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전생과는 다른 오늘 (3)
장소를 옮겼다.
노블레스 아파트의 건축 현장이었는데, 야간 경비원은 김현성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미리 고창범에게 연락한 덕분이었다. 원래라면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진건설의 장남인 고창범이 연락하자 야간 경비원은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김현성 형제를 통과시켰다.
김현진이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완공되기 전, 거대한 아파트가 올라가는 현장에 그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같이 건물을 바라보며 김현성이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건축 현장이잖아.”
“맞아. 그런데 단순한 건축 현장이 아니야. 이 건물이 모두 올라가고 나면, 우리는 지하를 벗어나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될 거야.”
“정말?!”
김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파트라니.
집안 형편을 잘 알기에, 아파트로의 이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도 이 주변 입지 잘 알지? 대산에서 제일 발달한 동네고, 주변에 학군은 물론이고 마트나 편의 시설도 많아서 너도나도 살기 희망하는 곳이야. 만약 이곳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더는 한참을 걸어서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도 도보로 10분이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 그리고 겨울에 늘 문제였던 온수도 24시간 내내 콸콸 나올 거고, 보일러가 갑자기 고장 나서 추위에 벌벌 떨 일도 없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어.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그리고 재밌는 사실 하나 더 말해 줄까? 이 아파트를 건설한 회사가 명진건설인데, 지금 전국적으로 안전 문제로 인정받으면서 모두가 명진건설의 아파트를 사겠다고 난리야. 바로 옆에 허름한 아파트 있는 거 알지? 그게 2000년도 초반에 지어진 아파트인데 지금 얼마일 거 같아?”
“……모, 모르겠어.”
김현성이 웃었다.
16살이다.
아파트고 부동산이고, 아직은 낯설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4억이야. 3억이었던 아파트가 최근에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4억이 됐어.”
“4억?!”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학원비 30만 원에도 덜덜 떠는 중학생이, 1억의 호가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재밌지? 건물은 낡아 가고 있는데 가격은 오히려 올랐다는 게. 더 재밌는 사실은, 구축 아파트도 시세가 올랐기 때문에 이 아파트는 더 오를 수밖에 없다는 거야. 우리가 이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서는 5억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아파트에 입주할 때는 7억 이상짜리의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겠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삶이 그래. 더는 돈 몇 푼에 벌벌 떨 필요가 없는데, 너는 학원비를 아끼자고 가시밭길을 걷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김현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5억이니, 7억이니.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들렸다.
무엇보다 5억짜리 집을 대체 어떻게 산단 말인가.
김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이 어디서 나서? 무슨 돈으로 아파트를 산다는 거야?”
낮은 금리와 대출.
고창범의 지원 등.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부동산 문외한에게는, 마법의 단어 하나면 충분했다.
“청약에 당첨됐거든.”
“청약?”
“그래.”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야. 지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 * *
카페였다.
맞은편에 앉은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를 확인하자, 김현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금 전.
김현성은 누군가를 불렀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그는, 김현성을 알아보고 이쪽에 앉았다.
김현성이 말했다.
“고창범 씨라고, 내 후견인이셔.”
“반갑다. 고창범이야.”
슥.
손을 건넸다.
김현진이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고창범이 민망한 듯 손을 거두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상황은 대충 들었다.
김현성이 깔아 준 판.
고창범은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네가 돈 문제 때문에 생각이 많다고 들었어. 그냥 대놓고 말하자면, 이 아저씨가 장학 프로그램을 통해 현성이를 지원하고 있어. 너도 잘 알지? 현성이가 얼마나 똑똑한 인재인지. 천일 고등학교 같은 명문에서 전교 1등은 흔한 일이 아니야. 현성이는 대산이라는 작은 우물에서 끝날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지.”
일방적인 대화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김현진에게, 고창범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 아저씨가 조금 험악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명진건설이라는 거대한 회사의 회장 자리에 올라갈 몸이야. 그렇다면 앞으로의 미래에 내게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어? 현성이 같은, 대산 출신이며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 난 현성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현성이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 되었을 때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현성이에게 많은 지원을 해 줄 생각이야.”
“……정말요?”
“정말이지. 그리고 그 지원이라는 게 단순히 장학금 몇 푼 주고 끝나는 게 아니야.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 문제로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게. 내가 전적으로 지원해서 현성이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해. 그런데 갑자기 현성이가 내게 전화를 걸더라고. 그렇게 지원받은 돈으로 동생의 학원비를 내주었는데, 동생이 형을 걱정한다고 학원에 나가지 않는다고.”
문득.
고창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때는 김현성 형제와 같은 우애를 보였지만, 현실의 문턱을 넘으면서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였다. 씁쓸한 웃음을 삼킬 뿐, 동생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선을 넘은 건 엄연히 동생이었으니까.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괜히 혼자 생각하고 판단할 필요 없어. 지금 장학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한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고, 너 하나 학원에 보낸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아. 오히려 네가 학원을 열심히 다닌다면 현성이는 한시름 덜고 본인에게 집중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 아저씨가 이렇게 널 만나서 하려는 말은 딱 하나야.”
지금부터는.
진심이었다.
