜 주세요. 이번 의뢰를 완수하면 따로 챙겨 주시기로 한 거.”
“알겠으니까, 잘만 처리해.”
끼익.
차가 멈추었다.
정찬수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최태준만 홀로 차에서 내렸고, 그가 걸어가는 모습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펄럭거리는 현수막.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천일 고등학교]
이제는 걱정을 좀 내려놓았다.
최태준이라면.
‘천일 정도는 금방 해결하겠지.’
정찬수는 시선을 돌리더니,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다시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