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서울에서 온 전학생 (5)
문창호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보다 공격적인 반응에, 그가 급격하게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참견이라니요. 아무리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지만,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교육을 이끄는 동반자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대산의 문제를 지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그걸 월권(越權)행위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이 진짜!”
콰앙!
테이블을 내리쳤다.
명백하게 적대적이었다.
겨우 지방의 교육감 주제에, 자신에게 항명하는 이 상황을 문창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보세요, 조동진 교육감님. 그러다 진짜 큰일 나는 수가 있습니다. 천일뿐만 아니라, 대산의 교육계에서 벌어지는 비리들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나마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일 때는 치부를 모른 척 넘어가 주지만, 그따위로 나온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천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대산 전체의 문제를 들쑤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요?”
[대산에 소문이 하나 돌았습니다. 골든 서클이라는 집단이 존재하는데, 특정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무고한 학생들의 인생을 나락에 빠트린다고요. 문창호 교육감님에게 묻겠습니다. 진흙탕 싸움으로 가신다면 자신 있으십니까? 확실히 말씀드리겠는데, 저는 절대 혼자 죽지는 않습니다.]
골든 서클.
대놓고 언급되는 실체에 문창호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상대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가끔 서울 사람들은 크나큰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서울에 진출하지 못해서, 지방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이 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뒤가 없다는 겁니다. 저 멀리 높은 곳으로 올라갈 의향이 없으니, 포부가 대단하신 교육감님과 드잡이질을 하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에 문제가 없습니다. 뭐, 교육감 자리에서 내려온다면, 그냥 감투 없이 남은 삶을 살면 그만입니다.]
전화는 스피커폰이 아니었다.
정찬수로서는 웅얼웅얼 들리는 목소리에,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창호의 표정만 봐서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전화가 끊길 때까지.
[그러니까, 적당히 하십시오. 교육감님이나 저나. 서로 물어뜯기엔 도긴개긴 아닙니까.]
툭.
문창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전화를 끊었다.
조동진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마주 앉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대환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문창호가 생각보다 겁쟁이라서 대놓고 지랄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물밑에서 태클이 들어온다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감사합니다, 형님.”
오대환과 조동진.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서 같이 나뒹굴던 사이다 보니, 서로의 밑바닥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조동진이 말했다.
“그런데 일을 이렇게 처리해도 괜찮겠어? 서울 교육감이 나설 정도라면 그 골든 서클이라는 집단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일 텐데. 그러다 괜히 피를 보면 어쩌려고? 만약 권력자들이 마음먹고 이 대산의 비리를 파헤친다면, 너나 나나 절대 무사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압니다. 제가 교직 생활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설마 그런 것도 모르겠습니까.”
오대환이 차를 홀짝였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한 느낌에, 그가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뭐라도 해 주려는 사람에게 기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서울 교육감이든 뭐든 한평생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보다, 천일을 위해 ‘신설 체육관’을 만들어 주겠다는 명진건설이 제게는 우선일 뿐입니다. 형님. 아무리 시의 지원을 받는다지만 이번 일에 명진건설은 거금을 투척했습니다. 단순히 말뿐인 사탕발림이 아니라 명진건설은,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고창범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득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비리가 폭로되면. 교장의 자리도 끝이잖아.”
“그렇겠죠. 하지만 천일이 명문으로 거듭날 수만 있다면 굳이 제가 교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제 꿈은 모교(母校)에 대한 사랑이자 개인적인 열망이지, 제가 반드시 그 위를 군림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방금의 그 말이.
오대환이 대산에서 지지받는 이유였다.
비리를 비일비재하게 저지르는 인물이지만, 그는 지방 출신으로 무시 받았던 서러움이 특이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바로 모교에 대한 사랑. 본인이 졸업한 학교를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명문으로 만들어, 오대환은 대산 출신이라는 사실이 더는 부끄럽지 않도록 만들고자 했다.
대산 사람들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었다.
대산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교육자가 있는데, 대산의 출신이 어찌 그런 사람을 싫어하겠는가.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
조동진도 마찬가지였다.
오대환의 얼룩진 가치관이, 대산 시민으로서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오대환이 말했다.
“형님. 저희는 지금부터 현명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대산에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모든 돈과 권력은 서울에 집중되는 것이 현실인데, 명진건설은 대산 출신의 기업으로서 대산에 엄청난 돈을 뿌립니다. 세상 그 어디에 명진건설만큼 대산에 돈을 뿌리는 기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밑에서 입을 벌릴 뿐이고, 그게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탁.
찻잔을 내려놓았다.
빈 잔을 바라보며, 오대환이 묘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그 아이. 그동안 제가 지켜본 바로는 생각보다 더 영악한 아이니, 형님이 교육감 자리에서 내려올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 *
상황이 엉망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지만, 정찬수로서는 최태준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탈칵.
