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체불명의 배후 (1)
어느덧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올해 한 해를 어떻게 보냈냐고 묻는다면, 고창석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참 엿 같은 해라고.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으로 귀국, 검사 집안의 와이프와 혼인을 올릴 때만 하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물론 장남인 고창범이 존재하는 한 명진건설의 후계는 보장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고창범은 경쟁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꼴통이었고, 올해는 반드시 그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후계의 자리를 공고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분명히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몇 달 사이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다들 말씀들 좀 해 보세요. 아버지는 무조건 저를 차기 회장으로 생각한다고 말들 하셨는데, 제가 아니라 형님을 먼저 ‘상무 자리’에 올렸지 않습니까. 이러다 만약 덜컥 장남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그동안 해 온 일이 있는데 괜찮겠냐고요.”
명진건설 본사.
고창석은 본인의 사무실에 주요 인사들을 불러들이더니,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분노를 토로했다.
최근 벌어진 일들.
정말 황당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창범은 평생 공사판에 관심이 일절 없었던 한량인데, 미디어에 마치 영웅처럼 비치면서 명진건설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지 않았던가. 뽀록도 이런 뽀록이 없었다. 하늘이 의도적으로 고창범을 도와주기라도 하듯이, 그의 행보가 조명되는 상황은 고창석의 속을 시커멓게 타들어 가게 했다. 특히 오종혁이 인터뷰할 때는 정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한 임원이 말했다.
“이건 정말 불가항력입니다. 고창범 상무가 이번 일로 기회를 잡은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렇다고 고창석 팀장님이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고창범 상무는 실무에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이 바닥에서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겪어 온 팀장님에 비하면, 그는 아직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비등비등한 차이라면, 아버지는 장남을 선호하실 분입니다.”
“……크흠. 혹시 사모님과의 화해 가능성은 없으십니까? 지금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호전시키려면, 내실부터 다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제가 몰라서 안 하는 줄 아십니까!”
콰앙!
책상을 내리쳤다.
분노가 치밀었다.
외도 사건 이후.
와이프와의 관계는 골칫거리로 남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관계를 금방 회복할 줄 알았는데, 고창석의 지지부진한 모습에 와이프의 집안에서 살짝 망설이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고창석이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지 못한다면. 가정에 충실하지도 못한 쓰레기와는 살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기에 남편을 지지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건만, 그쪽은 어느 정도의 성과라도 증명하기를 바랐다.
갑갑했다.
답이 없었다.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임원들을 불러들였는데,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X 같네, 진짜.”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임원이라고 한들 결국 수하일 뿐이다.
그동안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했지만, 필요가 없다면 대우할 가치도 없었다.
그때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고창범 상무의 배후에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철진.
명진건설의 사내이사 중 한 사람이 묘한 눈길로 의문을 제기했다.
* * *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고창석이 물었다.
“김철진 이사님.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선이 집중되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김철진은,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어서 말했다.
“우리가 아는 고창범 상무는 얼간이입니다. 본인의 밥그릇도 챙기지 못하는 등신이라, 우리는 고창석 팀장님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단순한 파벌 싸움을 떠나서 그딴 얼간이에게 힘들게 일군 이 회사를 맡길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고창범 상무의 행보는 이전과 확연히 다릅니다. 단순히 우연이 겹치는 게 아니라, 그간의 성과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시작은 와이프.
고창석의 외도 문제였다.
“팀장님의 외도 사실은 ‘누군가의 제보’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모님이 뒤를 캐다가 밝혀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제보가 사모님을 오피스텔로 향하게 했습니다. 사실 제보자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는 그 상황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을 의심해야 합니다. 바로 고창범 상무. 그만한 수혜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고창범 상무의 계획이라고 가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적인 의심은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고창범 상무는 곧바로 건설사 말단으로 들어갔습니다. 매일 같이 가라오케에서 술만 퍼질러 마시던 한량이, 회장님에게 자신의 성실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나갔습니다. 그게 고창범 상무의 본인 의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그 녀석은 한심한 쓰레기고, 절대 본인의 판단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단언했다.
김철진은 무려 30년 동안 명진건설에서 일했다.
말단에서 사내이사의 직책을 맡기까지, 그는 고창범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혐오감이 들었다.
“타설 사고 이후의 대응도 그렇습니다. 타설이 뭔지도 모를 녀석이, 타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명진건설이 취해야 할 이상적인 태도를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단순 손익 계산으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인데도, 그는 회장님의 가치관을 공략하는 입바른 발언을 내뱉었습니다. 아직도 그에게 배후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누군가가 고창범 상무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배경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배경이 존재한다고 한들, 누군지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창석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겁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배경을 찾자는 겁니다. 찾아만 낸다면, 저희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고창석의 말이 옳았다.