인간관계를 맺은 이상, 고창범은 김현성과의 관계를 단순히 대가성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돈 걱정은 말고.”
* * *
일련의 상황.
김현진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형.
하나뿐인 형.
김현진의 우상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뭐든 못 하는 게 없었다.
그렇다 보니 김현진이 형과 같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김현성의 동생이라고 말하면 어디에서든 대우를 해 주었다. 네가 김현성 동생이냐, 네가 현진이냐. 친구들은 자신과 친해지려고 했고, 누나와 형들은 종종 반에 찾아와서 자신을 챙겨 주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아서, 하굣길에 형에게 전달해 달라는 편지와 선물을 받은 적도 많았다.
전생과는 달랐다.
전생에는 형을 따라 천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형이 죽은 이후로 괴롭힘을 대물림받았다.
현생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나락으로 빠지지 않은 지금은, 김현진에게 형은 이상(理想)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완전체였다.
그래서였을까.
중학교 진학 후로는 형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형에 비하면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에, 형의 후광을 빌려서 우쭐대고 싶지 않았다. 그게 전부 다 부담으로 갈 테니까. 자신이 형에게 뭔가를 바라면 바랄수록, 형은 그만한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14살 그 어린 나이에 김현진은 너무 일찍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고창범이 말하지 않았던가.
김현성은 특별한 사람이고, 자신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의향이 있다고.
밖으로 나왔다.
김현진이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형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난 진짜 내가 형에 비해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형은 날 돌보면서도, 그 흔한 학원 하나 다니지 않으면서도 늘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난 성적도 형만큼 좋지 못하면서 학원이 필요하다고 말하잖아. 그래서 고민이 많았어. 형이 날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날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형을 위한 일이 아닐까 하는.”
“그건 절대 아니야.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알아. 형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래도 나는 형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오늘 고창범 아저씨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어. 형을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사람이 있는 거잖아? 내가 학원에 다닌다고 해서 부담이 되지 않는 거라면, 지금부터는 형에게 어울리는 동생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싶어. 사실 학원 진짜 다니고 싶었거든. 나도 남들처럼 하면, 적어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은 있어.”
어리광이 섞인 말투.
동생의 따뜻한 마음에 김현성은 말을 삼켰다.
이래서였다.
이래서 돌아오고 싶었다.
하나뿐인 동생이, 하나뿐인 할머니가.
자신으로 인해 나락으로 빠지는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복수라는 명확한 목표를 떠나, 가족들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김현성이 말했다.
“현진아.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 형은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가 옆에 있을 때는 어리광을 피워도 되고,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도 돼. 그게 무엇이든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웃었다.
그 따뜻한 웃음에.
김현진도 같이 활짝 웃었다.
“알겠어, 형.”
* * *
동생은 먼저 보냈다.
마음이 따뜻했다.
새로운 삶.
이런 상황을 바랐다.
할머니와 동생이 진심으로 웃는 이런 상황을.
현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뒤늦게 카페에서 나온 고창범이 말을 걸었다.
“나 좀 괜찮았냐?”
고개를 돌렸다.
어색하게 웃는 그 모습에, 김현성이 살짝 웃음을 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뭐 이쯤이야. 네가 해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내가 말했잖아. 너를 위해 뭐든 해 주겠다고.”
진심이었다.
김현성의 전화를 받았을 때.
고창범은 곧바로 옷을 챙기고 나왔다.
귀찮고 말고는 계산 범주에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성질이 더럽고 안하무인으로 남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니지만, 본인의 울타리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팔이 안으로 굽었다. 내 사람들. 그가 세상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지만, 내 사람들만큼은 그래도 잘 먹고 잘살기를 바랐다.
김현성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해 주는 사람인데, 그를 위해 이딴 수고스러움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창범과 고창석.
김현성이 두 선택지 중에 고창범을 택한 이유기도 했다.
고창범은 사람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관계를 충분히 맺는다면 미래에 벌어질 일에도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고창석을 밀어주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굳이 고창범을 명진건설의 회장으로 올려야 할 이유가 존재했다.
김현성이 말했다.
“제가 전에도 말했죠. 우리 관계는 대가성이라고요.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저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고창범 씨를 회장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쓸데없이 비장하긴. 그나저나 이제 뭘 해야 해? 네 계획대로 김철진 이사를 끌어오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단순한 파벌 싸움으로는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는 거 알잖아.”
“잘 알죠.”
머릿속의 계획.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몇 차례 있었지만, 상황이 오히려 이상적으로 변했을 뿐 중요한 틀은 벗어나지 않았다.
완벽한 한 방을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상예동에 중앙 부동산이라는 곳이 있어요. 대산에서도 워낙 시골이라 매우 작은 부동산인데, 그곳 공인중개사와 미리 친해져서 매물을 받아 보세요.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그 매물’이 나온다면 곧바로 연락해 주시고요.”
“흐음. 그걸로 뭔가 되기는 하는 거야?”
먼 미래.
그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아무리 나비효과가 있다고 한들, 자신이 회귀하기 이전 시점부터 있었던 일이 없어질 수는 없다.
김현성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예, 확실해요.”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이제 11월이 끝나갔다.
뿌려 두었던 미끼를 낚아챌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