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惡의 등교-63화 (63/130)

13. 정체불명의 배후 (4)

고창범과 김철진의 만남.

장소만 카페일 뿐, 그건 공개적인 자리였다.

고창범에게 붙은 심부름꾼에 의해 만남 사실이 알려졌고, 고창석은 상당히 분노한 기색을 보였다.

“김철진 이사가 고창범을?!”

“예.”

“씨발, 감히 이렇게 대놓고 날 배신해?”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김철진은 고창범에게 꼬리가 붙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고창범을 따로 만났다는 것은, 고창석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고 그를 지지하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김철진 정도의 인물이 고창범에게 붙는다면, 그동안 고창범을 멀리하던 명진건설의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외투를 챙기며, 곧바로 나가려고 했다.

“팀장님. 참으셔야 합니다!”

“참기는 뭘 참습니까? 그동안 내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며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던 사람이,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고 절 바로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김철진 같은 새끼는 명진건설에 있으면 안 됩니다. 그 새끼가 얼마나 비열한 놈인지 모두에게 알릴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김철진 이사가 노선을 틀었다는 사실을 광고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 임원의 조언이었다.

고창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은 듣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임원이 이어서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분노하는지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김철진 이사는 그동안 저희와 함께한 인물이었기에,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런 갑작스러운 행보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미 배신했습니다. 저희의 미행을 눈치채고도 카페에서 공개적으로 만난 이유는, 그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영악한 사람입니다. 사내이사 자리는 괜히 주어진 게 아니며, 그는 분명히 본인의 변심을 최대한 홍보하여 고창범의 세력을 키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럼 이대로 참으라는 말입니까?”

“예, 참아야만 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는 ‘회장의 자리’를 반드시 쟁취하여 김철진 이사가 설 자리를 없애 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희 모두 팀장님만 바라보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분노를 가라앉히십시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고창석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는 절 믿어 준 대가로 확실하게 보상하겠지만, 김철진 이사는 반드시 짓밟아 버릴 겁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고창범의 배후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가장 반대가 심했던 인물이 김철진 이사인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를 포섭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그리고 훗날 제가 명진건설 회장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오늘의 이 선택을 되돌리지 못할 겁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고창석 팀장님을 믿습니다.”

다리를 꼬았다.

몸을 기대며, 핸드폰을 들었다.

고창범의 배후.

그에게 전화할 생각이었다.

모두가 보는 이 자리에서 그와의 관계를 공표해, 고창석은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 * *

전화기 너머.

탁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고창석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싫습니다만.]

“……뭐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원들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사무실 구석으로 걸음을 옮겨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는 분명히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사내이사 자리는 물론이고 그에 걸맞은 권력까지. 그런데도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겁니까? 대체 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 꾹꾹 억눌렀다.

[김철진 이사가 저희에게 붙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저희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는데, 굳이 예전보다 약해진 고창석 팀장님의 편에 붙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보상을 제안한다고 한들, 어차피 회장의 자리에 올라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 설마. 처음부터 계획한 거였어?”

표정이 굳었다.

김현성의 대답을 듣는 순간, 번뜩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김철진의 배신.

그것은 계획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분노에 흐려진 판단력이, 뒤늦게 진실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그런 거였어. 갑작스럽게 네가 왜 접근했는지 의문이었는데, 김철진 이사와 내 사이를 갈라놓고 그를 포섭하려던 의도였던 거야. 비열한 새끼.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나 명진건설의 고창석이야. 이 회사가 내 아버지 건데, 그렇게까지 하면 뒷감당이 가능할 것 같냐고.”

[이제야 깨달은 것도 우습지만, 말은 똑바로 하시죠. 저는 정말 당신을 따를 생각이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부의 균열을 수습할 정도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면, 본인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는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면. 당신과의 거래를 진지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고창범을 버려서라도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저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겠죠. 그 정도로 세력이 탄탄하다면 고창범 상무의 미약한 세력으로는 무너트리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가능성을 열었다.

계획을 진행하되, 배수의 진을 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 예상이 맞지 않았습니까? 톡 건드렸을 뿐인데 김철진 이사는 나가떨어졌고, 제가 모시는 고창범 상무가 그를 쟁취해 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관리를 잘하시지 그랬습니까. 고창범 상무든 당신이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통화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왜일까.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인물이, 눈앞에서 싱긋 웃는 것만 같았다.

[전 줄을 갈아탈 이유가 없습니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사람들을 모두 보냈다.

그들에게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말했을 뿐, 추가로 어떤 상황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술을 들이켰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독한 술을 들이부은 고창석이, 거칠게 술병을 내려놓았다.

콰앙!

“큭, 큭큭.”

웃겼다.

이렇게 한심한 꼴이라니.

명진건설의 후계자로 태어나, 이런 굴욕감은 난생처음이었다.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참 대단해. 명진건설의 후계 구도를 이용해 전혀 손해 보지 않는 싸움을 걸다니.”