임원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고창석을 지지하며 해 온 일들이 있기에, 반드시 그가 회장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김철진이 말했다.
“더는 고창범 상무를 도와주지 못하게 없애 버리거나, 아니면…….”
불리한 상황.
그것을 단번에 뒤엎을 묘수.
“언더독(Underdog)이었던 고창범 상무를 이렇게까지 끌어올린 그 배후를, 우리 편으로 포섭하면 됩니다.”
* * *
고창석은 김철진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정체불명의 배후를 파악하기 위해, 고창범에게 사람을 붙였다.
[아침 6시]
찰칵-
사진을 찍었다.
원래의 고창범이라면 이제 막 가라오케에서 나왔어야 할 시간인데, 고창범은 이른 아침부터 정갈한 옷을 입고 현장으로 향했다. 상무 이사직을 달고도 현장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타설 사고의 책임을 그대로 떠안아 현장을 체크했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에야 본사로 출근했다.
[오후 2시]
찰칵-
조금 늦은 점심이었다.
고창범이 누군가와 밥을 먹고 있자, 카메라가 크게 확대되며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이번 5천 세대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명진건설의 직원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내부적으로 알아본 것에 의하면, 고창범은 매일 담당자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보고를 올렸다.
아직은 배후가 나타날 때가 아니었다.
정체를 밝히지 않을 생각이라면, 당연히 일과가 끝나고 만날 것으로 판단했다.
[오후 6시]
차를 몰고 따라갔다.
고창범이 내린 곳이 왠지 익숙했다.
하루의 마무리로 현장을 찾아갔다는 사실에, 심부름꾼은 실망한 표정으로 셔터를 눌렀다.
찰칵-
[오후 8시]
찰칵-
이번에도 수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창범을 미행한 지난 며칠 동안 저녁에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만난 사람도 배후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일반적인 인맥이었다. 그와 간단하게 술을 한 잔 기울였다. 예전에는 가라오케를 가서 여자를 끼고 놀았는데, 지금은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찰칵, 찰칵, 찰칵-
감시는 계속되었다.
고창석은 보상을 내걸었다.
어떻게든 배후만 찾아낸다면 충분히 보상하겠다고 말했지만, 일주일이 지나고서 이런 보고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배후로 의심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단 핸드폰 기록과 여러 정확을 확인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배후를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성과는 없었다.
정체불명.
그림자조차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 고창석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 * *
늦은 오후.
김현성은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탈칵.
[현성아, 나 고창범이야.]
“이 번호는 뭐예요?”
[대포폰이야. 사실 지금 내게 꼬리가 붙었거든. 아무래도 고창석 그 개자식이,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에 배후를 알아내려는 것 같아.]
고창범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동생과 본격적으로 후계 싸움을 시작하자, 본인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붙는 것을 체크했다. 만약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일을 도맡는 심부름꾼이 ‘꼬리’가 붙었다고 말해 준 덕분에, 그때부터 사람을 가려 만나고 대포폰도 하나 구했다.
고창범이 말했다.
[다행히도 너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했어. 너와의 접점은 존재하지만, 그래도 고등학생이 내 배후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거겠지. 당분간은 조심하자. 밖에서 만나지 말고 대포폰으로 연락하고, 나도 너의 후견인이라지만 공개적으로 나서는 건 자제할 생각이야. 괜히 방심했다가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전화기 너머.
고창범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김현성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그건……. 좀 그렇잖아. 네 정체를 알아내면 뭔 짓을 할지도 모르고.]
고창범이나 김현성이나.
진실을 알았다.
배후를 알아내려는 의도는 단순히 해치기 위함만이 아니라, 포섭의 가능성도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고창범은 더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고창석이 자신보다 더 좋은 제안을 한다면. 대가성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현성이 넘어갈 수도 있다.
그건 막아야만 했다.
고창범이 상무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김현성의 능력이지 않던가.
이해했다.
고창범의 생각을.
그의 불안함을.
그건 앞으로의 관계에 그리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고창석이 아니라, 알량한 의리를 챙기는 고창범이라는 존재가 필요했다.
“저는 서로의 잇속을 챙길수록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가성 거래에 서로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신뢰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런 의미로 제가 뭘 하나 하려고 하는데, 절 믿고 지켜보실 의향 있으세요?”
[……뭔데?]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였다.
계획에는 차선책이 존재한다.
고창범이 나가떨어지면 다른 대안으로 대처하겠지만, 지금까지 거래를 확실하게 지켜 온 그와의 관계를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김현성이 말했다.
“제가 고창석이랑 직접 연락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