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62화 (62/130)

13. 정체불명의 배후 (3)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전화를 거절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김철진은, 1층에 도착하고서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탈칵.

“당신이 고창범 상무의 배후라는 겁니까?”

[배후라는 표현이 조금 이상합니다만, 김철진 이사님이 생각하는 의미대로라면 맞습니다.]

한 통의 문자.

김철진은 통화에 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고창범을 지지하는 이유도, 갑작스럽게 고창석으로 갈아타려는 이유도, 그리고 여러 사람 중 굳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도. 무엇 하나 일반적이지 않은 행보에, 김철진은 상대의 의도를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의도적으로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의도적이라고요?”

[예. 고창석 팀장이 명진건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가 고명진 회장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명진건설이 추구하는 미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면 절대 사내이사 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회사들은 이사의 직책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도 하지만, 명진건설은 다릅니다. 회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 그동안 헌신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도 부여되는 자리기에, 김철진 이사님은 스스로 명진건설의 사내이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습니까?]

김철진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이었다.

하나도 틀린 것이 없는 말에, 오히려 화가 났다.

“그래서 조롱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런 자리를 당신은 쉽게 얻었다고?”

[아니요. 저는 사내이사 자리에 처음부터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고창석 팀장과 고창범 상무의 차이점을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압니다. 고창범 상무는 그동안 한량처럼 살아왔지만, 최근에 증명한 것처럼 그는 본인의 주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회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에 건설 현장 말단으로 들어갔고, 동생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임원들의 눈치를 볼 겁니다. 물론 개차반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겠지만, 타설 사고에서 그래도 회사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지금 저보고 배신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예. 고창석을 버리고 저희 쪽으로 오십시오. 고창범 상무는 명확한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확실한 사람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어 본인의 사람을 잘 버리지 않으며, 본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회사의 근간은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말단 직원들에게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다치면 주머니를 열 인간입니다. 그리고 고창범 상무가 회장의 자리에 올라선다면…….]

김철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통화 너머의 상대를 대면했다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명진건설에서, 김철진 이사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실 겁니다.]

* * *

툭.

전화를 끊었다.

김철진은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지만, 이미 상당 부분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진건설 사태. 두 아들이 아닌 전문 경영인을 고용했을 때, 가장 선두에 섰던 사람이 바로 김철진 이사였지.’

회귀를 경험하고.

김현성은 계획을 재정비했다.

김영철을 회유해서 박민철 패거리에게 복수하고, 고창범을 후견인으로 만들어 배경 문제를 해결하고. 표면적으로는 계획적으로 흘러갔으나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김철진이었다. 고명진 회장의 회고록에서는 김철진 이사와 같은 임원들이 ‘전문 경영인 고용’을 강력하게 지지해 주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김철진은 고창석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생각을 바꾸었을까.

고민 끝에, 단순히 실익 때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철진 이사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아. 고창범과 고창석. 고창범의 쓰레기 같은 일화를 모두 알고 있다면,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창범을 지지하는 건 쉽지 않았겠지. 그는 진심으로 명진건설의 부흥을 바라기에, 명문 대학교를 나오고 명문 가문과 결혼하면서까지 회장 자리에 진심인 고창석을 지지했어. 최악이 아닌 차악. 그뿐이야.’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번 건드려 볼 가치는 있었다.

만약 김철진 이사가 정말 명진건설에 진심이라면, 사내이사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주는 고창석의 결단을 싫어하리라는 계산을 끝냈다. 그건 고창범의 평판과도 맞물리는 계획이었다. 예전의 고창범은 최악의 취급을 받았지만, 이번 타설 사고로 오히려 차악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었다.

미끼를 던졌다.

이것을 물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

분명한 사실은 김철진 이사를 끌어들이는 순간, 고창범의 위치는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김철진 이사는 고명진 회장을 모셔 온 핵심 중 핵심. 그동안 고창범은 회사 내부에 본인을 지지하는 명확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김철진 이사 딱 한 명의 변심만으로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뀔 가능성이 커. 그때부터는 후계 경쟁이 참 재밌게 변하겠지.’

첫 출발선.

고창범은 모든 능력에서 압도당했다.

첫 번째는 배경.

두 번째는 평판.

세 번째는 실력.

외도를 폭로하며 고창석의 위치를 조금이나마 끌어내렸고, 타설 사건으로 우호적인 평판을 갖추었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고창석의 우위. 아직도 고창범은 객관적으로 회장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김철진의 합류는 첫 번째 조건인 배경에서 우위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때부터다.

배경과 평판.

셋 중 무려 두 조건을 앞서는 상황에, 사람들의 인식은 점차 변할 수밖에 없다.

고창범이 정말 회장이 될지도 모른다고.

고창범이 정말 회장에 어울리는 것 같다고.

인생은 한순간이다.

김현성은 까맣게 물든 핸드폰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 * *

다음 날.