[태준아. 지금 상황이 조금 곤란하게 됐는데, 일단 교장이나 선생들이 지랄하는 건 무시해도 돼. 만약에 이번 일처럼 네 뺨을 때리려고 한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뿌리치고 나와. 그리고 절대 징계위원회는 소집되지 않을 거야. 걔들도 굳이 그런 진흙탕 싸움은 원하지 않을 테니까.]
뭔가.
뉘앙스가 이상했다.
최태준은 본능적으로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정찬수는 조금 전까지 당장에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했는데, 지금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 보였다. 만약 골든 서클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최태준은 타지에 그냥 떨어진 것이 되어 버린다. 그 사실을 알기에, 최태준은 살짝 굳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다 퇴학을 당하면요?”
[그럴 일은 없어.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서울에서 다시 받아 줄게. 어차피 거기 계속 다닐 생각은 없잖아.]
“하-.”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얼얼했다.
아직 맞은 부위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상황에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전학 첫날이다. 가볍게 생각했던 의뢰였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씨발, 막막하네.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만약 의뢰를 중도에 포기한다면?
정찬수의 지지를 얻으려던 것이, 오히려 그와의 관계 악화라는 문제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뢰를 진행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천일에서 겨우 딱 하루를 생활했지만, 이미 천일이라는 철옹성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경험했다. 막말로 김현성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신영민을 쓰러트린 강자일지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의뢰의 목적이 ‘연속성’에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의 괴롭힘이 아니다.
성적이 떨어지도록.
절망에 빠지도록.
끊임없는 괴롭힘이 필요했다.
김현성의 호위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뚫고, 연속되는 절망을 맛보게 할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야. 성공도 자신할 수 없고.’
하지만 만약.
성공만 해낸다면.
최태준은 정찬수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최태준이 말했다.
“할게요. 천일에 남아서 의뢰를 성공시켜 볼게요. 단, 이거 하나만큼은 기억해 주세요.”
엉망진창이었던 그날.
최태준은 결단을 내렸었다.
골든 서클의 시험을 치렀고, B등급을 거머쥐며 부와 명예를 얻었다.
선택의 갈림길.
지금도 그때와 같았다.
최태준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제가 브로커님을 한 번 살려 드린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최태준이요.”
* * *
폭풍이 지나갔다.
최태준은 얌전히 교실로 돌아갔고, 더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진우도.
배성호도.
2학년 패거리도.
본인을 피떡으로 만든 상대를 지목하지 않았다.
천일로서는 괜히 문제를 들춰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고, 정찬수로서도 대산 카르텔을 해결하지 못하다 보니 결국 ‘학생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문제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최태준은 정말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텅 빈 교실 안.
최태준은 홀로 남았다.
야외 수업이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태준은 천일의 평화를 깨트렸다.
노는 애들, 일반 학생들 가릴 것 없이 최태준을 싫어했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말을 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천일의 왕인 김현성을 건드리지 않았던가. 괜히 대세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최태준은 천일에서 인정하는 왕따로 전락하고 말았다.
황당했다.
살면서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싸움 실력은 학창 시절에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고, 최태준은 천일에서 그 누구와 싸워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당연하게 자신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려야 하는데, 천일의 얼간이들은 절대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처럼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악의가 쌓여 갔다.
하루가 지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반드시 의뢰에 성공하고 만다. 김현성은 물론이고 천일의 개새끼들 모두, 날 이렇게 대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줄게.’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일단 서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대산에 원정을 뛰어서 주변 학교들을 포섭, 그리고 천일을 압박해 김현성을 외톨이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계획을 성공시킬 자신은 있었다. 성동구에서 이름을 날리던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일이니, 자신까지 합류한다면 겨우 대산 따위가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막말로.
혼자서도 자신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싸움이었지만, 최태준은 대산이 자신의 클래스를 감당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최태준은 홀로 밥을 먹었다.
‘더럽게 맛없네.’
혼자 먹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맛이 없기 때문일까.
밥을 먹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서울에서는 점심시간만 눈이 빠지라 기다렸는데, 대산에서의 점심시간은 초침이 눈에 밟힐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밥은 금방 먹었다.
식판을 거의 비워 갈 때쯤, 갑작스럽게 누군가 앞에 앉았다.
끼익.
탁.
“……?!”
놀라서 앞을 바라보았다.
최태준의 조치는 왕명(王命)이었다.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원하기에 모두가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자신의 앞에 앉았단 말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앞을 확인한 최태준은, 표정이 빠르게 굳는 것을 느꼈다.
“밥이 입에 맞나 보네?”
털이 쭈뼛 섰다.
매일 밤 되새겼던 얼굴.
의뢰의 목표인 김현성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