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서울에서 온 전학생 (2)
최태준의 존재.
박진우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자신의 전성기(?)를 기억해 주는 친구가 나타났기에, 뭐든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최태준이 김현성을 건드린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박진우의 사고가 정지되었다.
“이런 씹…….”
천일 고등학교.
이곳에서 김현성은 왕(王)이었다.
단순히 말로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신영민을 쓰러트린 이후, 배성호는 공개적으로 김현성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반적으로는 잘 체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일주일 전에 그와 관련해서 사고가 발생했다.
3학년들.
신영민과 친하게 지냈던 선배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고, 그들이 김현성의 흉을 본다는 사실이 배성호의 귀까지 흘러 들어갔다. 사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김현성이 볼드모트도 아니고 입에 올릴 수 있는 건데, 배성호는 단 한 번의 예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3학년 교실을 찾아갔다.
실세들을 대동해 한바탕 뒤엎어 버리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3학년들에게 앞으로 그랬다간 진짜 죽여 버리겠다고 경고했다. 배성호가 진심으로 김현성을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임과 동시에, 앞으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간 3학년 선배들처럼 된다는 임팩트를 남겼다.
그렇다고 일반 학생들이 이런 분위기를 싫어할까?
아니다.
광복절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일반 학생들은 오히려 김현성의 통치를 반겼다.
신영민이 왕으로 군림할 때는 학교 폭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지만, 상황이 바뀌고서는 그 누구도 친구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건 바로 배성호 때문이었다. 적어도 천일 안에서는 맹견이 아니라 순한 개처럼 지내라는 김현성의 말에, 배성호는 먼저 나서서 학교 폭력을 막았다. 배성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버티다 보니, 자연스럽게 천일의 분위기는 화목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는 애들에게도.
일반 애들에게도.
김현성은 지지를 받았다.
박진우로서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진정한 의미의 왕이 탄생했는데, 자기가 뭐라고 그 왕에 대항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왕을 최태준이 건드렸다.
박진우의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으로 기적의 계산법이 작동했다.
최태준과 자신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다 → 자신이 직접 최태준을 1반으로 안내해 주었다 → 자신이 안내해 준 최태준이 김현성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모든 과정이 자신의 의도로 보일 수도 있다 → 범인으로 지목당했다간 이 학교에서 낙인이 찍히고 천일 전체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
그 결론은.
‘X 됐다.’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다.
빠르게 뛰쳐나갔다.
생각은 찰나에 불과했고, 최태준의 몸을 거칠게 돌리더니.
빠악-!
얼굴에 선빵을 날려 버렸다.
* * *
최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묻은 입술을 닦아 내며, 박진우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씨발,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친구처럼 대해 줬더니 돌았냐?”
“……친구?”
박진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최태준의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거대한 체격을 드러냈다.
“내가 언제부터 너랑 친구였냐? 그냥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이것저것 알려 주었던 건데, 날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어?”
“곤란? 김현성을 건드렸다고 곤란해?”
“그래, 곤란해. 난 현성이에게 밉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까…….”
성큼성큼 걸어갔다.
둘의 거리는 짧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상황에, 최태준과 박진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넌 뒈진 줄 알아라.”
팟-
박진우의 선공이었다.
거대한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최태준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간발의 차이로 주먹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빠악-!
“컥.”
박진우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깔끔한 카운터(Counter)였고, 박진우는 이를 악물면서 이대로는 무너지지 않겠다는 듯이 붕붕 훅을 휘둘렀다. 어느 것 하나 적중하지 않는 공격이었다. 최태준은 거리를 떨어트리면서 박진우의 공격을 모두 흘려보내더니, 깔끔하게 후속타를 작렬시켰다.
퍽!
퍽, 퍽, 퍽!
순식간에 얼굴이 피떡이 되었다.
체격적으로는 박진우가 상대를 압도했는데도, 마치 박진우가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서울.
인구 천만의 도시.
겨우 백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 대산과는 다르게, 서울에는 인구만큼이나 강한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최태준은 그중에서도 이름을 알린 존재다. 겨우 17살에 불과하나, 혼자서 레슬링부를 박살 내고 골든 서클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싸움의 스페셜리스트임을 증명했다.
정찬수의 판단은 옳았다.
박진우의 얼굴에서 코피가 터졌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일방적인 상황에, 박진우가 이를 악물었다.
“썅!”
팟.
우당탕!
책상과 의자가 쓸려 나갔다.
마치 코뿔소처럼 가드를 올리고 달려들었고, 그건 주먹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콰앙-!
최태준의 몸이 들썩였다.
엄청난 충격에 뒤로 밀려나는 듯하다가, 그의 허벅지가 무섭게 부풀어 오르며 박진우가 더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 냈다. 박진우의 계획은 체격을 살려서 상대를 무너트리려는 생각이었다. 씨름 기술을 더해 최태준을 제압하려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최태준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겨우 이 정도야?”
빠악-!
등을 내리찍었다.
박진우가 몸통을 붙잡고 버티는 상황에, 최태준이 계속해서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빠악!
빠악, 빠악!
비틀.
박진우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말 강했다.
서울에 놀러 갔을 때 최태준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차이가 날 정도인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어차피 떨어진 평판에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 모습을 김현성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무죄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끝이다.
3학년 선배들처럼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고, 박민철 패거리 꼴이 나면 인생을 돌이킬 수가 없다.
고로.
“으아아아-.”
머리를 들었다.
마지막 일격을 위해 팔을 크게 뻗는 순간.
빠악-!
박진우의 머리에 하이킥이 작렬했다.
콰당!
* * *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최태준이 가래를 끌어모았다.
