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61화 (61/130)

13. 정체불명의 배후 (2)

고창석의 사무실.

그곳에서는 매일 열띤 회의가 진행되었다.

임원 중 한 명이, 자료가 기록되어 있는 종이를 들며 말했다.

“혹시 황동우 판사 집안에서 도와주는 거 아닙니까? 듣기로는 이번 명진건설 사태 이후로 그쪽에서 고창범 상무와의 혼인을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던데, 그 정도 집안이면 조건에 부합하기는 합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제 외도 사건이 배후의 계략이라면, 그때는 황동우 판사 집안에서 고창범을 끔찍하게 싫어했을 때입니다.”

“하긴. 지금이야 평판이 바뀌었지만, 고창범 상무는 대산에서 알아주는 쓰레기이긴 했죠.”

황동우의 이름을 펜으로 슥슥 그었다.

아웃.

다른 사람을 확인했다.

사실 좁디좁은 대산 바닥에서, 명진건설 후계 구도에 개입할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료 안에 있어야 하는데, 쉽게 포위망이 좁혀지지를 않았다.

“그럼 강 이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 이사님은 후계 구도에 개입할 분이 아닙니다. 사람 속이야 확신할 수 없다지만,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 왔던 분이 굳이 정체를 감춰 가면서까지 배후를 자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도 사실을 발설하는 등의 계략은, 우직한 강 이사님 스타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신건설은 어떻습니까? 그쪽 아들이 고창범 상무와 매우 막연하다고 들었습니다.”

“글쎄요. 아시다시피 성신건설의 대표는 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걸 망쳐 가면서까지 고창범이라는 하이 리스크에 배팅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그만한 하이 리턴이 돌아온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식적으로 불필요한 싸움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라도 고창범 상무에게 베팅하지 않았을 겁니다.”

몇 달 전.

그때의 고창범은 경쟁력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창범에게 베팅하면서까지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료를 유심히 살펴보던 한 임원이 말했다.

“고창범 상무의 현금 흐름을 살펴보고 있는데, 조금 이상한 행적이 있습니다. 천일 고등학교 1학년 김현성. 그동안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인물인데, 갑작스럽게 그의 후견인을 자처하더니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혹시 배후와 연관이 있는 거 아닙니까?”

김현성.

툭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확실히 뜬금없기는 했다.

일이백도 아니고 제법 큰 돈이 오가는 상황에, 고창석은 가만히 김현성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로서는 모를 것이다.

그게 진실임을.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근거가 부족했다.

“고창범, 그 자식이 원래 돈지랄하는 게 취미지 않습니까? 그냥 어디서 우연히 만난 불쌍한 애를 도와주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전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고, 3년 전에는 가라오케에서 눈이 맞은 술집 년의 빚을 전부 갚아 주었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나지 않았습니까? 후계 구도에 개입할 만한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용의선상에 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김현성의 이름을 슥슥 그었다.

결국, 또 도돌이표였다.

며칠 내내 배후를 캐냈지만, 명확하게 특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고창석은 자료에서 눈을 떼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지잉, 지잉.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런데.

[발신 번호 표시 제한]

낯선 글자에, 고창석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 * *

고창석이 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체도 밝히지 않는 번호에 전화를 거절했는데, 곧바로 상대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고창범 상무를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순간.

벼락을 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창석은 대충 화장실을 간다고 둘러댄 다음에, 비상계단으로 이동해 전화를 받았다.

탈칵.

“고창석입니다. 왜 제게 전화하셨습니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왜 저를 그렇게까지 찾으시는 겁니까?]

전화기 너머.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번호를 제한할 때부터 알았지만, 음성 변조를 통해 본인의 정체를 감추려는 것 같았다.

미지의 존재.

상식적인 접근으로는 정체를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에, 고창범은 이 전화가 기회라고 판단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당신 때문에 제가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저는 그간의 일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더독인 고창범을 이 정도로 끌어올렸다면 당신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의미겠죠. 당신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조건은 무엇이든 맞춰 드릴 의향이 있으니, 고창범이 아니라 저 ‘고창석’을 위해 일하시죠.”

고창범의 배후를 영입한다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었다.

고창범의 전력을 깎아내림과 동시에, 자신의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상황은 없었다.

고로.

고창석은 강한 어조로 상대를 회유했다.