김철진이 고창범을 만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커피가 식어 갈 즈음, 김철진이 침묵을 뚫고 고창범에게 말했다.

“고창범 상무. 아니, 창범아.”

“예, 삼촌.”

호칭이 변했다.

고창범이 아주 어렸을 시절, 김철진은 그를 챙겨 주던 수많은 삼촌 중 하나였다.

삼촌과 조카.

원래의 관계였다.

김철진은 지난날을 회상했다.

“사실 난 너에 대한 기대가 많이 컸어. 넌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뒤뚱거리던 시절에 넌 항상 아버지를 따라 현장을 찾아왔었어. 그때는 지금처럼 큰 공사가 아니라 일반 주택을 짓는 일이 많았는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벽돌 하나를 들어 옮겨 주곤 했지. 그러다 넘어지는 너를 봤을 때 내가 얼마나 심장이 철렁이던지.”

“……제가 그랬다고요?”

“그래. 지금은 왜 그렇게 컸는지 모르겠지만, 넌 정말 귀여웠어.”

고창범이 푸흐, 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피했다.

귀엽다니.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네가 커 가면서 정말 크게 실망했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그렇다고 건설업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애들을 때려서 내가 대신 학교를 찾아가는 일도 많았고, 주민등록증이 나오자마자 허구한 날 술집에 찾아가서 여자를 끼고 놀았지. 그때부터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는 절대 회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차라리 아득바득 노력하는 창석이야말로, 차기 회장으로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몇 달 전까지는 그렇게 확신했지.”

좋기도 하고, 쓰리기도 한.

복합적인 기억이었다.

김철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과거 회상을 끝내고, 진중한 표정을 보였다.

“고창범 상무. 그동안 도와준 배후가 누굽니까?”

지금부터는 삼촌과 조카가 아닌.

상무와 이사의 관계였다.

고창범이 말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조력을 받는 첫 번째 조건이거든요.”

“……그렇다면 더 캐묻지는 않겠습니다. 솔직히 이번에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고창범 상무는 제 밥그릇도 챙기지 못하는 한심한 얼간이인데, 외도 사건부터 시작해서 명진건설의 회장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고창범 상무의 계획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배후라는 사람이 전체적인 틀을 짜 주었겠지만, 그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명진.

그와 똑같았다.

명진건설의 수뇌부들은 비슷한 가치관을 추구했다.

“누구의 도움이냐보다, 누구의 도움이든 받아들여 이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인정합니다. 명진건설에는 고창석 팀장보다 고창범 상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창범 상무를 지지해 주는 그 조력자의 능력 또한, 나 같은 늙은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기를 내걸었다.

정확히는 타협했다.

현재의 명진건설에서 차악은, 고창석이 아니라 고창범이 분명했다.

탁한 목소리.

불분명한 목소리로 떠들어 댔던 말이지만, 김철진은 이상하게도 ‘그 배후’가 했던 말을 믿고 싶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예를 갖추며, 고창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창범 상무님. 지금부터 저는 상무님을 명진건설의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를, 그리고 우리 명진건설을 잘 부탁드립니다.”

* * *

대화가 끝났다.

김철진이 떠나간 자리.

고창범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보였다.

“하, 하하. 이게 되네?”

김현성의 계획.

처음에는 미심쩍었다.

고창석과 대화하여 분란을 유도하겠다는 말에, 혹시 자신을 배신하려는 생각은 아닌지 의심부터 들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동안 지켜본 김현성이라는 존재는 인간적인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자신과의 의리보다는 현실적인 조건을 먼저 챙기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랐다.

정말 계획대로 행동했고, 김철진 이사를 끌어오는 쾌거를 이룩했다.

‘내게 말한 대로야. 김현성은 본인의 신의(信義)를 증명했어.’

고창범과 고창석.

가족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그 관계에 끼어들어 고창석의 뒤통수를 쳤으니, 고창석은 김현성에 대한 원한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고창석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띄우겠다는 계획이 아니다. 본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고창석을 한 방 먹임으로써, 그와의 타협이 없다는 본인의 신의를 증명했다.

그 마음이.

고창범은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양아치같이 살았어도, 배신만큼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고창범이었다.

‘그래, 네가 내게 신의를 증명했으니 나도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네가 날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뭐든 해 줄게.’

벌컥벌컥.

탁.

커피를 들이켰다.

차갑게 식어 버린 커피를 모조리 마시더니, 거칠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알았다.

김현성과의 거래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김현성은 지금까지도 여러 사고를 일으켰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상대가 신뢰를 보인 것처럼, 자신도 믿을 뿐이다.

고창범이라는 인간은 그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살아가지 않았다.

‘네가 내게 무엇을 원하든, 그건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

자리를 떠났다.

현장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늘 그렇듯, 김현성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시각.

김철진의 배신에, 고창석의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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