“카악, 퉷. X도 아닌 새끼가 어디서 개겨.”
“끄으…….”
박진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반항은커녕 바닥에 쓰러져 신음만 흘리는 모습에, 최태준의 시선이 김현성을 찾았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김현성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나자빠지는 상황에도, 의자에 앉아 빤한 눈빛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 너 아주 재밌었나 보네? 거기서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상황이 웃기긴 했지.”
“진짜 돌았네, 이 새끼가.”
머릿속에서.
콰르르릉, 하고 활화산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태준은 인내심이 대단하지 않다.
김현성이 예상 범주를 넘어서는 건방짐을 보이자, 지금부터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죽이자. 명분이고 뭐고 한번 짓밟고 생각하자.’
걸음을 옮겼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당장에라도 김현성에게 달려들려는 그때.
딩동댕동-
멈칫.
종이 울렸다.
최태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면 곧 선생님이 들이닥칠 테니,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주먹을 뻗지 못했다.
한발 물러났다.
그러고는,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기대해도 좋아. 나 뒤끝 개쩔거든.”
히죽, 웃었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김현성은 절대, 이 학교에서 평안한 삶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 * *
교실로 돌아왔을 때.
최태준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전 수업만 하더라도,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이것저것을 물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서울은 어때.”
“와, 너 진짜 몸 좋다.”
“태준아, 태준아. 넌 뭐 좋아해?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돼.”
남녀 할 것 없이.
전학생은 화제의 중심이었다.
처음에야 퉁명스러운 반응에 어색한 모습을 보였지만, 박진우가 살갑게 연결해 주자 다들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최태준으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그도 17살 고등학생에 불과했기에, 여전히 시크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친구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박진우와 한바탕하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그 누구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뭐지?’
박진우는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맞은 충격에 보건실을 간 것 같은데, 그 일을 뒷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괜히 머리가 아팠다. 시작부터 일이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원래라면 김현성부터 짓밟고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김현성이랑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애먼 사람과 시비가 붙고 말았다. 혹시라도 그 여파가 돌아온다면 최태준으로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민영이 주도하는 영어 수업이었는데, 칠판을 빼곡하게 채우던 그녀가 분필을 내려놓고 말했다.
“지금부터 조를 짜서 프리토킹 시간을 가져 볼게. 자, 4명씩 한 조!”
“네!”
조별 과제였다.
5반 학생들은 익숙하게 조를 형성했다.
최태준이야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기에,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조가 형성되리라고 생각했다.
이상함을 느낀 건 어느 순간부터였다.
아무도 최태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분명히 인원이 맞지 않을 텐데도, 그 누구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이민영이 상황을 파악하고 지적했다.
“저기 태준이가 남잖아. 인원이 부족한 조는 태준이랑 할래?”
“……그건 싫은데요.”
“싫다고?”
“예.”
3명으로 구성된 조였다.
그중 뿔테안경을 낀 학생이, 대놓고 최태준을 거부했다.
그때부터 이민영과 학생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갔다.
이민영은 그래도 수업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고, 학생은 죽어도 최태준이 싫다고 대답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새끼들은 대체 뭐지?’
서울에서 그는 대우받던 사람이다.
싸움 실력만큼이나 학교에서 매우 유명했고, 남녀 모두 그에게 친해지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 자기가 친구라고 표현해 주면 좋아 죽는 찐따들도 많았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는데, 대놓고 자신을 배척하는 친구들을 보니 속이 완전히 뒤틀리는 것 같았다.
천일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현성이나, 박진우나, 5반 새끼들 전부.
마음 같아서는 수업이고 뭐고 한바탕 엎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자, 참아.’
의뢰가 우선이었다.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정찬수의 정보.
거기에는 천일의 선생들이 대놓고 김현성을 감싸고돈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그 정보에는 공백이 있었다. 신영민을 쓰러트린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은 갱신되지 않았다. 배성호를 필두로 김현성을 따르기 시작했고, 천일의 학생들이 현재의 체제에 만족한다는. 일반 학생들조차 김현성을 지지한다는 사실 같은 것들을 몰랐다.
5반의 반응.
사실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었다.
최태준이 전학을 오자마자 김현성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 부류의 학생들은 생각했다.
일단 노는 애들.
그들은 발작을 일으켰다.
감히 김현성을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최태준과 바로 선을 그었다.
싸움과 무관한 일반 애들은 그냥 최태준이 싫어졌다. 일반 애들에게 김현성은 성군(聖君)이었다. 그로 인해 학교에 평화가 찾아왔는데, 최태준 같은 애가 찾아와서 그 평화를 깨는 것이 정말 싫었다.
천일이 변했다.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골든 서클의 브로커 정찬수나, 의뢰를 위해 전학을 결심한 최태준이나.
막상 경험해야 알 수 있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수업이 끝났다.
끝끝내 최태준은 조를 이루지 못했고, 이민영이 나가는 모습에 최태준이 곧바로 의자를 걷어찼다.
쾅!
우당탕!
“야, 너 와 봐.”
화가 났다.
김현성을 처리하는 건 처리하는 거고, 일단 수업 내내 자신과 조를 거절했던 안경잡이를 죽여 버려야 할 것 같았다. 5반의 기강을 확립해 주고, 그 이후에 김현성을 찾아가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안경잡이는 우물쭈물하며 다가오지 못했다.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더 X 같았다.
저런 새끼가 날 무시했다니.
“그래, 내가 갈게. 이 씨발련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경잡이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드르륵.
콰앙!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순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박진우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거대한 체격.
“전학생이 누구야?”
배성호와 그 무리가, 살벌한 표정으로 교실 안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