“솔직히 말해서 고창범은 능력이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장남 선호 사상 때문에 그나마 저와의 후계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무 평가가 들어간다면 무참히 깨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 좋은 배경으로도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고창범과 명문 대학교를 졸업한 저. 그동안 가라오케에서 살면서 술집 년들에게 돈을 퍼부은 고창범과 명진건설의 일원으로서 수많은 실무를 경험한 저. 누가 더 명진건설에 어울릴 것 같습니까? 제가 아는 아버지에 대해 단언하자면, 아버지는 결국에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을 회장의 자리에 올릴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회사가 그렇게 커 왔으니까요. 아버지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고리타분하고 팔이 안으로 굽는 모습을 보이지만, 본인의 삶을 헌신했던 명진건설이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명진건설이라는 브랜드에 흠이 날까 타설 사고의 보상을 결정한 것만 봐도, 아버지의 우선순위는 단순히 장남 선호 사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 사실을 당신도 잘 알기 때문에 제게 먼저 연락한 거 아닙니까?”

씨익, 웃었다.

전화가 걸려 온 순간부터, 고창석은 상대의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정체를 감추려고만 했다면 절대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겁니다. 저와의 대화를 바랐기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고, 저는 당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조건을 말씀해 보시죠. 일단 질러 보고 결정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아주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창석이 가만히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자, 이윽고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당신이 회장의 자리에 오른다면 제게 사내이사 자리와 그만한 권력을 내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사실이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도록,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저와의 약속’을 공표해 주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마침내.

미지의 존재가 본인의 욕망을 드러냈다.

* * *

고창석이 자리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리를 꼬더니,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조금 전. 고창범의 배후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예?”

“정말입니까?”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의 반응에 더 들떴다.

고창석은 본인의 성과를 자랑하듯 떠들었다.

“예. 그 배후도 고창범보다는 제가 더 회장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그래서 배후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비록 사내이사 자리를 하나 내주는 조건이기는 하나, 고창범의 전력도 약화시키고 뛰어난 전략가도 얻는 일거양득의 결과이지 않습니까?”

아주 쉬운 문제였다.

이제는 상황이 척척 진행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사내이사 자리를 말입니까?”

“그 배후가 누구인 줄 알고 그런 중요한 직책을 약속하시는 겁니까.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창석의 사람들.

대부분 명진건설의 임원이었다.

그들로서는 본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새로운 사람을 바라지 않았다.

고창석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아니, 지금 다들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고창범, 그 개자식에게 탈탈 털리는 동안 여러분이 뭐라도 제대로 한 게 있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능력이 있는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겠다는데, 그깟 사내이사 자리가 뭐라고 반대하시는 겁니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세요, 숲을. 제가 회장의 자리에만 오른다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어차피 대박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김철진 이사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고창석의 질책에 한발 물러났지만,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명진건설은 전통이 있는 회사입니다. 고창범 상무야 그래도 회장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아무런 반발이 없었지만, 그동안 이 회사의 임원 자리는 최소 20년 이상 헌신한 사람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20년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납득할 만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회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 회사에 진심으로 애정이 있는 사람이어야 저희가 임원으로 인정…….”

“아아, 그만! 그만!”

고창석이 손을 휘휘 저었다.

김철진 이사는 이래서 문제였다.

가끔 심각할 정도로 고리타분한 모습을 보였기에, 고창석은 확고한 목소리로 생각을 밝혔다.

“그깟 전통이 뭐가 대숩니까. 제가 회장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이 회사는 많은 부분이 바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만 생각하십시오. 제가 회장이 됨으로써 얻을 이득. 그거면 충분합니다.”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 말하려는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 *

회의가 끝났다.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자,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선 김철진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어쩌려고.”

사실 그도 진실을 알았다.

고창석.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밖에 모르는 안하무인에다가, 직원들에게 폭언을 내뱉고 불륜을 저지르는 등.

만약 고명진 회장의 둘째 아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인간적으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그런데도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차악(次惡)이기 때문이다.

회사 일을 아예 모르고 매일 술만 퍼마시기 바쁜 고창범보다, 회장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나름대로 노력한 고창석이 회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명진 회장과 같이 은퇴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후계 구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김철진은 회사의 미래가 지금처럼 밝기를 바랐다.

하지만 조금 전.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

이건 절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의 전통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순간, 아무리 거대한 회사라고 한들 균열이 생기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결국, 고창석도 아니었어. 욕망에 눈이 먼 인물은 명진건설을 위한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야.’

단순히 본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회사가 어떻게 되든 말든, 고창석이 내어 주는 콩고물만 받아먹어도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그러했다.

고창석의 발언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결국에 확실한 이득을 주겠다는 말에 기분이 풀려 웃고 떠들면서 회의실을 나섰다. 김철진은 그런 부류와는 달랐다. 진심으로 명진건설의 미래를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회사의 근간이 흔들리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수차례 내뱉었다.

아무래도 고명진 회장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고창범이든 고창석이든 정 인물이 없다면, 전문 경영인이라도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다.

회사를 위해서.

이곳에 미래를 바친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였다.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지잉, 지잉.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뭐야, 이게?”

[발신 번호 표시 제한]

고창석도 똑같이 목격했던, 아주 낯선 핸드폰 화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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