김현성의 말.

명백한 적의였다.

그런데 그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상대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면, 고창범을 버리고 자신으로 갈아탈 수도 있었다고.

‘고창범의 배후는 두 가지의 선택지에 전부 발을 걸쳐 놓았어. 그의 말처럼 내가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김철진 이사를 잘 통제했다면, 그는 고창범을 버리고 내가 내미는 손길을 붙잡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처럼 김철진 이사가 신뢰를 잃고 겉도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를 곧바로 낚아채 고창범의 세력을 키울 의도였겠지. 어떤 선택이든 본인은 손해를 보지 않는 완벽한 계획. 나는 당할 수밖에 없는 판에 발을 들였어.’

대단했다.

고창범.

그 얼간이가 어떻게 평판을 회복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배후에서 확실하게 판을 깔아 주니, 장남이라는 강점이 점점 도드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내게 한 말은…….’

벌컥벌컥.

다시 술을 들이켰다.

오늘까지만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술을 마셨다.

“만약 내가 다시 유리한 판도를 만들어 낸다면, 언제든 고창범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계 구도도.

배후의 존재도.

모든 것을 되찾을 기회는 남아 있다.

이제는 배경에서도 평판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선점할 수 없지만, 단 하나의 조건은 다르지 않은가.

실력.

자신과 고창범은 다르다.

고창범이 아무리 꼭두각시처럼 계획에 맞춰 움직인다지만, 그렇다고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가 실무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은 명문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산으로 돌아온 뒤에 줄곧 명진건설에서 일했다. 장남과 자신의 차이점이었다. 차남의 위치는 절대 장남에 비할 수 없기에, 매일 스스로를 증명하는 삶을 살아오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단순히 고창범뿐만이 아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각기 다른 환경의 경쟁자들을 모두 무너트리며, 고창석은 본인이 왜 회장이 돼야 하는지를 증명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고창석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지금부터는 내 능력을 증명해 주마.”

파벌 싸움을 떠나.

실력으로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고창범을 완전히 압도해, 그의 배후가 자신에게 다시 손을 내밀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를 증명할 것이다.

“너는 결국에 내 앞에 나타나게 될 거야.”

그때.

그를 반드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모두의 인정을 받는 날, 자신은 명진건설 회장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다.

그날부로 고창석은 술을 끊었다.

여자를 멀리했고, 더는 직원들에게 폭언도 내뱉지 않았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후계자 경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악에 받쳐 다짐하는 고창석과는 달리.

김현성은 이미 그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든, 현재 본인의 상황에 집중했다.

팡-!

팡팡-!

미트에 주먹이 작렬했다.

정두철이 타격 위치를 잡아 줄 때마다, 김현성의 강렬한 눈빛이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했다.

빠악-!

“좋아.”

정두철.

그의 능력은 확실했다.

UFC 챔피언을 키워 낸 능력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정두철의 가르침에 따라 김현성은 무서운 성장 속도를 보였다. 하지만 아직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영민을 쓰러트리며 강해졌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김현성이 바라보는 목표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골든 서클.

최태준이 겨우 B등급을 책정받을 정도의 집단.

자괴감이 들었다.

골든 서클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최태준 레벨을 압도적으로 쓰러트릴 실력이 필요했다.

빠악!

팡, 팡, 팡!

움직임이 빨라졌다.

근육들이 부풀었다.

하루, 하루.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계획을 뻗어 나가며, 매일 체육관에서 치열하게 본인의 육체를 깎아 나갔다.

더 날카롭게.

더 파괴적으로.

육체가 변해 나갔다.

마침내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김현성은 언제나 그렇듯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털썩.

“하악, 하악.”

“고생했다. 처음에도 말했었지만 넌 참 독종이야. 웬만한 프로 선수도 매일 본인을 극한으로 몰아넣지 못하는데, 넌 한 줌의 체력도 남기지 않고 전부 써 버리잖아. 대단해. 너도, 그리고…….”

그 옆에.

털썩.

김시우도 뻗었다.

김시우도 최태준이 싸우는 모습을 확인하더니, 김현성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며 같이 훈련 강도를 높였다. 그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평소에도 땀이 많았던 스타일이다 보니, 머리카락이 흐물흐물 풀어 헤져질 정도였다.

“김시우 너도. 장담하는데, 너희는 매일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을 거야.”

대답은 없었다.

대답할 만큼의 체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김현성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반복되는 하루에도 아쉬움은 없었다.

앞으로의 계획.

미끼를 낚아챌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오히려 더 노력할 수 없어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던 시절보다, 지금처럼 뭐라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때였다.

띠링.

핸드폰 화면에 무언가 떠올랐다.

고창범에게서 온 문자였다.

[선물이다.]

그리고 몇 분 뒤.

[노블레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셨습니다.]

짧은 문자 한 줄에, 김현성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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